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석사과정 대학원생이다. 2년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연구 이외의 시간을 웹 서비스를 만드는 데 매진했다. 대학원 과정 동안 살 첫 전셋집을 구하면서, 어떻게 이렇게 위험한 시스템이 있는지 많은 의문이 있었다. 그런 의문에 스스로 내린 답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을지 검증해보고 싶었다. 1년 반에 가까운 시간 동안 팀을 꾸리고, 사업을 구체화하고, 지원을 받고 구현하는 단계까지. 그렇게 만들어진 AI 전세계약 진단 체크리스트 ‘깡전킬러’의 여정을 기록으로 남긴다. 이번 글은 깡전킬러를 시작할 수 있도록 받은 투자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전 글에서 이야기했듯, 나는 혼자 사업계획서를 완성하고 동료들을 설득했다. 참여한 공모전은 국토교통부가 주최하고, 국토교통진흥원이 주최하는 ‘창업투자회사와 함께하는 스마트시티 창업 아이디어 공모전’. 최종 제출에 앞서 팀원들과 함께 사업계획서를 검토하고 수정했다. 이 과정에서 가장 신경 쓴 것은 사업의 규모였다.
스타트업은 궁극적으로 시장의 전방위적인 변화를 목적으로 해야 한다. 벤처캐피털 시장이 존재하는 이유다. 작은 조직이 가져올 변화, 다시 말해 엄청난 효율에 시작 자금을 보탬으로써 차후 만들어낼 시장 점유율에 따른 이익의 파이를 함께 취하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목표로 하는 시장의 규모가 중요한 이유다.
사업계획서에서 초기에 목표로 한 것은 향후 5년간 20・30대의 신규 전월세 계약의 50%를 점유하는 것이었다. 현실적으로 설정한 목표였다. 하지만 동료들과 회의 결과 본선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조금 더 큰 그림을 그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더욱 매력적으로 원대한 그림으로 임대차분쟁에 소요되는 법률 업무를 자동화하는 부분까지 고려하게 되었다. 작성할 당시에는 ‘여기까지 하는 건 역시 무리일 수도’라는 안일한 생각을 했지만, 놀랍게도(혹자는 전혀 놀랍지 않을지도) 현재 이 부분은 세이프홈즈에서 구현하고 있다. 사업계획서는 다행히 1차 심사를 통과해 본선에 진출할 수 있게 되었다.
공모전의 취지는 사업을 시작하고자 하는 예비 창업자를 지원하는 것이었기에, 예선을 통과한 팀들에 VC 멘토링을 연계해 주었다. VC를 만나는 것만으로도 많은 대표님들의 소망이라고 하기에 더욱 떨리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엘리베이터 피칭이 되게끔 일주일 전부터 중얼중얼거렸던 기억이 있다. 어떤 큰 성과를 만들고자 갖는 미팅은 아니었지만,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우리가 만났던 VC는 글로벌 엑셀러레이터 PEN Ventures였다.
많이 정리하고 피치를 했다고 생각했지만, 개념을 덜어내고 정제하고 단순화하는 것이 더더욱 필요했고, 앞단에서 사업을 원대화 하는 작업은 걸러져나가야 했다. 꿈을 크게 꾸는 것은 물론 중요하지만, 가지고 있는 리소스 안에서 납득 가능한 게 더욱 중요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번 더 배우는 정제의 중요성.
대학원생 나부랭이가 여의도 파크원에서 VC 미팅도 하고, 인터뷰 녹화도 하고, 가슴이 웅장해지는 시간이었다. ‘되는 데까지 해볼까?’라고 생각했던 마음이 ‘선택은 없다’로 전환되는 계기가 되는 시간이었다.
피칭은 15분 안에 이루어졌다. 문제 / 솔루션 / 시장성 / 경쟁사 / 마케팅 전략 / 비즈니스모델 / 예산 / 팀 구성 이렇게 총 8개 섹션으로 구성해, 각 섹션별로 1분 남짓한 시간 안에 압축적으로 전달할 수 있도록 했다. 이때 참고했던 템플릿은 Sequoia Capital에서 제시하는 ‘How to Present to Investors’이다. Sequoia Capital은 초기의 Apple, Airbnb, Whatsapp, Doordash, Instagram, Dropbox, Evernote, Figma에 투자했던 벤처캐피털 명가이다. 수많은 IR을 받아봤던 입장에서 가장 효과적으로 읽히는 템플릿을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스타트업의 교과서처럼 쓰이고 있는 자료다.
