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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살리아 Nov 17. 2019

옷장 속 사라진 아이

 검은 형체의 두 남자가 드미트리 앞에 마주 섰다. 그들 사이에 미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서로 쉽사리 입을 열지 못하고 한동안 그렇게 어색하게 서있었다. 먼저 입을 뗀 건 드미트리였다. 

“보드카?”

“사람을 찾고 있어요. 보드카를 원했다면 건너편에 있는 바를 찾았을 겁니다.”

카일이 정중하게 대꾸했다.

“난 또. 옷차림을 보아하니, 원하는 게 이건가 싶었지.”

드미트리는 들고 있던 보드카를 대신 들이켰다.

“그렇게 얇게 입고, 이 추위를 버티는 게 신기하네.”

드미트리가 넌지시 던진 말에 제이슨은 화제를 돌려오겠다는 생각을 했다. 재빨리 수트 안쪽에 넣어 둔 회색의 안대를 드미트리에게 내보였다.

“이 그림을 알고 있나요?”

드미트리는 마시던 보드카에 입을 떼지 않고 젖혀진 고개를 그대로 둔 채 눈알을 아래로 굴렸다.

“여기 이 밑에 조그마한 그림입니다. 자세히 보셔야……”

제이슨은 노파심에 안대를 들어 드미트리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보다 더 빠르게 드미트리가 입을 열었다.

“찾는 것이 그 그림을 그린 사람?, 아니면 그 안대의 주인?”

드미트리는 이제는 거의 남지 않은 보드카를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둘 다.”

옆에 있던 카일이 대답했다.

“전자라면 확실히 말해줄 수 있어요.”

“후자라면?”

“나도 모릅니다. 그 안대의 주인이 워낙 바람 같은 친구라. 어디서 지금 무얼 하는지는 아무도 모르죠.”

“바람 같은 친구라...... 당신의 그 바람 같은 친구가 오늘 이곳을 왔다 가진 않았습니까?”

카일이 테이블에 놓여있던 구겨진 열차 티켓을 들어 보였다. 로이가 흘리고 간 오늘 날짜의 블라디보스톡행 2등석 열차 티켓이었다. 드미트리는 내려놓았던 보드카를 다시 손에 들고 마저 다 들이 켰다.

“그 열차 티켓의 주인을 왜 찾는 겁니까?”

조금은 격양된 목소리로 드미트리가 물었다. 카일은 차분한 어조로 대응했다.

“자세한 건 사정상 말씀드릴 수 없어 유감입니다. 우리 예상이 맞는다면 이 안대에 새겨진 그림을 당신이 그렸을 테지요. 그리고 안대의 주인은 오늘 이 곳을 다녀갔고.”

 드미트리는 소파로 가서 깊숙이 엉덩이를 파묻었다. 양팔을 들어 소파 뒤로 걸치고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뜸을 들였다.

“나는 당신들이 원하는 대답을 해줄 수 없어요. 알고 있다고 해도 말할 수 없고, 물론 알지도 못하지만. 뭐. 이 말도 당신들이 믿을지는 모르겠지만.”

카일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소파에 앉은 드미트리 앞에 마주 보고 섰다. 그리고는 상체를 살짝 숙여 그에게 힘 있게 대꾸했다.

“믿어요. 우리도 로이의 친구입니다. 물론 이 말을 잔뜩 경계심을 품은 그쪽이 믿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들 사이에 또다시 침묵이 일었다. 드미트리는 다시 소파에서 일어섰다. 두 남자와는 다르게 한 곳에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계속해서 몸을 움직였다. 잠시 동안 어수선한 그의 움직임을 카일과 제이슨이 눈길로 부지런히 쫓아다녔다. 드미트리의 발걸음이 현관에 멈춰 섰다. 이내 돌아선 그가 방금 전과는 다른 안정적인 음성으로 두 남자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당신들도 트래블러인가 보군요.”

“아…… 그.. 그렇죠. 나이 많은 형이랑 세계일주 하려니까 힘드네요. 하하.”

제이슨이 어색하게 대답했다.

“훗. 당신은 거짓말을 참 못하네.”

“네?”

드미트리는 앞에 서 있는 두 남자의 옷차림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 복장으로 여행을 다닌다는 게 말도 안 된다는 점을 지적한 듯한 제스처. 당황한 제이슨은 변명에 단어들을 찾느라 애를 썼다.

