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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살리아 Nov 17. 2019

마린스키 극장

 로이는 코트를 벗었다. 일관된 굳은 표정의 여자는 로이의 코트를 받아 든 뒤 무심히 열쇠고리를 건 냈다. 나무 재질에 열쇠고리에는 두 자리의 숫자가 새겨져 있다. 공연이 끝난 뒤 맡겨두었던 자신의 물건을 찾을 때 쓰일 것이다. 로이는 번호표를 바지 주머니에 넣어 두고는 공연장 안으로 들어갔다.

계단을 올라 3층을 이용했다. 난간 위에서 내려다보니, 1층의 관람석이 훤히 보인다. 아직은 로비에 있던 사람들이 공연장 안으로 다 들어오지는 않은 듯했다. 무대는 생각보다 높이 솟아 있지는 않았다. 무대와 객석 사이에 벙커가 보인다. 그 안쪽에 오케스트라 팀들이 빼곡히 악기와 함께 들어가 공간을 채우고 있다.

천장의 밝은 조명 아래 웅장한 무대와 아직은 다 채워지지 않은 넓은 객석 사이를 연결하는 그 비좁은 공간이, 위에서 내려다볼 때 그리 조화롭지 않게 느껴졌다. 공간의 불균형. 그러나 그 사이로 조화로운 음률이 흘러나온다. 벙커 안에 조밀하게 자리를 잡은 오케스트라 팀원들이 각자의 악기로 조율을 하고 있다. 곧 더욱 풍성한 울림으로 연주가 시작될 것이다.

 ‘이곳에서 다음 달에 폭탄이 터진단 말이지.’

로이는 자리에 앉아 눈을 감고 지난날을 떠올렸다. 공간을 울리는 악기 소리는 그의 생각을 과거로 데려가 놓았다.

 

 

“어우씨. 깜짝이야. 누구야? 오웬이야? 오줌 지릴뻔했네. 언제부터 거기에 서 있었어?”

로이는 어둠 속에 실루엣만 보이는 한 남자를 보고 사뭇 놀랬다. 그 검은 형체의 인기척에 막 잠에서 깨어 신경이 예민해진 참이다. 실내에 조명이 서서히 들어오자 누워있던 하얀 그물로 엮인 해먹에서 미끄러지듯 빠져나왔다.

“마지막 문장?”

로이는 늘 자기 앞에 갑작스럽게 나타나는 오웬에게 한 가지 확인을 한다. 그와는 다르게 시간대를 자유롭게 트래블 하는 오웬이다. 가끔씩 과거의 오웬이 로이 앞에 나타나기도 한다. 그와 친구가 된 후부터 마치 스파이를 구분하기 위한 암호와도 같이 지금 눈 앞에 있는 그가 동 시간대의 오웬인지 확인하기 위해 질문을 던진다. 함께 있다 헤어지기 전에 공유했던 마지막 한 문장을 묻는 거다. 과거에서 온 오웬이라면 분명 다른 문장을 뱉어낼 테니까.

“행복할 때 약속하지 말고, 슬플 때 결정하지 마라. 다섯 시간 전 나눈 문장.”

“다섯 시간 전? 내가 낮잠을 다섯 시간이나 잤다고?”

로이는 시간을 확인했다.  열한 시가 다돼가고 있었다. 그날 오후에 로이는 오웬과 함께 러시아 드라마를   보았다.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백치 TV 드라마로 제작한 작품으로 러시아 감독 블라디미르 보르트코가 연출을 맡았다. 백치 진실하고 순결한  남자 미쉬킨 공작과 상처투성이의 오만한 영혼 나스타샤, 순수한 아름다움의 화신 아글라야 사이에서 탐욕과 위선으로 일그러진 시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결국 모두를 파국으로 몰고 가는 비극을 그린 작품이다. 도스토옙스키의 5 장편 가운데 가장 서정적이라 평가받고 있으며, 작가 자신이 가장 사랑한 작품으로도  알려져 있다.

“어떻게 두 여자를 동시에 사랑할 수 있는 거지?”

드라마가 끝나고 로이가 오웬에게 물은 첫마디였다. 드라마 속 비극적 앤딩은 한 참이나 그들을 침울하게 만들었다. 한동안 생각에 잠긴 오웬이 입을 열었다.

