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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살리아 Nov 17. 2019

콜드플레이

 현장에 있던 관객들은 하나같이 자이로 밴드를 팔목에 차고 있었다. 입장하면서 받은 불투명한 흰색의 팔찌다. 액정이 나간 애플 워치 테스트 모델 같기도 하다. 평소에는 단순히 불투명에 그치지만 공연이 시작되고 음악이 연주되면 그 음악에 맞춰 자동으로 불빛이 뿜어 내도록 프로그램이 되어있을 터다. 해가 지고 완벽한 어둠이 드리우자, 자이로 밴드가 내뿜은 불빛은 그곳 야외 공연장에서 장관을 이루기 시작했다. 5만 개의 불빛이 어둠 속에서 음악에 맞춰 흔들거렸다. 상공에서 바라보면 단연코 아름다운 빛의 향연임이 틀림없다. 이 불빛은 오롯이 무대 위의 4명의 슈퍼스타를 위하여 빛나고 있었다.

 90년대 후반 영국 런던에서 결성된 얼터너티브 록밴드로 시작하여, 2000년대에 들어서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한 밴드로 평가된 4명의 슈퍼스타. 그들은 압도적인 음반 판매고를 올렸으며, 동시대 밴드들 중 가장 놓은 스트리밍 수치를 기록했다. 그래미 어워드 7회 수상실적 역시 그들의 필모그래피를 더욱 풍성케 하고 있다. 월드와이드 앨범 판매고가 공식적으로는 이미 8,000만 장을 넘어섰으며, 항간에는 이미 1억을 넘겼다는 전문가들의 소견이 들리고 있다. 밴드 멤버들 모두 영국의 명문대 출신으로 학창 시절부터 꾸준한 인디밴드 활동을 이어왔다. 현재의 그들 음악을 단순히 록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밤하늘에 떠있는 수 만개의 별을 보고 별이 빛난다라고 당신 스스로 한 문장에 끝내버리는 것과도 같다. 분명 그 밤에 빛나는 별들 속에는 은하수와 별똥별, 때로는 얼굴을 감춘 달, 어쩌면 별이 아닐지도 모를 무언가가 그곳에 있는데도 말이다. 그들의 음악 장르를 록이냐 팝이냐 왈가왈부하는 것은 어리석은 줄다리기일 뿐. 그들 스스로가 한 인터뷰에서 언급했듯 그들은 음악적 확장을 시도했고, 여전히 그 확장은 전 세계의 팬들을 향해 무한히 진행 중이다.

 “자이로 밴드 때문에 찾기가 더 힘들어졌어.”

 군중 속에 한 여자는 신경질적으로 쓰고 있던 투명한 뿔테 안경을 벗으며, 짜증스럽게 대답했다. 시원하게 트인 눈매 사이로 세로의 주름이 그어졌다. 그녀의 옆에 앉아 있던 남자는 그녀의 주름이 꽤나 신경이 쓰이는 듯 무대로 향해있던 몸을 틀어 여자를 바라봤다.

“이리 줘봐요. 아직 실험단계이긴 한데 야간모드로 전환해 볼게요.”

“됐어. 없는 거 같아. 그만 나가자.”

 여자는 무대에서 들려오던 노래의 다음 가사를 듣고 싶지 않은 듯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꼭 우리 이야기 같지 않아?”

오웬의 투명한 갈색 눈동자가 태양빛에 반짝였다. 그의 옅은 미소와는 대조되게 눈빛 만은 어딘지 모를 슬픔이 담겨 있는 듯했다. 콜드플레이의 “Something just like this”의 음악이 공간 속에서 흐르고 있었다. 그는 가만히 음악을 듣다가 그렇게 툭 내뱉었다. 마치 혼잣말을 읊조리듯이. 방금 무심코 입 밖으로 나 온 그 말이 어디서 비롯된 것인지 자신 스스로도 알지 못한 채. 가사가 마치 자신들의 이야기 같다고 그는 말하고 있었다.

그와 나란히 앉아 있던 에지는 순간의 침울함을 넘기고 싶었다. 그녀는 분위기를 전환해오겠다는 생각에 오웬의 얼굴에 바짝 자신의 얼굴을 들이대고 지금 흐르고 있는 음악을 장난스럽게 따라 불렀다. 

