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전 생각

20260205(D+30)_태국/수코타이

by 박대희

대학 시절 친구 둘과 지리산 종주를 계획한 적이 있다. 그때가 나의 첫 번째 지리산 종주 도전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우리는 화엄사 계곡도 건너지 못하고 서울로 돌아와야 했고 그렇게 된 이유는 오롯이 나 때문이었다. 시작은 좋았다. 우리는 넘치는 혈기에 지금 생각하면 필요 없는 짐 까지(뱀을 퇴치한다고 백반까지 준비했었다. 그 후 여러 차례 방문한 지리산에서 뱀을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바리바리 챙겼다. 게다가 당시에는 대피소가 지금처럼 번듯했던 것이 아니라 텐트까지 짊어지고 올라가야 했다. 그래도 우리는 자신 있었다. 우리는 젊었고 기운도 남아돌았으니까. 문제는 구례구로 내려가는 기차 안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배가 쌀쌀 아픈 것이 에어컨 바람을 너무 세게 맞은 느낌이었다.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하고 몇 발 떼지도 않았는데 나는 더 이상 걸을 수 없었다. 결국 쓰러졌고 당시 고마운 분들의 도움을 받아 주변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진단은 식중독이었는데 나는 지금도 냉방병으로 믿고 있다. 식중독이든 냉방병이든 어쨌든 우리는 그대로 서울로 올라와 헤어졌다. 한 동안 친구들은 그 사건을 두고 나를 놀리느라 바빴다.


긴 여행을 준비하면서 몇 번을 아플 것을 각오했었다. 평범한 생활을 하면서도 1년에 한두 차례는 병원 방문할 일이 생기는데 거의 매일 거처를 옮기다시피 하면서 진을 빼니 몸이 견디기 쉽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오늘로 정확히 여행 시작하고 30일이 지났는데 결국에는 탈이 났다. 방콕, 아유타야를 거치며 너무 많은 땀을 흘린 모양이다. 그때마다 차디 찬 음료를 들이마셨으니 배가 성할 리 없다. 어젯밤부터 뱃속에서 '꾸르륵'소리가 연신 흘러나오며 좋지 않은 변을 보고 있다. 보통 이런 경우 병원에 가면 장염이란 진단을 받곤 했다.


그래서 어제부터 조심하고 있다. 게다가 오늘은 6시간을 버스를 타고 이동해야 했으니 괜히 버스 안에서 험한 꼴을 보일 수는 없었다. 밥도 거르고 물도 조심하고 있지만 좀처럼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푹 쉬어야 하는데 그러기 쉽지 않으니 몸도 화가 많이 났을게다. 그동안 본전 생각에 부지런히도 다녔다. 아마도 다시는 아들과 이런 여행을 하지 못하리란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그대로 바빠질 테고 나는 나대로 또 해야 할 일을 찾아야 할 테니 아들과 짧은 여행이야 기회가 있겠지만 1년을 함께 보내는 여행은 내 생에 마지막이 아닐까. 그래서 자꾸 본전 생각이 났던 것 같다. 장기 전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속으로는 '하나만 더'를 외치고 있었다. 한심하지만 인간은 늘 문제가 생기고 후회하는 동물이다.


지금 시간은 새벽 3시. 열대 지방을 한 달 가까이 여행하면서 신기하게도 모기에 물리지 않았는데 하필 이것들이 오늘 나를 괴롭힌다. 결국 눈을 떴고 어제 쓰지 못한 글을 지금 옮기고 있다. 내일 일출 관람 일정은 포기했다. 멋진 모습을 볼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곳이지만 지금은 일단 한 박자 쉬어가기로 한다. 앞으로 더 많은 곳들을 봐야 하니 잠시 멈추는 것이 영리한 판단일 것이다. 아들은 옆에서 코를 골며 자고 있다. 어젯밤 나는 먼저 잠들었는데 어디서 본 건 있는지 내 이마에 물수건을 얹어 주고 침대 맡에 약을 갖다 놓았다. 수건을 조금만 덜 차갑게 했으면 좋았으련만 화들짝 놀라 잠에서 깼는데 티는 내지 않았다. 아들은 사원의 바다에 지쳤는지 일출 일정이 어그러지고 나니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아빠가 아픈데 어떻게 기분이 좋냐 하지만 표정을 숨기지 못한다. 그래 쉬자, 아들아. 본전 생각을 잠시 접어두기로 한다. 본전 생각에 사로잡히면 그 잘난 고스톱도 끝이 좋지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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