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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NA Jan 08. 2021

어느 통번역사의 책상

너저분 주의

  가끔 다른 사람의 책상 위가 궁금해진다. 어떤 필기구를 쓰는지, 어떤 소품이 있는지, 배치는 어떤지 등등, 나는 다른 사람의 파우치 안에 어떤 화장품이 있는지는 궁금한 적이 별로 없는데 그 사람이 공부하고 일하는 책상이 궁금할 때가 많다.


 그러다가 내 책상 위를 한 번 자세히 보자 싶어서 사진을 찍었다. 특별히 남편에게 카메라까지 빌려 자세를 잡고 찍었으나 카메라가 좋아도 너저분함은 어떻게 되는 것이 아니었다. 특히 이놈에 전선들... 어떻게 숨겨도 숨겨지지 않는다. 번역 작업하는 도중에 사진을 찍을까 하다가 어차피 번역 자료가 띄워진 스크린이 나오면 다 모자이크를 해야 하기 때문에 의미가 없어 보여 하루 일과 마치고 나름 정리를 한 후에 찍었다.


  모든 작업에 가장 필요한 노트북과 안경. 이 노트북과 함께 한지 어언 3년이 지났다. 통대 생활의 모든 흔적과 그간 열심히 통번역한 자료들이 담겨 있다. 데스크탑은 주로 남편이 사용하고 사실 애초에 남편 것이다. 참고로 내 책상 뒤에 바로 남편 책상이 있다. 서로 벽을 보며 작업한다. 다만 둘이 함께 작업하면 조금 좁기도 하고 수다를 떨게 되기 때문에 굳이 같이 작업하지 않는다.;;


  캣툴이나 번역 에이전시 자체 프로그램을 써야 할 때, 공인인증서 필요한 공공기관 접속이 필요할 때 사용하는 윈도 체제 PC도 한 대 있다. 맥북으로 하는 작업이 끝나고 윈도 노트북을 바로 쓰면 언어를 변환하는 방식이 서로 달라 잠시 버벅대곤 한다.


  그리고 그 옆, 책상 왼쪽에는 태블릿이 한 대있다. 주로 번역할 때 PDF 파일을 띄워놓거나 메일함을 열어 놓는 용도로 쓴다. 통역 준비를 할 때는 통역 자료를 태블릿의 굿노트에 옮겨 필기하며 공부한다. 듀얼 모니터를 사용하는 사람도 많은데, 나는 듀얼 모니터보다 고개를 돌리지 않아도 한 스크린에 원문과 번역문이 같이 보이는 것이 편해서 대개 노트북 한 대로 작업을 한다. 태블릿 앞에는 매주 한 주 동안 할 일이 적힌 포스트잍을 붙인다. 매일 할 일을 끝내고 적힌 것을 지운다. 이런 아날로그 감성의 별 것 아닌 것이 왜 이렇게 재밌는지...

    

  책상 오른쪽에는 다양한 노트 테이킹 용지와 다이어리가 있다. A4 이면지는 작업 도중에 업무 관련된 전화를 받았을 때 끄적이며 사용하고 실제 테이킹은 노트에 하는 편이다. 그리고 다이어리는 올해 좀 제대로 써보려고 스타벅스에서 받은 것을 한 권 뜯었는데, 귀찮아서 포스트잍에만 적기 일쑤다. 올해도 아마 거의 새 것 그대로 버리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벌써 든다.


  간소하지만 꼭 필요한 것은 다 들어 있는 필통. 필통은 통대 입시때부터 쓴 오래된 것이다. 중간에 필통 바꾸고 싶은 욕심이 날 때가 많았는데, 통대 졸업하고 나니 그런 욕심도 줄었다. 역시 필통은 학생의 충동 구매품인 건가. 테이킹 펜으로 제트스트림을 쓰는데, 아직도 제트스트림을 쓰고 있는 모습을 보고 누군가 노 재팬 모르냐고 볼멘소리를 했다. 노 재팬은 알지만 그전에 사둔 것은 어떻게든 써야 하지 않겠나 싶다. 예전에 리필을 많이 사두기도 했고 아직 대체품을 찾지 못하기도 했다.


  마이크와 이어폰. 사실 마이크는 집에 있는지 몰랐는데 남편이 사다둔 것을 우연히 보고 놀랐다. 유튜브 하려고 했었나...?(ㅎㅎ) 사실 집에서 통역할 때 동시통역이 아니면 굳이 고사양 마이크를 쓰지 않아도 되는데 기왕 있으니 써본다. 이어폰도 집안에서는 안 써도 되지만 쓰면 또 집중이 잘 되긴 한다. 올해는 좀더 적극 활용해보려고 한다.


  책상에서 노트북과 안경만큼 중요한 업무 필수품, 간식. 요즘은 초등학교 때 사 먹던 브이콘에 푹 빠져서 한 박스나 샀다. 가끔은 내가 일을 하기 위해 간식을 먹는 건지 간식을 먹기 위해 일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래도 이런 즐거움이라도 있어야지.(ㅎㅎ) 그리고 올해 달력. 웹소설는 매일 정해진 양을 해 놓아야 마감일에 부담 없이 전달할 수 있기 때문에 매일 할 양을 적어놓고 이 또한 할 때마다 펜으로 지운다. 예전에는 웹소설 한 번 해보면 재밌겠다 싶었는데, 막상 하니 이 또한 쉽지 않다. 그래도 최근에는 많이 익숙해진 편이다.


  지금 보니 별 것 없는 책상인데도 나는 이 작업 환경이 너무 좋다. 더 넓은 방에 더 큰 책상이어도 좋겠지만 지금도 지금 나름대로 cozy 하고 fancy 하다. 어디든 내 손 때가 묻고 내 흔적이 남은 곳이 가장 나답고 가장 편한 곳이다. 나중에 더 전문가다운 책상을 맞이하게 된다면(그게 뭔지 모르겠지만;;) 그것도 좋겠지만 지금의 작업실, 지금의 책상을 언제까지고 기억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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