“Where’d you wanna go?"

(어디로 가고 싶은데?)

"How much you wanna risk?"

 (얼마나 위험을 감수할 수 있는데?)

오웬은 기다렸다는 듯이 다음 가사를 이어 불렀다. 크리스 마틴의 목소리를 따라 그녀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속삭이듯이.

“I’m not looking for somebody with some superhuman gifts.”

(난 어떤 초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을 찾고 있는 게 아니야.)

“Some superhero.”

(어떤 슈퍼 영웅도.)

“Some fairytale bliss.”

(어떤 동화 속 행복을 바라는 것도 아니야.)

“Just something I can turn to somebody I can kiss.”

(난 그저 의지 할 수 있는, 키스할 누군가를 찾고 있어.)

“I want something just like this.”

(난 바로 이런 걸 원해.)

오웬의 두 손이 에지의 양팔을 부드럽게 끌어당겼다.

 

 

“I want something just like this”

“두루루 두루루 두루루 두두”

콜드플레이의 보컬, 크리스 마틴은 현장의 관객들을 순식간에 하나로 만들었다. 그는 무대 앞 스탠딩 석 4개 구역을 비롯하여 저 멀리 지정석 자리까지 모든 구역을 꽤 뚫고 있는 듯했다. 2층과 3층도 예외는 없었다. 그의 압도적인 퍼포먼스에 보답하듯 관객들의 떼창이 이어졌다. 5만 관객의 목소리가 하나로 합쳐져 공연장을 빼곡히 울렸다. 나가자는 여자의 목소리가 그 울림에 흔적도 없이 흩어졌다.

“네? 뭐라고요?”

흰색 뿔테의 안경을 손에 든 남자는 여자 쪽으로 몸을 더 기울여 물었다. 여자는 입을 더 크게 벌려 그에게 소리쳤다.

“그만 나가자고!”

“그냥 다시 하라고요?”

“그만 여기서 나. 가. 자. 고!!”

소리치던 여자는 뒤 돌아 출입구 쪽을 향해 빠르게 움직였다. 그런 그녀의 재빠른 몸놀림에 당황한 남자가 뒤따라 나섰다.

“아니, 잠시만요. 누.. 누나! 작가 누나! 같이 가요!”

서둘러 나가는 그들 뒤로 5만 관객의 떼창이 절정에 달았다.

“Oh I want something just like this”

“Oh I want something just like this”

“Oh I want something just like this”

그들은 크리스 마틴의 마지막 소감을 듣지 못했다.

“여러분은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관객이에요. 굉장한 밤입니다!.”

 

 

“굉장한 밤이었죠.”

그날 밤을 회상하던 여자의 입 꼬리가 올라갔다. 짙은 붉은 립스틱 덕분에 그녀의 올라간 입 꼬리가 더욱 돋보였다.

“담배 있어요?”

여자는 나이가 많은 남자 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담배를 건 낸 건 그 옆에 앉은 젊은 남자였다. 여자는 담배를 한 모금 깊게 빨고, 나이가 많은 남자 쪽으로 길게 내뱉었다. 잠시 침묵이 일었고, 다시 여자는 그날 일을 이어서 쏟아내기 시작했다.

먼저 접근한 것은 여자 쪽이었다. 그렇지만 그와 단순히 가벼운 일상 이야기나 나누며 한 잔 하려고 했단다. 낯선 그가 어딘지 모르게 여자의 모성본능을 자극했다고. 먼저 취한 건 남자 쪽이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여자의 정신이 더 혼미해져 갔고, 오히려 그런 자기를 그가 챙겨 주더라는 거다. 결국 붉은 립스틱의 그녀는 자연스럽게 그에게 경계를 풀게 되었다. 이런 적은 처음이라는 이야기를 강조하고 싶었는지 여러 번 그 부분을 반복해서 말했다.

