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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비안 Jan 09. 2018

난 늘 거실이다

느 책에서 읽었던 인터뷰 기사였던가. 당신이 애용하는 곳은 어디인가라는 질문이었던 것 같다. 조용히 책을 읽기 위해 종종 방문하는 카페나 펍도 있었고, 누구의 방해를 받지 않고 사색을 즐길 수 있다는 3층짜리 옥상도 나왔다. 다들 무언가의 사연으로 특별한 공간을 말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어디지? 언뜻 떠오르지 않는다. 집순이처럼 거의 대부분 집에 틀어박혀 있다. 이유야 어떻게 됐든, 집이 전부고 집 밖에 없다. 



의 활동 반경은 주로 거실이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 가족 모두 애용하는 곳이다. 저녁나절 혹은 휴일을 책임지는 거대한 TV가 있고, 귀염둥이 아들이 애지중지하는 로봇들이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또, 창가 근처엔 갈 곳 잃은 책꽂이 하나가 아이들의 책과 장난감을 품고 있으니 아이들끼리 오붓하게 놀만한 공간이 형성된 셈이다. 늘 지지고 볶으며 싸우고 화해하는 틈 사이에서, 나는 함께한 세월이 고스란한 소파에 기댄다. 책이나 스마트폰을 보거나 때론 멍하니 커피를 홀짝이면서도 꾸벅꾸벅 잠들지 않는 게 용할 지경이다. 옹기종기 모여 밥을 먹고 뒹굴거리다가 이불을 펴고 잠자리에 든다. 그러니, 다른 방엔 특별한 목적 없이 들어가지 않는다. 이를테면, 딸내미는 숙제하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태블릿을 보기 위해 자기 방을 찾는다. 그는 이른 새벽 정신 차리기 위해 커피 하나를 들고 서재의 컴퓨터 앞에 앉는다. 나는 화장품을 바르거나 철 지난 옷을 꺼내기 위해 침실에 들어간다. 그래서, 우리 집은 요즘 같은 겨울이면 거실 빼곤 냉골이다. 보일러를 틀지 않아 차디찬 게 아니다. 사람의 온기와 흔적이 닿지 않으면 공간은 점점 황폐하고 쓸쓸해진다. 어린 시절, 단독주택에 잠시 산 적이 있었는데 방마다 다락이 있었다. 잡동사니로 가득 찬 그곳을 선뜻 열어보지 않았으니 우리의 열기가 닿지 않았던 것일까? 방바닥은 군불로 펄펄 끓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다락에서 새어 나오는 찬바람으로 온몸이 달달 떨렸고 노상 감기를 달고 살았다. 공간도 사람의 손길에 영향을 받는다는 믿음은 아마 그때부터 시작된 것인지 모른다. 



리의 거실은 그런 의미에서 꽤나 아늑하다. 보일러를 잘 틀어 놓기도 하지만 햇볕이 잘 드는 위치라 훈훈하다. 좀 과장하자면 우리 집 거실에선 비타민D 부족 때문에 걱정할 일이 없다. 나는 그 따스한 공간에 붙박이처럼 붙어 있으니 한껏 양기를 보충하는 셈이다. 모두들 각자의 일터로 나가면, 창문을 열어놓고 환기를 시키면서 청소기를 밀어 댄다. 상큼한 바깥공기가 온 집안을 감쌀 때쯤 꼼꼼히 문을 닫는다. 그다음은 나에게 어떤 의식과도 같다. 알파벳이 그려진 아이들 상을 꺼내서 물티슈로 닦은 다음 물기가 묻어나지 않게 휴지로 한번 더 훑는다. 노트북을 연결하고 어제 인터넷과 어제 쓰다 만 문서를 열어놓는다. 원두커피를 갈아 드립용 커피 머신에 세팅을 해둔다. 메모장에 써놓은 아이디어 스케치나 단어들을 살펴보고 어떻게 할까 고민할 때쯤 커피가 완성된다. 따뜻한 한 모금을 마시면서 본격적으로 끄적거릴 준비를 마친다. 그렇게 컴퓨터 속 흰 화면과 손 아래 놓인 작은 네모 자판들에 집중한다. 운 좋으면 두세 시간이고 여의치 않으면 한 시간도 안될 수 있다. 어쩔 땐 그런 하루도 주어지지 않는다. 요즘처럼 애들 방학이면 일단 모든 걸 멈추고 그들에게 집중하는 편이다. 함께 지지고 볶는 시간이 길어지는 만큼 이 공간을 소유가 아닌 공유해야 한다. 내 것이 우리의 것으로 바뀌었을 때의 당혹감은 어쩔 수 없지만 이내 익숙해진다. 고독 속의 창작과 함께 하는 즐거움 중에 무엇이 더 소중할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 생각엔 저울질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각자가 주는 희열은 다른 색깔이며 두 가지 모두 놓칠 수 없는 나로선 대체로 그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마다 이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삶에 대한 절망 없이 삶에 대한 사랑도 없다는 ‘카뮈’의 말처럼, 상황에 따른 선택 없이 발전이 없다고. 한 걸음 물러난 타협은 두 걸음 전진하기 위한 발판이라고. 한 공간 속에서 진종일 아이들과 신나게 생활하다 보면 어떤 선물처럼 글감이 찾아올지 모른다는 자기 위안을 하게 된다.



