석굴 원정대

20260406(D+90)_인도/아우랑가바드

by 박대희

이번 주 토요일 뭄바이에서 마다가스카르로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제 뭄바이를 거쳐 이곳 아우랑가바드까지 온 이유는 오직 아잔타와 엘로라 석굴을 보기 위해서였다. 이 세계적인 문화유산을 마지막으로 길었던 인도의 여정을 마무리하고 싶었다. 아우랑가바드에 왔지만 엘로라나 아잔타까지는 거리가 있다. 비교적 가까운 엘로라도 편도 30km, 아잔타는 100km를 넘게 달려야 만날 수 있다. 우선은 월요일 휴무인 아잔타를 뒤로 미뤄두고 엘로라를 먼저 방문하기로 했다. 계획대로였다면 이른 아침 움직였어야 하지만 어제의 장거리 이동에 지친 우리는 이른 시간에 눈을 뜨지 못했다. 9시 반이 넘어서야 겨우 숙소 밖으로 나섰다.


1시간 정도 이동하자 엘로라 석굴 입구에 도착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석굴 안쪽으로 들어서고 있었고 늘 그렇듯 새치기를 이겨낸 우리는 가까스로 입장 티켓을 손에 쥘 수 있었다. 엘로라 석굴은 들어서자마자 만나게 되는 16번 석굴을 마주 보고 우측으로 1km, 좌측으로 1.5km, 총 3km 안팎의 거리에 34개의 석굴이 나란히 펼쳐져 있다. 무언가를 어떤 순서로 해나갈지 감을 잡지 못할 때는 역시 내림차순이나 오름차순이 좋다. 우리는 1번부터 차례로 볼 심산으로 16번 석굴의 우측으로 계속 걸어 나갔고 1번 석굴이 보이는 곳에서부터 오늘의 석굴 투어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모든 석굴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모든 사원을 거대한 암석을 파서 만들었다는 것이 경이로울 뿐이었다. 하지만 10번 석굴을 지나면서부터 우리의 관찰은 조금씩 성의가 없어지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번호만 다른 석굴들은 대부분 비슷한 양식을 보이고 있었고 애써 안쪽을 둘러봐도 다른 석굴과 크게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엘로라 석굴의 주인공 16번 석굴에서 잠시 신선함을 느꼈지만 그 뒤로 우리의 발을 움직이게 한 동력은 언제 다시 올지 모르니 꼭 봐야 한다는 본전 생각뿐이었다. 17번부터 34번까지는 어느 석굴도 16번에 미치지 못했다. 그래도 유명하다는 21번과 29번에 기대를 걸어봤지만 그들은 그저 다른 30개에 비해 뛰어날 뿐, 16번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좌측으로 스치는 석굴들을 곁눈으로 훑으며 지나치고 있었다. 몇 발 움직이면 조금 더 자세히 볼 수 있었지만 마음이 육체를 지배하기 시작한 지는 꽤 시간이 흐른 뒤였다. 보이지 않는 내 안의 목소리가 외치고 있었다.


'어차피 다 똑같아. 그냥 지나가. 덥잖아. 벌써 20개도 넘게 봤는데 다른 게 몇 개나 있었어? 다 거기서 거기지. 유명하다는 것들은 다 봤고. 벌써 3시간째다. 지겹지도 않냐.'


마음의 소리에 집중한 우리는 어느새 들어왔던 입구 근처에 서 있었다. 몇 곳을 그냥 지나친 죄책감과 이제 끝났다는 편안함이 교차했다. 출구로 향하는 길에 저 멀리 16번 석굴이 보였다. 나의 마음은 얼마 남지 않은 일말의 죄의식마저 털어내고 싶었는지 다시 외쳤다.


'16번 봤으면 됐지. 엘로라는 16번이야. 위치도 입구랑 딱 붙어서 중앙에 있잖아. 주인공이라는 얘기야. 주인공 보면 다 본 거 아니야? 16번이면 충분해'


지어진 방식이야 완전히 다르지만 경주의 석굴암은 하나의 석굴을 보고 감탄하면 끝난다. 다시 찾고 싶은 약간의 미련이 남게 하고, 무언가 더 봐야 한다는 의무감을 강제하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후세의 자손들이 너무 질리지 않도록 하나의 작품에 집중하신 조상님들의 혜안에 감탄하게 된다. 34개의 석굴이라니. 인류가 이룬 대단한 성취임에 틀림없지만 다시 생각해 봐도 조금 지나쳤다는 생각이 든다. 더 문제는 내일 일정이 아잔타 석굴이라는 점이다. 이곳 역시 29개의 석굴이 펼쳐져있다. 이 석굴들은 어찌 또 둘러봐야 할까. 그래도 다행인 점은 우리가 지금껏 비슷한 유적지를 여럿 거쳐왔다는 점이다. 아마추어처럼 모든 석굴에 힘을 쏟을 생각은 없다. 힘을 뺄 때는 빼고, 집중할 때는 집중해서 취할 것들만 취하리라. 석굴암을 보유한 나라에 살고 있고 베트남의 오행산, 스리랑카의 케이브 템플, 인도의 엘로라까지 두루 거친 우리는 여간한 석굴에는 흔들리지 않는 석굴 원정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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