“놀랄 것 없어요. 당신들 세계에서 말하는 트래블러가 어떤 건지 잘 알고 있으니까. 여권도 필요 없고, 굳이 비행기나 기차를 탈 필요도 없는 사람들이라는 거. 물론 택시를 탈 일도 없고.”

드미트리는 다시 뒤돌아서 현관문 가까이 섰다.

“그리고…… 문을 열 필요도 없겠지.”

드미트리는 닫혀있던 현관문을 열었다 닫았다. 문 위에 달려있던 방울 모양의 장신구가 명쾌한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정체를 들켰다는 생각에 제이슨은 당황한 표정을 감추려 들었다. 그와 다르게 계속해서 평정심을 유지하던 카일이 여전히 변함없는 어조로 대답했다.

“미안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도 때로는 택시를 잡아 타거나 문을 열고 들어가기도 합니다.”

“아! 사과까지 할 필요는 없어요. 철저하게 정체를 숨기고 다니는 것이 당신들이 지켜야 할 사항이라는 것을 아니까요.”

“우리를 잘 아는 걸 봐서는 제대로 찾아온 것 같네요.”

“글쎄요. 제가 두 신사분이 원하는 것을 가지고 있을지는 잘 모르겠네요.”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팔짱 낀 자세로 가슴을 잔뜩 웅크리고 서있던 제이슨이 좀 더 앞쪽에 서서 불어오는 바람을 마주하고 서있는 카일에게 물었다.

“로이가 나타날까요?”

“아마도.”

“…”

“그 타투 청년의 말이 사실이라면.”

“근데 어떻게 로이를 잡죠?”

“잡을 수 없지.”

“잡을 수 없다고요?”

“잠시 잡아 두는 거지.”

하늘은 어느새 어두운 빛깔로 물들었다. 그에 맞춰 졸로토이 다리의 가로등 불빛이 켜졌다. 다리 위를 빠르게 지나가는 차량의 전조등 불빛이 가로등 불빛과 더불어 어두운 밤의 캔버스에 오렌지색으로 칠해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채도는 점점 높아져 갔다.

“황금 다리라고 불릴 만하네요.”

제이슨은 여전히 팔짱을 낀 채 다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단지 웅크렸던 상체가 조금은 펴졌다. 카일은 옆에 나란히 서있는 제이슨에게 고개를 돌려 물었다.

“블라디보스톡은 처음인가?”

“아뇨. 열일곱 살 때 처음 와봤어요. 그러니까 한 10년 전인 거 같네요.. 그때는 제가 서있는 곳이 러시아 땅인지도 모르고 돌아다녔죠. 트래블러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거든요. 그때는 스스로 잘 컨트롤하지 못했어요. 저기 다리 너머에 있는 곳이었는데……”

“루스키 섬?”

“네! 루스키! 그때는 꿈을 계속 꾸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잠이 들었을 때 주로 트래블을 했었는데, 도착지점에서 눈이 떠지더라고요. 일종의 잠꼬대하듯 시작해서 몽유병 환자처럼 신나게 돌아다니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면 어김없이 침대 위였거든요. 그러고 나면 드는 생각이 ‘아. 또 오늘도 날아다니는 꿈을 꾸었구나.’ 했죠.”

“꿈속이 인적이 드문 곳이어서 다행이네.”

“헤헤. 그러게요. 근데, 그땐 저 졸로토이 다리도 없었던 것 같은데.”

“아마. 네가 루스키 섬을 다녀간 후 다음 해에 짓기 시작해서 4년 뒤에 다리가 완공됐을 거야. APEC 정상 회담 개회에 맞춰서 건설됐으니까.”

“아, 그렇구나. 지구는 계속 진화하네요.”

“글쎄. 그게 진화 일지는…… 하지만 세상이 빠르게 변하는 것만은 확실해.”

“그럼, 우리 같은 트래블러들도 오랜 시간이 흐르면 진화… 아니 변해 있을까요?”

카일은 제이슨의 물음에 지난 일을 잠시 떠올렸다. 햇볕이 따뜻하게 내리쬐던 어느 한가한 오후 날이었다. 그와 같은 트래블러 여럿이 옥상에 모여 점심식사를 하는 자리였다. 그곳에 있던 누군가가 지금의 제이슨과 같은 질문을 모두에게 던졌고, 그곳에 있던 모두는 그 화두 한 가지로 서로의 각기 다른 상상력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카일은 그날을 회상하며 옅은 미소를 띠었다.

