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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살리아 Nov 17. 2019

드라마의 시작

‘제길. 여기가 아니야. 그 타투 청년이 우리에게 거짓 정보를 흘렸어.’

카일은 드미트리가 잘못된 정보를 넘겼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그는 타투샵에서 그림이 그려 넣어지지 않은 열 개의 안대가 소파 옆 탁자 위에 올려져 있던 순간이 떠오른 거다.

‘안대가 열 개뿐이었어. 로이가 분명 다시 돌아올 거야.’

카일은 타투샵에 로이가 다시 돌아올 거라 확신했다. 매서운 바람을 피해 구석에서 몸을 웅크리고 있는 제이슨을 향해 소리쳤다.

“다시 돌아가자!”

 

 

“왜 그래. 드미트리?”

“뭐가?”

“뭔가 계속 불안해 보이는 표정을 하고 있잖아!”

“지금?”

“그래 지금! 아니 아까 내가 왔을 때부터 쭈욱……”

“신경 쓰지 마. 남은 안대 나 이리 넘겨줘.”

한 시간 뒤에 다시 온다 던 로이는 두 시간이 지나서야 다시 드미트리의 타투샵에 발을 들였다. 부족한 안대를 마저 챙겨 온 로이로부터 드미트리는 그가 늘 원하던 욕조 속 해골 그림을 안대에 그려 넣었다. 해골의 갈비뼈 수를 하나씩 줄여가며 똑같은 그림을 채운다. 이제 막 갈비뼈가 한 개 인 해골을 마지막 안대에 그려 넣을 참이었다. 현관문에 달려있던 방울 모양 장신구의 명쾌한 소리가 두 남자 사이의 정적을 깼다.

“누가 오기로 했어?”

그 소리에 로이가 물었다. 드미트리는 더 긴장한 표정을 하고 있다. 발자국 소리가 점점 가까이 그들에게 들려왔다. 둘 사이의 침묵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직감적으로 드미트리는 로이에게 소리쳤다. 그와 동시에 로이가 몸을 움직였다.

“빨리 도망가! 로이!”                                                                           

로이는 재빨리 트래블을 시도했지만 좀처럼 그곳을 벗어나지 못했다.

“소용없어. 로이.”

두 남자를 불안함에 몰아넣은 불청객이 모습을 드러냈다. 카일의 낮은 음성이 공간을 지배했다.

“네가 이곳으로 다시 올 줄 알고 미리 이곳에 와있었지."

'현관문 소리는 페이크였어.'

로이의 생각을 미리 예측한 듯 카일은 서둘러 말을 이어갔다.

"아! 그리고 방금 안티텔레프는 활성화시켰고."

안티텔레프는 트래블러들이 트래블을 할 수 없게 막을 목적으로 개발되었다. 정육각형 큐브 모양이다. 일반적으로는 엄지손톱만 한 크기이지만 공인된 사용자의 지문을 스캔하면 손바닥만 한 크기로 자동 확장된다. 구글맵과 연동되며 GPS로 현재 위치를 읽어 들인다. 사용자의 위치에 기반하여 일시적으로 제한된 범위 안에서 트래블이 불가능하다.

본부에서 불법 트래블을 단속하기 위해 만들었다. 무분별한 트래블을 본부에서는 관리 감독하고 있다. 모든 트래블러들은 고유 코드네임으로 등록되어 있고, 그들의 트래블은 실시간으로 리포트되어 로그로 기록된다. 지구 상에 트래블러와 비 트래블러와의 균형 잡힌 공존 정책의 일환으로 아주 오래전부터 규정한 그들 세계의 법규다. 법규를 위반한 트래블러들은 코드레벨에 따라 엄격한 징벌을 받게 된다.  

“젠장.”

로이는 드미트리 쪽으로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그의 앞으로 바짝 붙어 섰다.

“널 불안하게 만든 원인이 밝혀졌네!”

로이는 왼쪽으로 고개를 살짝 돌려 드미트리에게 속삭였다.

“미안해. 적당히 둘러 댔다고 생각했는데, 저 들이 이렇게 빨리 다시 되돌아올 줄은 몰랐어.”

“뒷문 있냐?”

“불행히도 없어.”

“그럼 옆 문은?”

로이의 물음에 드미트리는 대답 대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씁쓸한 그의 표정을 본 로이는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물었다.

“보드카는?”

드미트리는 구세주를 만난 냥 얼굴에 화색이 돌며 대답했다.

“그거라면 넘쳐나지! 그게 도움이 될까?”

“지금으로는 최선책이지.”