“모든 게 완벽했어요. 솔직히 호감 가는 얼굴에 몸매도 좋은 데다가, 말도 잘 통했죠. 아! 무엇보다 미소가 굉장히 부드러웠어요. 아이같이 천진하게 웃는데 눈꼬리가 처지면서 입꼬리는 살짝 올라가고. 보조개? 보조개가 있었던 거 같은데...... 그렇지만 그 부드러운 미소 너머, 저 깊숙한 곳에서 풍겨오는 고독이랄까? 저보고 채워달라 갈구하는 듯했거든요.”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여자는 지난날의 황홀함을 또 한 번 느끼고 있었다. 그런 그녀는 주변을 의식하지 않은 채 계속해서 혼자만의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근데 그 남자, 한 가지 이상한 취미가 있더라고요.”

“이상한 취미요?”

젊은 남자가 재빨리 질문했다. 여자는 그에게 시선을 바꾸며, 팔짱 낀 팔을 살며시 풀었다. 오른손 두 번째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 번 톡톡 친 뒤, 다시 그 손을 뒤집어 자신 쪽으로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젊은 남자는 다시 담배 한 개비를 그녀에게 건 냈다. 여자는 그의 잽 싼 행동에 만족한 듯 빨간 입술을 씰룩거렸다. 그녀가 건네받은 담배를 입에 물어 불을 붙인 뒤 한 모금 길게 빨더니, 나직하게 즐거운 탄성을 내뱉으며 담배연기를 내뿜었다.

“아니, 글쎄. 저보고 그걸 하는 동안 안대를 하고 있으라는 거예요.”

 

 

“꼭 좀비 같지 않아?”

“네?”

“저기 저 사람들 말이야. 한 곳으로 맹목적으로 걷고 있잖아. 꼭 그 끝에 오아시스라도 있는 것처럼.”

“그거야 큰 도로로 통하는 출입구가 저 쪽 밖에 없으니까 당연히 다들 저기로 몰려드는......”

밤하늘을 수놓았던 아름다운 인공의 불빛은 이미 꺼진 지 오래였다. 여운이 깊게 남는 공연일수록 현장에 머무는 이가 많다. 혹시나 2시간 전으로 돌아갈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4명의 슈퍼스타의 공연은 진작에 끝이 났다. 관객들은 가까운 출구를 향해 천천히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여러 곳으로 뚫려 있던 출구는 다시 합쳐져 한 곳에서 만났다. 의지대로 방향성을 갖고 걷고 있는 것인지 인파에 휩쓸려 발을 움직일 뿐인 것인지 헷갈릴 정도다. 그런 그들을 서둘러 공연장을 빠져나갔던 두 남녀가 내려다보고 있다. 도로의 틈이 보이지 않았다. 어디서 인지 누군가 콜드플레이의 ‘Viva La Vida’의 후렴구를 부르기 시작했다.

“오오오 오오 오. 오오오오오 오.”

그 옆 사람이 그를 따라 부르고, 또 그 옆 사람이, 그 옆 사람의 옆 사람이, 다시 그 옆 사람의 앞사람이 따라 부르다 보니 어느덧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목소리를 냈다. 

“아. 진짜 저 곡은 세기의 명곡인 것 같아요. 콜드플레이가 이걸 보고 있다면 얼마나 뿌듯할까요? 전 세계 어딜 가든 환영받고, 자신들의 노래를 따라 부르는 이들이 이이…이렇게 넘쳐나는데!” 

남자는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 

아. 아닌가? 그냥 오히려 지겨울까......”

“지훈아. 너 콜드플레이 공연이 얼마 짜린 줄 알아?”

 반면 여자의 목소리는 현장의 분위기와 극명한 온도 차이가 났다. 차분하다 못해 차가운 어조의 물음이었다. 그녀의 옆에 서 있던 지훈은 서둘러 그녀의 물음에 대답할 문장을 만들어냈다. 문제의 정답은 완벽해야만 한다.

“잠시만요. 스탠딩 G구역은 십오만 사천 원, P석 십사만 삼천 원, R석 십삼만 이천 원, S석 십일만 천, A석 구만 구천, B석 칠만 칠천, C석 사만 사천 원. 검색하니까 이렇게 나오네요. 우린 R석이었으니까 십삼만 이천 원이네요. 어제 처음 본 이름 모를 미모의 누나 덕분에 콜드플레이 공연도 보고, 이거 들리는 얘기로는 암표로 백만 원이 넘게 거래가 되기도 했다던데……아, 전생에 나라라도 구했는지 나한테 갑자기 이런 행운이 찾아오다니!”