“모를 일이지.”

제이슨은 다리를 내려다보던 일을 멈추고 몸을 돌아섰다.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이 얼마나 고역인지를 얼굴로 내비치고 있다. 더욱이 그 장소가 아주 춥고 바람이 부는 곳이라면 말할 것도 없듯이. 다른 주제의 대화를 이어가는 것이 이 고역스러운 시간을 이겨내는 유일한 방법인걸 깨달은 제이슨은 카일에게 로이에 대해 물었다.

“근데 로이는 언제부터 자신이 트래블러인지 각성하게 된 거죠?”



그곳에 순백의 옷장이 있었다. 양 문으로 열리는 한 칸짜리 옷장 안에서 한 아이가 웅크리고 자고 있다. 마치 엄마의 배 속에서 잠을 자는 태아의 모습처럼 아이는 그 어둡고 좁은 공간에서 안정감과 편안함을 느낀다.

처음에 아이의 부모는 옷장 속에 숨어 들어가 잠이 드는 아이를 걱정했다. 혹여나 우리 아이가 사회성이 떨어지는 것은 아닌지. 그러나 커튼 뒤에 숨고, 테이블 아래에 몸을 웅크리고 앉아 그림을 그리는 것은 아이들의 본능적인 행동에 불가할 뿐이다. 태아였을 때 경험한 비슷한 환경을 찾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행위다. 부모와 분리된 최초의 자신만의 아지트를 갖는 일. 어린 로이의 아지트는 그의 방안에 있던 순백의 옷장이었다.

“로이는 잠들었어.”

아이의 엄마는 오전 내내 밀린 집안일을 하느라 오후 2시가 다돼서야 겨우 의자에 앉을 수 있었다. 따뜻한 얼그레이 차를 한 잔 마시며 정원에 나와 남편과 통화를 하고 있었다.

“뭐? 골프채를 또 샀어? 택배? 그래 알았어.”

남편과의 짧은 통화를 끊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인터폰이 울렸다. 택배기사였다. 분명 남편이 주문한 골프채 박스가 현관 앞에 놓여있을 터다. 정원을 가로질러 현관까지 가기 위해서는 차를 타야만 했다. 넓은 정원은 젊은 부부가 산책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으나 무거운 택배를 들고 걸어 들어오기에는 너무 멀었다.

알츠하이머 환자들의 기억력 저하 속도를 완화시키는 신약을 개발한 남자는 글로벌 제약회사에 원천기술을 넘기고 사천만 불의 현금을 챙겼다. 남자가 개발한 신약은 임상실험을 거쳐 안정성을 검증받으며 시판되었고 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동종업계에서 남자를 스카우트하려는 물밑 작업들이 이어졌지만 수많은 러브콜을 뿌리쳤다. 남자는 그가 개발한 신약에 대해 로열티 13%를 받고 있다. 더 이상 부의 축적이 무의미해졌다.

그는 한적한 시골에 땅을 매입하여 가족과 함께 살 곳을 마련하였다. 그가 직접 설계한 정원이 있는 집은 두 부부와 어린 남자아이 그리고 애완견 한 마리와 살기에 더할 나위 없이 아늑했다. 택배 온 물건을 찾으러 가야 할 때만 빼놓고는 말이다.

“현관을 너무 멀리 만들어놨어.”

여자는 투덜대며 레인지로버에 시동을 켰다. 작년에 분양받은 강아지가 그녀의 시동소리에 짖어댔다. 아직은 몸집이 작은 골든리트리버다.

“링고! 로이가 깨 면 잘 달래주고 있어! 엄마 금방 다녀올게!”

차량 유리창을 내려 소리쳤다. 그녀의 말에 링고는 금세 짖어대는 것을 멈추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가 멀어지는 것을 끝까지 보고, 이내 거실 안으로 들어갔다.