실 공동체로서의 생활, 때론 혼자 독차지할 수 있어서 혹은 함께일 수 있어서 좋다. 그렇다고, 늘 좋은 건 아니다. 가장 불편할 때는 아무래도 그와 한바탕 싸우고 난 후다. 한마디도 지지 않으려고 따따따 쏘아붙이면서, 머리 한편에서 이후엔 어디로 도망가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정도니까. 둘 중 하나가 자리를 박차고 나가야 싸움이 종결된다. 아이들도 각자의 방으로 사라진 텅 빈 거실에 우두커니 앉아 있으면 새삼스레 이렇게 컸었던가 생각마저 든다. 온 집안을 감도는 적막감 속에서 각자의 공간에서 품어져 나오는 숨소리만 요란하다. 가끔은 강제로 대화를 종결한 상태에서 거실에 대치 상태로 있기도 한다. 침묵의 정적이 흐르거나 TV 소음 사이로 거친 숨소리가 비집고 들릴 때, 밀폐된 곳에 갇힌 듯한 답답함이 밀려온다. 그의 뒤통수를 한대 갈기고 자리를 박차거나 포기하고 싶어 망설여진다. 그때만큼 거실을 수호하려는 일념이 강박관념 내지는 중압감이 되기도 한다. 고맙게도 내 의중을 아는지 혹은 넘겨짚은 것인지 그가 먼저 집을 나선다. 혼자 남겨지고 그 큰 공간이 온전히 내 차지가 되면 일단 자유롭다. 아무런 방해받지 않고 내 생각에 집중할 수 있다. 이 싸움의 잘못이 누구로부터 온 것인가 따진다. 대체로 그의 잘못이다. 그가 무엇을 실수 했는지 요목조목 정리해본다. 어떻게 해야 사과를 받아낼 것인가 이해 타당한 근거를 몇 개쯤 찾아낸다. 나의 이 똑 부러짐에 칭찬스티커를 붙여주고 싶은 심정으로 너털웃음을 짓는다. 그런데, 막상 개운하지는 않다. 혼자 있고 싶은 마음이 커진 탓에 같이 있기 싫어, 이런저런 짜증을 긁어 부스럼 만들어 감정적으로 터트릴 기회를 포착했던 것이 아닐까? 흉금 속의 계획은 나름 실천한 셈인데 설사 그게 의도였다고 하더라도, 상처투성이로 남겨진 혼자는 원하던 그림이 아니었다. 진짜 바라던 건 즐겁게 함께 하는 것이고 그다음은 모두들 행복하게 각자의 시간을 인정해주는 것이었다. 근데 이건 이도 저도 아니다.



족 모두 함께 생활하고 공유하고 있는데, 말로만 인정했던 모양이다. 몇 번의 다툼 끝에 깨달았다. 그들처럼 잠시 머물렀다가 각자의 일터로 가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는 터전이자 생활이자 서재이기에 좀 더 거대한 의미를 부여했다. 단지 거실이 나를 열심히 응원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누군가에게 털어놓지 못한 나의 바람, 어떤 순간의 슬픔과 기쁨에 대한 희로애락의 감정, 꽤 오랜 시간 버티고 견뎌낸 나의 노력과 열정을 지켜봐 줬다고. 그에게조차 섣불리 말하지 못했던 건 조금씩 이루고 보일 무언가로 증명하고 싶기 때문이다. 말이란 게 얼마나 무서운 책임감으로 되돌아오는지 아니까 자제하게 된다. 거실이 보듬어준다는 망상 같은 의인화가 한편으로 힘이 된다. 그렇다고, 온전히 나만을 위한 것이라 할 수 없다. 우리 모두의 공간인데. 같은 곳이라도 사람마다 어떻게 느끼는가에 따라 정의가 달라질 것이다. 나에겐 이렇지만 그나 아이들에겐 또 다른 공간일 것이다. 따뜻한 온기가 있고 자신을 기다리는 그녀나 엄마가 생각나는 곳.  웃고 떠들 수 있으며 하루의 긴장을 떨쳐내고 마음껏 흐트러질 수 있는 곳. 함께 나누고 보듬을 수 있어 소중한 것이다. 그냥 그 자체로 위로와 쉼이 되는 공간이다. 그걸 인정해야 하는데, 괜히 눈치 보게 만들지 않았을까?



실은 일상과 즐거움을 넘어 사색과 성찰의 공간이기도 하다. 둘의 경계는 모호하게 얽혀있어서 어느 게 우선적인지 따지기 어렵다. 그 안락함과 자유로움의 불문율을 깬 건 나 자신이다. 내 입장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다 보니 자기중심적인 생각과 판단을 한 셈이다. 여기서의 시사점은 두 가지다. 행복 차원에서 한발 물러선 배려를 선보여야 하고, 또 나만의 시간이 필요하다면 공간 분리를 생각해야 한다. 어쩌면, 내 아지트를 찾아야 할 시기인지 모르겠다.






사실 거실을 떠올리며 ‘김범수’의 <집밥>을 흥얼거렸는데, 
특히 ‘집 밥 너무 그리워, 가족의 마법, 본가 따뜻한 집으로, 내가 쉴 수 있는 곳’에 꽂혔는데,
정작 이 글은 내 고집으로 넘쳐납니다.
머리 속 이미지와 마음 속 감성이 이리도 다를 수 있다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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