지훈의 들뜬 어조와는 상반되게 여자는 표정의 변화 없이 한 곳을 응시하고 있다. 고개를 돌리지 않고 여자는 말을 이어갔다. 허공에 대고 넋두리를 하는 마냥 천천히 낮은 음성으로, 그렇지만 가까이에 있는 이로부터 집중이 되는 힘 있는 목소리였다.

“오늘 본 공연의 티켓 판매 매출액만 천만 달러야. 그들은 전 세계를 돌며 월드 투어를 해. 이번 투어는 작년 여름부터 시작해서 올 가을까지, 33개국 80개 도시를 돌아. 한 도시 당 적게는 백만 달러, 많게는 3천만 달러까지 벌어들이는데, 총 공연 수입금을 따지자면 자그마치 5억만 달러는 될 거야. 가늠이 돼?”

“헉. 오.. 오 억만이요?”

“만약 전 세계서 유일하게 나만 그들의 공연을 보려면 최소 5억만 달러를 지불해야 된다는 얘기야. 그러지 못한다면 저들처럼 좀비가 되어야 하겠지. 몇 년을 기다렸다가 힘들게 티켓팅을 하고, 멀리서 좋아하는 뮤지션을 바라보면서, 오늘이 마지막인 듯 한껏 흥분해 있다가 정해진 시간이 지나면 허무하게 끝나 버리겠지.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일상으로 돌아가는 거야.”

여자는 군중 속에 시선을 떼지 않으며, 읊조렸다.

“근데, 지훈아. 오늘 보니까 나도 저들처럼 좀비가 되고 싶다.”

 

 

“에지! 다음에 꼭 공연장에서 함께 듣자. 7년 전 가을인가. 아마 베를린이었을 거야. 그때 처음 로이랑 같이 우연히 공연을 보게 되었거든.”

“진짜? 어땠어?”

“죽여줬지. 그때 처음 보고, 그 이후 공연부터 쭉 찾아다녔어. 아마 로이랑 친해진 것도 콜드플레이 공연이 한몫했을 거야. 매년 공연을 빌미로 녀석이랑 함께 여행 다녔으니까.”

“뭐야. 둘이 그렇게 케미가 잘 맞았었나?”

“뭐지. 이 비꼬는 말투는. 혹시 이거……”

“아니거든.”

“어? 내년 8월에 또 월드투어 시작하네!”

“정말?”

“응. 아르헨티나부터 시작해서, 헉. 이번엔 80개 도시나 되네. 작년 ‘고스트 스토리 투어’는 여덟 개 도시 밖에 안 돌아서 아쉬웠는데……”

“진짜? 대박! 하나도 놓치지 않을 거야!”

“그래. 좋아. 우리 함께하자!”

“그럼 로이는?”

“당연히 너랑 여행하면 로이는 버려야지.”

“푸하. 아냐. 로이도 같이 가자고 하자!”

“내년엔 이 도시, 저 도시 여행하느라 피곤할지도 모르겠다. 지금부터 체력 보충을……”

오웬은 신이 난 목소리로 콧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뭐야. 왜 말을 돌려.”

 “응? 뭐가? 누가? 내가?”

그는 눈썹을 치켜뜬 채 고개를 비스듬히 하고는 양팔을 들어 두 손을 펼쳐 보였다. 그런 그를 바라보던 에지는 그의 귀여운 표정에 오늘도 넘어가 준다는 얼굴을 하고 서있다. 서로는 마주 보며 멋쩍은 듯 한바탕 웃음소리를 배출했다. 에지는 이 순간만큼은 누구보다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한동안 그와 눈을 맞추며, 순간의 행복을 만끽했다. 

“근데 진짜. 이게 대체 얼마짜리 공연인 거야!!”

에지는 웃음을 멈추고 오웬에게 물었다.

“글쎄. 족히 5억만 달러는 되지 않을까?”

 

 

‘이번에도 둘 다 안 왔네.’

“누나. 괜찮아요? 좀 피곤해 보이는데?”