넓은 정원을 가로질러 여자의 차가 현관 가까이에 가자 철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차에서 내린 여자는 열린 문을 통과하여 바깥으로 나왔다. 역시나 기다란 박스 하나가 현관문 밖에 세워져 있다. 한때는 유능했지만 지금은 골프에 빠진 백수에 불과한, 그녀가 사랑하는 남자의 골프채일 터다. 긴 박스를 끌고 트렁크에 실었다. 다시 레인지로버에 올라탔다. 차를 돌리기 위해 현관문을 완전하게 통과했다. 그리고 다시 차를 돌려 현관 앞으로 들어섰다. 그새 닫혀버린 현관 앞에 차 머리를 들이댔다. 자동으로 달려있는 센서가 동작하지 않았다. 여자는 차에서 내려 들고 있던 현관 키를 눌러보았다. 역시나 아무런 반응이 오지 않았다.

“아. 이거 또 이러네.”

여자는 경비업체에 전화를 걸었다. 5분이면 경비업체 직원이 달려와 신원을 확인하고 문을 열어줄 것이다.

 

 

“놀라지 마. 너는 지금 트래블을 한 거야. 이쪽으로 가까이 와볼래?”

웅장한 숲 속에서 한 아이 앞에 남자가 나타났다. 삼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남자였다. 머리 색은 갈색이고, 머리색과 같은 색의 눈동자가 태양빛에 반짝였다. 남자는 한쪽 무릎을 꿇고 손을 뻗어 아이에게 미소를 보였다. 경계심을 갖던 아이는 이내 남자의 손을 잡았다.

“저기 아래 보이지?”

“우리 집인데요.”

“그래.”

“근데 왜 연기가 나요?”

“네가 잠든 사이에 집에 불이 났어. 너무 걱정하지는 마. 저기 저 아저씨들이 금방 불을 꺼주실 거야.”

남자와 어린 로이가 내려다보는 아래로 불길이 일고 있었다. 여자가 잠시 택배를 찾으러 간 사이 벌어진 일이다. 세탁기에서 시작되었다. 작은 불꽃은 이내 세탁실 전체를 태우기 시작했다. 불길을 본 것은 링고뿐이었다. 불길을 향해 짖어대는 것을 현관밖에 있던 여자는 듣지 못했다. 5분 뒤에 나타난 것은 경비업체 직원뿐이 아니었다. 신고를 받고 온 소방관들을 여자는 황당하게 마주해야만 했다.

“이 집. 주인이신가요?”

“네. 그런데요. 무슨 일이시죠?”

“남편 분께서 신고하셨어요. 실내에 CCTV가 있으신가요?”

“네. 아이방이랑 거실, 부엌, 세탁실에 있어요. 신고라니요? 무슨 일로?”

“세탁기에서 불이 난 거 같습니다. 일단 들어가서 자세히 확인해봐야겠습니다.”

불과 십 분도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집안 전체가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소방차 뒤를 따라 차를 몰고 가던 여자의 시야에 불길에 휩싸인 집이 들어왔다. 차에서 내려 미친 듯이 집안으로 뛰어 들어가려는 것을 소방관이 막아섰다.

“위험합니다.”

“집 안에 제 아이가 있어요!”

여자는 놀라 소리쳤다.

“아이가 몇 살입니까?”

“다섯 살이요. 낮잠을 자고 있었어요! 살려주세요!”

“진정하세요. 아이가 어디에 있었죠?”

“아이방이요. 2층에서 맨 끝방이요. 옷장 안이요.”

“옷장이요?”

“네. 옷 장안에 있어요. 살려주세요. 제발……”

 

 

“아직은 위험하니까 여기서 기다리자.”

“엄마는요?”

“엄마는 안전하단다.”

“엄마가 걱정할 텐데, 엄마가 날 찾을 거예요.”

“그래. 저 불길만 좀 잠잠해지면 아저씨가 데려다줄게.”

어린 로이는 남자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처음 보는 불타는 집의 모습에 꽤나 놀랐을 것이다.

“무섭니? 다른 곳에 가있을까?”

“아니요. 우리 아빠가 아끼는 집인데, 아빠는 알고 있나요?”

“아빠가 저 소방관 아저씨들을 불렀어.”

“그럼 아빠도 지금 저기 있나요?”

“그래. 엄마랑 같이 있을 거야.”