로이와 드미트리간에 은밀한 대화가 이어지자 제이슨이 경계하며 카일에게 조용히 물었다.

“저들이 뭔가 수상해 보이는데요?”

“둘이서 뭐라는 거냐?”

“글쎄요. 도망갈 생각일까요?”

카일은 이번에는 드미트리에게 소리쳤다.

“어이. 타투 양반. 덕분에 야경 구경 잘했어!”

카일의 말에 로이가 대꾸했다.

“카일? 난 또 누군가 했네. 이 시간에 현관에서 소리가 나길래, 타투하러 온 러시아 여자를 상상했는데……”

“윈하던 바가 아니라 실망했나?”

“오랜만에 보는데 보드카라도 한 잔 하자.”

드미트리가 가져온 보드카가 어느새 로이의 손에 들려있었다. 그는 술병을 흔들어 보였다. 카일은 그를 향해 가까이 걸어갔다. 손에 든 안티텔레프를 원탁 한가운데 올려둔다. 뒤 따르던 제이슨은 지니고 있던 모래시계를 뒤집어 그 위에 올려놓았다. 로이의 트래블은 안티텔레프로 인해 뒤집힌 모래시계가 아래로 완전히 내려가는 3분 동안 묶어 둘 수 있을 터다.

“원초적 모래시계 등장이군.”

로이의 말에 카일 뒤에 서있던 제이슨이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 네 남자는 원탁의 테이블에 둘러앉았다. 가운데 모래시계를 네 남자가 동시에 주시하고 있다. 올인한 도박판에 마지막 카드를 돌리듯 모두가 비장했다.

드미트리는 보드카를 한 모금 먼저 들이키고 그의 왼편에 앉은 카일에게 건넸다. 카일은 건너편의 로이를 바라보며 한 모금 마시고 역시나 그의 왼편에 앉은 제이슨에게 병을 돌렸다. 보드카를 건 내 받은 제이슨은 그곳에 있는 모두를 한 번씩 쳐다보며 고개를 젖혔다. 그리고는 그도 역시 자신의 왼편에 앉은 로이에게 병을 들이댔다. 로이가 보드카에 입술을 가져갈 때쯤 카일이 입을 열었다.

“그날 일은 유감이야.”

로이는 잠시 입술을 술 병에서 때는가 싶더니 이내 남은 술의 반을 들이켰다.

“카일은 그날 이후로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어요.”

제이슨이 말했다. 로이는 술 병을 그의 오른편에 앉은 제이슨에게 건넸다. 제이슨이 받아 들고는 멈추지 않고 마셨다. 카일이 그걸 보고는 술 병을 가로챘다. 그가 남은 술을 마시려다 말고 드미트리에게 건넸다.

“어후. 나는 보드카랑은 안 맞는 거 같아.”

원탁에 놓인 모래시계의 3분의 1이 아래로 쌓여가고 있었다. 로이는 드미트리 앞에 놓인 보드카를 다시 한 모금 들이 켰다. 술 병을 내려놓고 두 팔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상체를 앞으로 숙인 로이의 얼굴이 원탁 위의 조명에 선명하게 드러났다. 모두가 로이를 바라보았다. 로이는 모든 이의 시선을 받은 채 앞에 앉은 카일을 향해 물었다.

“에지는 어떻게 지내지?”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차량의 와이퍼는 초단위로 쉴 새 없이 움직여 댔다. 앞 유리에 떨어지는 빗물은 무수한 방울들을 만들고 흩어지길 반복했다.

“차 세워!”

여자는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남자는 차를 세우는 대신 백미러를 보았다.

“차 세 우라고!”

여자가 또 한 번 소리쳤다. 남자는 오른손으로 자신의 안전벨트를 풀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차 세우라는 말 안 들려? 차 세워! 차 세우라고 했잖아!”

남자는 브레이크 대신 엑셀레이터를 힘껏 밟았다. 그리고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오른쪽으로 핸들을 꺾었다. 빗물에 차량이 미끄러져 그대로 가로수로 돌진했다. 그보다 빠르게 남자가 몸을 돌려 여자를 품에 안았다. 왼팔로 여자의 머리를 감싼 채 오른손으로 보조석 안전벨트의 버튼을 눌렀다.

두 남녀가 탄 차는 그대로 가로수를 박고 멈췄다. 운전석과 보조석에 에어백이 터졌다. 차 안에 타고 있던 남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차량에서 십 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그들이 서있었다. 남자가 여자의 머리를 감싸 안은 자세 그대로다. 순간적으로 벌어진 일에 여자는 아직 눈을 감고 있다. 그와는 대조되게 차분한 남자의 목소리가 여자의 귀에 빗소리와 함께 들려왔다.