생각에 잠긴 에지를 바라보던 지훈은 걱정스러운 듯 그녀에게 물었다. 애써 표정을 감추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 에지는 난간에 기대고 있던 몸을 세웠다.

“그만 가자.”

“찾아야 되는 사람 있는 거 아니었어요?”

“안 올 건가 바.”

에지는 오늘만큼은 그곳의 군중들처럼 좀비가 되었으면 했다. 진심으로 그러길 바랬다. 좀비들의 팔목에서 빛을 발하던 자이로 밴드는 다시 쓸모없는 불투명한 팔찌로 돌아가 있었다. 퇴장하면서 반납해 달라는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좀비들의 떼창도 어느덧 잦아들었다. 출구로 몰려든 인파도 하나 둘 흩어져 갔다. 에지와 지훈도 뒤늦게 발걸음을 옮긴다. 거리로 나온 그들 사이에 한 동안 대화가 없었다. 지훈은 몇 번이나 입을 열 타이밍을 보았지만 그녀의 어두운 표정에 이내 입을 다물었다. 지금은 그럴 때라는 걸 그 스스로 깨우친 듯하다.

침묵 속 거리로 나선 그들 뒤로, 높이 자란 가로수의 나뭇가지 틈에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 자이로 밴드 하나가 걸려 있었다.

 

 

붉은 립스틱의 여자와 헤어진 뒤 젊은 남자는 질문할 타이밍을 살피고 있었다. 한 시간 전의 상황은 그로서는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여러 가지 가설들을 혼자서 세우다가 내린 명쾌한 결론, 단도직입적 질문을 던진다.

“아니. 왜 아까 그냥 나온 겁니까? 그 여자 연락처라도 받아 놨어야죠!”

 젊은 남자의 다소 격양된 목소리가 앞서 걷던 남자의 뒤통수에 내리 꽂혔다. 나이가 많은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걸음을 재촉했다.

“딱 봐도 깊은 관계는 아니란 건 저도 잘 알겠어요. 그래도 언제, 어디서 갑자기 저 여자한테 연락을 할지도 모르고, 다시 또 뭐 그 이상한 취미활동이라도 하고 싶어서 만나기라도 하면……”

“그럴 일은 없어.”

“네?”

젊은 남자가 혼자서 내린 가설 속엔 없는 답변이 그로부터 돌아왔다. 다시 한번 재차 물었다.

“그럴 일이 없다니요? 그.. 그게 무슨 말입니까?”

“로이가 다시 그 여자를 만날 일은 없다고.”

“왜… 왜죠?”

 나이가 많은 남자의 걸음이 멈추었다.

“로이는 한 번 잔 여자와는 다시 관계를 맺지 않아.”

 예상치 못한 답변이 그로부터 돌아오자 젊은 남자의 반달눈썹이 깊은 커브로 치켜 올라갔다.

“뭐라고요? 아니.. 그럼 왜 저 여자를 만난 겁니까? 어차피 다시 볼일도 없을 사람인데, 뭘 얻을 게 있다고?”

 젊은 남자의 물음에 나이가 많은 남자는 귀찮은 듯 한마디 내뱉었다.

“얻을게 왜 없어?”

“네?”

“내가 남에 요상한 취미활동이나 탐구하려고 저 여자한테 접근 한 줄 아나?”

수트 안쪽 주머니에 손을 넣은 남자는 젊은 남자에게 자신이 여자로부터 얻은 것을 꺼내 보였다.

“이게 뭡니까?”

그의 손에는 회색의 안대가 들려있었다. 지난밤 붉은 립스틱 여자의 눈을 가리는 데 사용했을 물건이었다. 안대를 뒤집자 아래쪽에 검은색 선으로만 이뤄진 작은 그림이 그려져 있다. 자세히 눈여겨보지 않으면, 그 그림이 욕조 속에 누워있는 해골인지 알아채기 어려울 몹시 작은 그림이다.

“이걸 봐서는 마지막 안대를 소진한 것 같군. 움직이자.”

 나이가 많은 남자는 꺼내 든 안대를 다시 수트 안쪽 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그의 재빠른 행동에 젊은 남자는 호기심 가득한 표정을 하고는 재차 물었다.

“네? 어... 어디로요?”

“블라디보스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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