남편의 차가 현관을 지나 정원을 가로질렀다. 이미 여러 대의 소방차가 그곳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가 일궈온 보금자리가 활활 타오르고 있는 형상이 그의 동공에서 일렁였다. 끔찍했다. 남자는 잔디밭에 주저앉아있는 아내를 발견하고 달려갔다. 그녀 앞에 천에 쌓인 링고를 들고 한 소방관이 서있었다. 링고의 금빛 털 대부분이 검게 그을려 있었다.

“아이 방 옷장 앞에서 발견했습니다. 아드님을 찾고 있었던 거 같아요. 심각한 화상을 입었습니다. 조금만 늦었어도……”

“세상에! 링고! 저희가 키우는 강아지입니다.”

남편은 아내의 어깨를 감 싼 팔을 풀어 화상을 입은 링고를 감싸 안았다. 가까이서 링고를 본 아내는 더욱 흥분한 어조로 소리쳤다.

“로이는요? 제 아이는요?”

“집에 있는 모든 옷장을 다 뒤졌는데 없었어요.”

“그럴 리가요! 분명 옷장 안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는데……”

여자는 거의 울부짖고 있었다.

“여보! 진정해. 어디 다친 데는 없는 거야?”

“로이가……. 저 안에 로이가…… 우리 아이가……”

“괜찮아. 아무 일 없을 거야. 내가 찾아올게. 걱정 마.”

 

 

“이제 좀 불길이 잦아든 거 같네. 그만 가볼까?”

아까부터 멀리서 불타는 집을 내려다보던 남자는 연기가 소각되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자신의 무릎을 굽혀 자세를 낮춘 뒤 어린 로이에게 물었다.

“아저씨도 같이 가나요?”

“아저씨는 아저씨 집으로 돌아가야지. 나를 만난 건 비밀이야!”

“아저씨 집은 어딘데요?”

“여기서 아주 멀리 있어.”

“제가 갈 수 없어요?”

“지금은 같이 갈 수 없어. 그렇지만 우린 나중에 친구가 될 거야.”

“언제요?”

“음, 한 이 십 년 뒤? 네가 아저씨처럼 이렇게 크면! 그때 아저씨처럼 갈색 눈을 가진 친구를 마주치게 될 거야.”

남자는 왼쪽 검지와 엄지 손가락으로 자신의 왼쪽 눈 커플을 위아래로 펼쳐 보였다.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이자, 어린 로이는 금세 까르르 웃기 시작했다.

“아저씨는 안 늙어요?”

“하하. 그래. 아저씨는 늙지 않고 네가 커서 아저씨 앞에 나타날 때까지 기다릴게! 아저씨가 까먹을 수도 있으니까 꼭 반드시 그 친구에게 먼저 다가가 너의 정체를 밝혀 줄래?”

“정체요? 정체가 뭐예요?”

아! 미안! 정체는…”

동그랗게 눈을 뜬 어린 로이에게 남자는 친근하게 다가가 귀에 대고 속삭였다.

“너도 그 갈색 눈의 친구처럼 트래블을 한다고 얘기하면 되는 거야.”

그 말을 남기고 남자는 어린 로이의 눈 앞에서 안개처럼 사라졌다.

 

 

“아마 그때 로이가 다섯 살이었을 거야.”

“아, 그때 처음 로이는 트래블을 한 거군요. 무사히 집으로는 돌아간 거겠죠?”

“그랬지. 뒤뜰에 있는 것을 소방관이 발견하고 아이의 부모에게 데려갔다지. 아마 로이는 자다 깨서 밖으로 나와 놀고 있었다고 얘기를 했을 거야.”

“다행히 해피앤딩이네요.”

제이슨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일었다.

“대신 그의 아지트가 검게 불타버렸지. 아마 그 이후로 로이는 흰색 성애자가 된 걸 지도 몰라.”

“아하. 얘긴 들었어요. 집안이 온통 흰색이라고. 근데, 그때 로이 앞에 나타났던 그 남자는 누구였을까요?”

“그건, 오웬이었어.”

제이슨의 물음에 카일이 대답했다.

“정확히 말하면 미래에서 온 오웬이었지. 오웬은 사고가 날 줄 미리 알고 로이 앞에 처음 모습을 보인 거야.”

“미래에서 온 오웬이요?”

“그래. 오웬은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원하는 시간대로도 트래블이 가능해. 우리와는 다르지.”

“그러면..?”

“오웬은 타임 트래블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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