“미쉬킨 공작이라면 가능하지. 그가 두 여인에게 느낀 사랑의 감정은 서로 다른 거야. 총명하며 좋은 가문 출신이었으나 어렸을 적 부모를 여의고 이웃 마을 지주인 토츠키에게 양육 당해 부자의 첩으로 살다 결국 버림받은 가엾은 여인 나스타샤. 미쉬킨은 직관적으로 나스타샤의 얼굴에서 고통의 원형을 본거지. 그녀의 고통은 지배당하고 학대받고 짓밟히고 착취당하고 증오하고 복수하는 인간 보편의 고통으로 증폭되어 미쉬킨에게 호소했고, 그걸 미쉬킨은 외면할 수 없었던 거야. 반면, 예판친 장군의 아름다운 셋째 딸, 아글라야. 미쉬킨은 예판친 장군의 집에 방문해서 처음 그녀를 본 순간 첫눈에 반한 거야. 그녀는 아름답고, 순수하고, 당찬 숙녀였지. 아마 미쉬킨 공작의 첫사랑이었겠지. 그리고 무엇보다 아글라야는 미쉬킨을 진심으로 사랑했고 말이야.”

“고결한 순진성과 한없는 신뢰성이란 측면에서 난 공작님과 비길 만한 사람을 평생 동안 한 번도 본 일이 없어요. 공작님 자신의 말을 들은 후, 그를 속이려고 하는 자나, 그를 속일 수 있는 자나, 또 그를 이미 속여 먹은 자나, 이 모든 사람들을 그는 결국 용서해 주고 만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바로 이런 면 때문에, 난 그를 사랑하게 된 거예요.”

로이는 장난스럽게 드라마에서 나왔던 아글라야의 한 대사를 따라 했다. 마치 요조숙녀가 된 듯한 로이는 그 안에 숨겨왔던 여성성을 극대화하듯이 손짓을 과장되게 움직였다. 그런 로이에게서 잠시나마 오웬은 미쉬킨 공작이었다. 어딘지 모르게 오웬과 미쉬킨 공작은 닮아있었다.

“재밌냐?”

“어머! 미쉬킨 공작님! 저를 외면하시는 건가요?”

혼자만 심취해 있던 로이의 역할극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아~ 진짜 재미없게 안 받아주는 구만!”

“수염 난 아글라야는 몰입이 힘들어~”

“그래. 결국 문제는 얼굴이네, 얼굴이야!”

로이는 거울 앞으로 다가가 자신의 얼굴을 손바닥으로 훑으며, 그윽하게 쳐다보았다. 그런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오웬이 맥주 캔을 까며 말했다.

“인간에게서 얼굴은 중요한 소통 창구야! 미쉬킨 공작은 상처 받았지만 복수로 가득 찬 나스타샤의 얼굴에서 연민을 느꼈고, 아름다웠지만 질투로 가득 찬 아글라야의 얼굴에서 연정을 품었지.”

“연민과 연정이라……”

“그건 단순히 그녀들의 얼굴을 본다로 해석하면 안 돼. 미쉬킨 공작은 그녀들의 얼굴을 바라보며, 눈앞에 보이는 모습은 물론 예언적 비전까지 품은 거야. 그의 시선은 보이지 않은 것까지 꿰뚫어 보고, 그 의미를 깨닫는 것까지 확장되었다고 보면 돼.”

로이는 거울에서 뒤돌아 오웬과 나란히 앉았다. 그도 맥주 캔을 목구멍에 털어 넣었다. 오웬은 자신이 들고 있던 맥주 캔을 슬그머니 로이의 손아귀에 있는 맥주 캔과 부딪히며, 말을 이어갔다.

“도스토옙스키는 미쉬킨 공작을 통해서 인간의 선악이 타인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느냐 없느냐로 결정된다라는 말을 하고 싶었던 거야!”

“인간의 선과 악?”

“타인이 자신의 얼굴로부터 고통을 호소할 때, 그러니까 나스타샤처럼 말이야. 그런 경우 내치지 않은 것이 곧 선이라고 봐.”

“미쉬킨 공작처럼 말이지?”

“응. 자신을 향한 타인의 얼굴을 제대로 응시하는 것은 가장 근원적인 윤리적 행위라고 봐. 반대로 타인의 얼굴이 마치 존재하지 않는 듯 못 본 척하거나, 혹은 잘 못 보아서 오해를 하거나, 혹은 섣부른 선입견을 갖는 것은 가장 사악한 행위라는 것이지.”

