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짧고, 예술은 쓰다.

매거진 어라운드를 겨냥한 짧은 끄적임

by 아살리아

인생은 짧고 예술은 쓰다.


지코가 말했다. 모든 것을 백지로 되돌려 놓고, 생각 말고 저지르라고.

각자의 집 거울 앞에선 다들 제일 감각 있는 예술가가 아니겠냐고.




짧은 인생.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 (Los Angeles CountyMuseum of Art , LACMA) 3층에 가면 앤젤스 플라이트(Angels Flight)라는 유화 작품이 있다. 초등학교 3학년 정도 아이의 키만 한 직사각형의 이 작품은 캘리포니아에서 활동했던 작가가 1931년도에 그린 그림이다. 캔버스의 중심을 채우고 있는 두 여성이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고, 배경으로 묘사된 주변 풍광들이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다. 작품명 앤젤스 플라이트. 그림 속 여자들이 밟고 서있는 곳이 사실 앤젤스 플라이트라고 불리는 케이블카다. 1901년 완공된 상하로 이동하는 짧은 기차모양 케이블카로 실제 로스앤젤레스 중심가에 그 역사적 보물이 아직도 움직이고 있다. 그러나 나는 미술관에서 그 보물을 그림으로 먼저 만났다.


“앤젤스 플라이트(Angels Flight)”


일주일에 두 번, 내게 영어를 가르쳐 주었던 루이스와 함께 미술관에 갔었다. 시력이 좋지 않은 그녀의 손을 잡고 미술관을 투어 했던 경험은 아직도 잊지 못할 추억이다. 젊은 시절 그곳 미술관에서 도슨트를 했었던 그녀는 내가 그림의 제목을 말하면 모든 것을 꾀고 있는 듯 그림에 대한 설명을 내게 들려주었다. 사실 그녀는 노환으로 인해 외출 시에 손을 잡아 주지 않으면 스스로 거동이 불편했다. 같은 공간에 서서 같은 그림을 바라보았지만, 우리는 그림을 보는 방식이 서로 달랐던 거다. 나는 철저히 시력에 의한 현실의 세계에 그림을 보았고, 그녀는 기억력에 의한 지난 경험의 세계에 그림을 추억했다.


당시 그녀의 나이 97세. 2년이 지난 뒤, 그녀는 생을 마감했다. 그녀의 역사는 길었다. 그녀가 내게 들려주었던 남편의 한국전 참전 이야기는 그것을 더 감하게 했다. 그녀를 잘 알지 못하는 이가 그녀의 단편적인 이야기만 듣고 섣불리 판단할지 모른다. 누구보다 긴 생을 살았다고. 과연 그녀의 인생이 길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루이스! 이게 모야?”

“작년에 내 동생이 사준 생일 선물!”


어느 날 그녀의 집 거실에서 손바닥만 한 돌멩이를 보았다. 닳고 닳아 매끈 해진 둥근 돌멩이에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루이스는 작년 생일에 동생으로부터 그 돌멩이를 선물 받았다고 했다. 돌멩이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AT LEAST YOU`RE NOT AS OLD AS THIS ROCK’

(적어도 당신은 이 돌만큼은 늙지 않았어.)




쓰디쓴 예술.

마니아 층을 형성하고 있는 한 TV 프로그램에 빨간색 멜빵의 청바지를 입은 두 남자가 나와 우스꽝스러운 몸놀림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빠르게 그려나가던 하얀 도화지 위의 검은색 형체들은 예사롭지 않았다. 암전이 되었고, 연두색의 불빛이 잔잔한 음악에 맞춰 흔적을 남겼다. 불빛의 잔상은 바다를 만들었다. 곡선이 모여 여자의 옆모습이 되었다. 음악이 멈춘 공간에 남은 것, 그것은 하나의 완벽한 작품이었다. 소름이 돋았다. 그들의 인스타를 팔로우했다. 며칠 뒤 대학로의 한 소극장에서 공연을 한다는 소식이 올라왔다. 추석이 지나고 결혼을 하는 친구에게 내가 느낀 그날의 감동을 결혼 선물로 주고 싶었다.


“민진아. 잘 들어가고 있니?”

“어. 지금 가는 중이지. 이제 분당 진입했네. 너는?”


“나도 지금 가고 있어. 오늘 공연 잘 봤어. 대학로 너무 멀어서 오늘 너 만나기 전에 좀 귀찮기도 했는데, 오랜만에 공연 보니까 좋았어!”


짧은 인생, 고작 3분의 1이 넘어가고 있을 뿐인데, 이제 우리는 공연을 보기 위해 대학로에 가기에는 체력적으로 한계가 온 것 마냥 늙어있었다. 예술을 찾아 비루한 몸뚱어리를 움직이는 것이 쉽지 않아 버린 세월을 한탄한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오랜만에 다시 찾아온 예술이 주는 감동에 반가웠다. 친구도 나와 같은 감정을 느꼈을 거라 생각한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걸려왔던 그녀의 안부 전화가 그것을 증명했다.




그래서 인생은 짧고 예술은 쓰다.

우리는 모두 예술가로 태어난다. 소꿉놀이로 엄마와 아빠, 때로는 아기가 된다. 아무 이유 없이 재잘거리며, 담벼락에 낙서를 하고, 일기를 쓴다. 연극, 음악, 미술, 글쓰기. 우리가 태어나면서 겪는 보편적인 예술활동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는 한때 예술가였던 자아를 까맣게 잊어버린다. 그리고 늙어버린 신체를 묵묵히 내려다보며, 예술의 쓴맛을 회고한다.


내 생애 가장 나이 차이가 많이 났던 친구, 루이스의 계단실 벽 한켠에는 그녀가 그린 난해한 그림이 걸려있었다. 그녀는 내게 “Abstract”이라는 단어를 설명할 때, 그 그림을 보여주었다. 예술의 조예가 깊었던 그녀는 늙어가는 신체에 아랑곳하지 않고 예술활동을 이어갔다.


TV 프로그램의 한 회 출연으로 5회 공연 전석 매진을 기록했던 두 남자들은 공연의 마지막에 마이크를 쥐고 이렇게 얘기했다.


“거리에서 만나요.”


그날 공연을 본 대부분의 관객들이 TV 프로그램을 통해 그들을 찾아온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들은 다시 겸손한 자세로 거리에서 만나자고 호소했다.


신곡이 나올 때마다 매번 차트를 올킬하는 요즘 가장 핫한 젊은 뮤지션, 지코의 신곡에는 이런 가사가 있다.


“모든 것을 백지로 되돌려 놓고, 생각 말고 저질러 붓은 너가 쥐고 있어. 제일 감각 있잖아 자기 집 거울 앞에선.”


각자의 방식으로 예술을 펼치는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받아, 잊고 있는 예술적 자아를 끄집어 내보자.


비록 인생은 짧고, 예술은 쓸지라도.




부록

이 글에 영감을 준 예술가

(정작 그들은 알지도 못할 테지만)


신곡 “Artist”를 발표한 원숭이띠 미혼남 우지호씨

진정한 거리의 예술가 크로키키브라더스

“Abstract”한 그림을 그렸던 나의 영원한 친구 故 루이스다운즈

당장 예술가가 되라고 얘기했던 김영하 소설가

그리고 오랜만에 글을 쓰게 만든 브런치어라운드


본문에 언급된 작품

Angel's Flight / Millard Sheets (United States, California, Claremont, 1907-1989)

United States, 1931


커버 이미지

2016년도 스페인 여행중 예술가 가우디의 예술적 감흥을 불러 일으키는 작품, 구엘공원을 바라보는 필자의 뒷통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