이때 당시 받았던 피드백은 우리가 제시하는 ML모델의 예측변수와 서비스 구동방식에 대한 질문과, 필요성에 대한 공감이었다. 하지만 강한 의구심을 표하는 날카롭고 공격적으로까지 들리는 질문이 마지막에 치고 들어왔다. ‘임차인들에게는 최우선변제권이 있어서 다들 웬만하면 저런 상황에 맞닥뜨리지 않을 텐데, 과연 저 시스템이 필요할까요? 임대차법에 대한 공부는 제대로 하고 제안을 하는 것인지’였다.
결론부터 말하면 심사위원의 질문은 잘못되었다. 하지만, 나는 발표 당시 심사위원의 공격적 반응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어버버 했다. 실상은 알고 계신 것과 다르다고 알려줘야 했지만, 자기 확신으로부터 나오는 그 질문에 내가 감히 부정하는 식으로 말을 해도 되는지 판단이 서지 않았고, 또 그 확신에 찬 말투가 오히려 스스로 의심하게 만들도록 하기도 했다. 결국 심사위원이 알고 있는 게 실상은 다르다는 점을 어필하긴 했지만, 확신 있는 목소리로 말하지 못했다.
이 사건을 통해 스스로 비즈니스에 대해 100% 확신이 설 정도로 스터디를 하지 않았다는 자각을 했다. 실제로 임대차 법규와 구조에 대해서는 다들 모르진 않겠지.. 하고 안일하게 넘기기도 했다. 다각도로 전문가들의 의견을 듣지 않고, 내부적으로만 논의한 결과에 대한 패착이었다. 확신을 얻기 위해서는 인터넷에 올라온 글들을 탐독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다양한 집단의 사람들과 논의하는 과정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 시간이었다. 실제 현장에서 접한 발표들 가운데 추상적인 발표들은 어려운 전문용어로 점철되어 있었고, 각인되는 발표들은 쉽고 간결했다. 또한 그들은 실제 현장에서 시행착오를 겪음으로써, solid 한 비즈니스 경험을 갖춘 이들이었다. 좋은 피칭은 갈고닦은 횟수와 비례하더라.
우리 팀은 대회에서 2등을 하여 3천만 원을 수주할 수 있었다. 2등만으로도 좋은 성과가 아니냐 할 수 있지만, 우리에게 2등은 다소 아쉬운 결과다. 본선에 진출한 팀들 가운데 5팀에게 1등 상인 5천만 원, 그다음 5팀에게 3천만 원을 지급하는 식이었기 때문이다. 확실하게 좋은 인상을 남겼다고 이야기하기 어려운 결과다.
우리 서비스는 개별 전세 물건에 대한 AI 예측을 건별로 결제받는 방식으로, 명확한 BM을 갖추고 있었다. 또한 당시 전세사기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고, HUG의 기금이 역대급으로 많이 유출되는 상황임이 자명했기 때문에 필요성 또한 확실했다. 심사위원 대부분이 서비스의 타당성에 대한 질문보다 구현 방법에 대한 디테일을 묻거나, 공감을 표했다. 1등이 아닌 2등을 하게 된 것은 마지막에 들어온 공격 질문이 결정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공격에 확실함 없이 답했던 나의 태도가 앞서 쌓아온 탑을 무너트렸다는 생각이다. 나보다 더 신뢰가 가는 심사위원의 언어와 태도로부터 많은 판단이 이루어졌으리라.
나는 아이디어를 구체화하여 추진하는 요령이 있는 편이다. 하지만 반대로 디테일이 부족하다는 점을 뼈저리게 알게 되었다. 디테일을 포착하는 습관도 필요하지만, 앞으로 나에게 절실한 것은 그런 강점을 가진 파트너를 두는 것이란 점도 함께 깨닫게 되었다. (실제로 팀원 올리브와 뀨앙에게 그런 디테일이 있기에 론칭까지 달릴 수 있었다.)
아쉬움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실제로 사업자금을 손에 쥘 수 있다는 점은 고무적이었다. 순전히 사이드프로젝트로 4명이나 되는 인원이 함께 힘을 합칠 수 있는 ‘의지’ 보다도 강력한 드라이브가 생긴 것이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우리의 뗏목은 출항을 할 수 있었고, 함께 1년이라는 시간을 버틸 수 있도록 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