“그런 것으로 인간의 선과 악을 구분 짓는다면, 오웬 너는 정말 천사야! 에지의 표정만 보고도 금방 알아차리 잖아? 그녀가 지금 심기가 몹시 불편한 건지, 단순히 짜증이 난 건지, 아님, 배가 고픈 건지……”

“훗. 그거야 연인 사이에 당연한 거고. 어디 에지뿐이겠어! 어디 보자! 내가 너도 맞춰볼까?”

오웬은 무표정한 얼굴로 로이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친 로이는 괜스레 머쓱해졌다. 맥주 캔에 남은 술을 목구멍에 털어 넣었다.

‘뭐… 뭐야 이 새끼……’

“아! 알았다!”

오웬은 냉장고 앞으로 가 맥주 캔 두 개를 꺼내 들었다. 뒤돌아 앉아 있는 로이의 뒤통수가 정면에서 보였다. 오웬은 들고 있던 맥주 캔 하나를 로이에게 던졌다. 정확히 맥주 캔은 포물선을 그리며 로이의 뒤통수를 맞추었다.

“악! 뭐야 씨발!”

“앗! 미안! 아글라야~”

“뭐야! 새꺄! 어디서 연기를 하고 있어!”

로이는 오웬에게 달려들었다. 그런 로이를 보고 오웬이 또다시 뚫어져라 그를 바라보았다.

“얼굴에 복수로 가득 찬네! 아글라야와 다를 게 없어!”

“이 미친 새끼! 헛소리 그만하고 이제 백치에서 나오라고!”

몸서리치는 로이에게서 떨어진 오웬이 새로 꺼낸 맥주 캔을 깠다. 청량하고 명쾌한 소리 후에 거품이 솟아 오웬의 오른쪽 손등에 흘러내렸다.

“어! 어! 야야! 흘리지 마! 흘리지 마!”

기겁한 로이가 소리쳤다. 뒤통수에 맥주 캔을 얻어맞았을 때 보다 더 괴로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런 모습이 재미있는 듯 오웬은 손에 든 맥주 캔을 좌우로 살짝 흔들어 댔다. 로이의 눈과 입이 크게 확장되며, 두 손으로 머리를 쥐어뜯었다. 오웬은 맥주를 천천히 들이켜고는 손등에 뭍은 잔여물을 입술로 훔쳤다. 로이에게 다가가 가볍게 어깨동무를 걸치고는 거실에 난 창으로 그를 이끌었다.

“한 그루의 나무 옆을 지나갈 때 그것을 보고 행복을 느낄 줄 모르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어. 가장 힘들고 의기소침한 사람조차 매 발자국마다 얼마나 많은 아름다운 것들을 발견할 수 있는지 알아? 저기, 저녁노을을 봐!

오웬은 미쉬킨 공작이 했던 대사를 읊조렸다. 그들이 서있던 창 너머로 해가 져가고 있었다. 하늘의 색은 주황빛에서 보랏빛으로 서서히 변해 갔다. 자연이 주는 황홀한 색감에 흥분하던 로이도 차츰 차분해졌다.

“나도 미쉬킨처럼, 타인을 편견 없이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이 있었으면 좋겠어.”

“사실 미쉬킨 공작은 도스토옙스키가 창조해낸 극한의 선을 대변한 인물일 뿐이야. 그는 완벽하게 아름다운 인간을 그리기 위해 위대하고 한없이 고귀한 존재 예수 그리스도를 모델로 미쉬킨을 그려냈어. 완전한 선의 인간은 없어. 인간은 불안전한 존재야. 선과 악, 둘 다 가지고 있는 것이 우리 인간이지.”

로이의 말에 오웬이 대답했다. 로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우린 타인을 볼 때 실수를 하는 거네. 우리 안에는 선 뿐만 아니라 악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응. 그런 면에서 가장 인간다운 모습을 보인 건 예판친 장군이지!”

“아글라야의 아버지?”

“그래. 미쉬킨 공작과 예판친 장군이 처음 만났던 장면 있잖아.”

“아! 예판친 장군은 미쉬킨의 초라한 행색을 보고 자기 집에 식객으로 눌러앉으러 온 것이 아닌가 의심해서 대화 내내 그에게 적대적이었지.”

“응. 맞아! 그렇지만 우스울 정도로 허심탄회한 미쉬킨 공작의 모습에 경계를 풀고 그를 받아들이잖아!”

“아하! 여하튼 선과 악을 모두 가진 인간이라면 예판친, 그와 다를 바 없다?”

오웬은 로이의 물음에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로이가 계속 말을 이어갔다.

“그래. 나라도 예판친 처럼 행동했겠지. 그런 그에게 미쉬킨이 했던 말이 기억에 남어. 예판친, 당신과 내가 겉으로는 전혀 다른 부류의 인간처럼 보일 테지만, 여러 가지 면으로. 어쩌면 전혀 아무런 공통점이 없을지도 모르지만. 나는 이런 생각을 믿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무런 공통점이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그런 경우에도 실제로는 아주 많은 공통점이 있는 법이다. 이런 것은 그냥 쓱하고 겉보기로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여러 가지로 분류해서 아무런 공통점을 발견하지 못하는 우리의 게으름 때문에 생겨나는 현상이다. 그 말에 예판친의 마음이 열렸던 거고.”

“타인의 마음을 얻는 건 쉽지 않아……”

오웬의 마지막 말에 로이는 입을 다물었다.

“아… 정말 여운이 길게 남는 작품이야.”

로이도 오웬의 말에 무언의 동감으로 고개를 미세하게 끄덕였다.

“나스타샤의 죽음도 그렇고, 아글라야와 미쉬킨의 이별도 그렇고, 심지어 로고진의 마지막도 너무 비극적이야.”

“비극이지. 우리의 삶도 별반 다르지 않겠어?”

로이가 그 답지 않은 진지함으로 물어왔다. 그 둘 사이에는 한 동안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서로가 남은 맥주를 들이켤 뿐. 한참을 말이 없던 오웬은 갑자기 외투를 집어 들었다.

“러시아 오페라 한 편 보고 올까 봐”

“뭐? 갑자기?”

“지나간 사랑은 새로운 사랑으로 지운다. 몰라? 오늘 본 ‘백치’가 너무 강했어. 다른 걸로 덮을래. 넌 뭐 할 거야?”

“어이쿠! 그렇게 남자 새끼 감정이 습자지 같아서야 어디 쓰겠어! 아. 피곤해 낮잠이나 잘래. 깨우지 마라!”

로이는 하얀 그물로 엮인 해먹으로 가서 몸을 뉘었다.

“로이? 너는 우리의 삶이 비극이라 생각해?”

“겉으로 보이는, 타인의 눈에 비친 나의 모습이랑 진정한 자아 사이의 균열은 누구에게나 또 언제나 존재할 뿐이지. 그게 비극이라면 비극이겠지……”

“마지막 문장 뭐로 할래?”

로이는 오웬의 물음에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싶더니, 이내 한 문장을 내뱉었다.

“행복할 때 약속하지 말고, 슬플 때 결정하지 말자 오웬. 그래 오늘은 이 문장으로 하자!”

 

 

행복할  약속하지 말고, 슬플  결정하지 말자. 다섯 시간  나눈 문장.”

다섯 시간 ? 내가 낮잠을 다섯 시간이나 잤다고?

로이는 시간을 확인했다.  열한 시가 지나가고 있었다.

“제 시간대로 돌아왔네. 근데 꼴은 왜 그래?”

로이는 잠이 덜 깬 눈을 비벼댔다. 그제야 제대로 눈을 뜨고 동 시간대의 오웬을 바라보았다. 로이 앞에 거지꼴을 하고 나타난 오웬은 어딘가 모르게 불안했다. 어깨 선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을 막 잠에서 깬 로이는 알아채지 못했다.

“로이.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뭐야. 갑자기 그 진지한 표정은. 밥은 먹었냐? 배고프다. 뭐 좀 먹고, 발리 가서 서핑이나 하자!”

“……”

“아……또 뭔데? ‘백치’는 지웠고, 또 새로운 게 마음을 적셨냐?”

“여기로 가까이 와봐 로이.”

“이 새끼. 또 왜 이런데…… 사람 긴장시키는 재주가 있어 아주!”

오웬은 세계지도가 그려진 벽 앞에서 한 지점을 가리키며 설명을 시작했다.

앞으로 4 뒤에 여기, 이곳에서 폭발물이 터질 거야.”

그의 때 묻은 손가락이 가리킨 곳은 연해주의 항구도시, 블라디보스톡이었다.

“뭔 개소리야! 러시아? 폭탄?”

“그래.”

“설마……지금 그곳을 다녀온 거야?”

로이의 두 눈이 커졌다.

“자세히 설명할 시간이 없어.”

오웬은 잽싸게 아이폰을 꺼내 에어드랍으로 로이에게 여러 장의 사진을 전송했다. 검은색 반팔 티에 베이지색 면바지 차림, 그리고 바지보다 짙은 갈색의 옥스포드화를 신은 젊은 한 남자의 사진이었다. 오웬이 보낸 여러 장의 사진은 모두 동일한 남자를 포착하고 있었다.

“2019년 12월 24일 저녁 8시 35분. 앞으로 정확히 4년 3개월 후야. 여기 이 블라디보스톡에서 폭탄테러가 있을 거야.”

“크리스마스이브에 폭탄 테러라니? 이 남자는 뭐야? 용의자?”

오웬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1년 전부터 이 남자를 추적했어. 과거로 돌아가 몇 가지의 패턴을 바꿨지만……”

“미래가 바뀌지 않았다?”

“응. 그 시간대로 다시 돌아가 확인해도 여전히 똑같이 그 남자는 나타났고, 극장에는 폭탄이 터졌어.”

“극장이라고?”

“마린스키 극장이야. 오페라 카르멘 공연 마지막 4막이 시작된 후 정확히 13분 후에 폭탄이 터져.”

“헉. 부상자는?”

“현장에 있던 연기자, 오케스트라, 스탭, 관람객 1,756명 전원 사망. 물론 용의자도 현장에서 사망해.”

오웬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고, 그의 갈색 눈동자의 초점이 허공을 응시하는 듯했다. 로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무언가를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오웬. 네 말대로, 과거로 돌아가서 그 자를 미리 막는다고 해도 미래는 바뀌지 않을 거야. 그 자가 아니더라도 2년 뒤 크리스마스이브에 카르멘을 보러 간 사람들을 겨냥한 제3의 테러리스트가 있을 거라고.”

“아니야. 분명 바꿀 수 있어. 패턴을 바꿨더니 폭탄이 터지는 위치가 바뀌었어. 그런데 여전히 극장 안에서야. 뭐지? 뭐가 잘못된 걸까? 내가 놓치고 있는 건 뭘까? 어쩌면 그날 그곳에서 테러가 실패하게 바꿀 수 있을지도 몰라.”

오웬의 떨림은 시간이 지날수록 거칠어졌다.

“진정해. 유감스럽지만 1,756명? 그 사람들은 그게 운명이야. 안타깝지만 그걸 받아들여야 돼. 너 같은 타임 트래블러들이 균형을 깨면 깰수록 세상은 더 복잡해진다고.”

“방법이 있을 거야. 방법이……”

“네가 방법을 찾는다고 해도. 난 못 도와줘. 솔직히 그 꼴을 하고 나타나서 미친놈처럼 떠들어대는 거도 더 이상 못 보겠다. 분명 본부에서도 너를 예의 주시하고 있다고. 작년일 잊었어?”

“도와줘. 로이.”

오웬은 지금 순간 그 누구보다 간절했다.

“그만해. 한동안 잠잠하다 싶었는데……. 이 사건을 파헤치느라 그동안 갑자기 사라지고 그랬던 거야? 네가 그렇게 날 뛴다 해도 크게 달라지는 건 없어. 너도 잘 알잖아.”

“꼭 바꿔야 돼. 반드시……”

오웬은 로이의 우려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늘 네가 한 말은 못 들은 걸로 할게.”

로이는 핸드폰에 저장된 용의자의 사진들을 전부 선택했다. 마지막 휴지통 아이콘을 누르려던 찰나였다. 그의 뇌리를 스친 불길한 생각 하나가 그의 손가락 움직임을 저지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오웬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오웬이 슬픈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로이의 얼굴에 동요가 일었다. 그는 자신이 지금 생각해낸 것을 입 밖으로 차마 꺼내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확인을 해야 했다.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 카르멘 공연장에... 에지가 있었구나?”

오웬의 갈색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그는 이내 떨리는 음성으로 로이의 물음에 답했다.

“우리 셋 다 그날 그곳에 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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