“아까 차를 멈췄으면 뒷 차가 우리 차에 부딪혔을 거야. 우린 무사할 테지만 뒤에 타고 있던 아이 엄마와 어린아이가 위험했을 거라고.”

그제야 여자는 정신을 차리고 남자를 밀쳐냈다.

“사고가 날 줄 미리 알고 있었던 거야?”

“화내지 마.”

“이 것도 보고 온 건가? 다음은 어떻게 돼지? 내가 뺨이라도 때리고 돌아서나? 아니면 눈물이 라도 흘려?”

“그만 좀 해. 에지.”

“뭘? 내가 뭘? 뭘 그만하라는 건데? 너야말로 그만해!”

에지는 이제 이성을 잃고 비아냥거렸다.

“우리 미래는 보지 않아. 너와 약속한 거잖아.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오웬은 한 손으로 자신의 관자놀이 부분을 매만졌다.

“그 말도 이제 못 믿겠어. 늘 항상 뭔가 알고 있는 사람처럼 행동하는 거, 이제 지겨워. 끔찍하다고!”

빗소리를 뚫고 날카로운 에지의 음성이 총알처럼 날아와 오웬의 가슴에 박혔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쏟아지는 폭우는 멈출 기세를 보이지 않았다. 흠뻑 젖은 에지와 오웬은 우두커니 그곳에 서있었다. 한동안 둘 사이에 아무런 얘기가 오가지 않았다. 서로 눈을 맞출 뿐이다. 비가 내리는 소리는 그 둘을 오묘하게 엮어 놓았다. 오웬은 차라리 비가 영원히 그치지 않길 바랬다.

 

 

“비가 안 멈출 건가 본데요.”

지훈은 따뜻한 커피를 들고 온 에지를 보며 기분 좋은 듯 얘기했다. 공연장에서 나와 얼마 지나지 않아 소나기가 쏟아졌다. 에지는 지훈을 데리고 그녀의 오피스텔로 왔다.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고층의 고급 오피스텔을 보고 지훈은 그녀가 꽤나 성공한 시나리오 작가라고 생각했다. 23층에서 내려다보는 밤의 한강은 운치가 있었다. 더군다나 비 까지 내려 주니 더할 나위 없이 감상에 젖어들기에 충분했다.

“음악 들을까요?”

지훈은 평소에 자주 듣던 플레이 리스트에 한 곡을 선택했다. The Roots의 “You Got Me”가 흘러나왔다.

“비가 내리는 소리와 아주 잘 어울리는 사운드죠.”

지훈이 자신 있게 말했다. 에지는 창가에 기대서서 창문을 열었다. 얼굴을 창문 밖으로 내밀었다. 빗물이 그녀의 창백한 얼굴에 떨어졌다. 가만히 눈을 감고 비가 내리는 소리에 집중했다. 음악소리와 어우러져 그녀의 가슴을 적셨다.

“If you were worried ‘bout where I been or who I saw or what club I went to with my homies”

(내가 어디에 있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친구들과 어떤 클럽에 가든지)

“Baby don’t worry you know that you got me"

(걱정하지 마. 이미 넌 날 가졌잖아)

“Somebody told me that this planet was small”

(어떤 이들은 이 행성이 너무 작다고 말해)

음악을 가만히 듣고 있던 에지는 지훈에게 말했다.

“좀 더 크게 듣자.”

에지의 가늘고 긴 손가락이 선반에 놓여있던 블루투스 스피커를 가리켰다.

“오! 누나! 에어로스컬! 저거 진짜 갖고 싶었던 건데!”

“저 해골바가지 이제 지겨워. 너 집에 갈 때 가져가.”

“대박! 누나! 진짜요? 고마워요! 누나! 고마워요!”

지훈은 신이 나서 달려가 해골 모양의 블루투스 스피커를 품에 안았다.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에지는 무표정한 얼굴로 다시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내다보았다.

“So what you sayin I can trust you?”

(널 믿어달라는 거야?)

“Is you crazy, you my king for real”

(당연하지, 넌 내게 전부야.)

“But, sometimes relationships get ill. No doubt”

(그렇지만 가끔 우리 사이 삐걱대기도 해. 틀림없어.)

“If you were worried ‘bout where I been or who I saw or what club I went to with my homies”

(내가 어디에 있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친구들과 어떤 클럽에 가든지)

“Baby don’t worry you know that you got me"

(걱정하지 마. 이미 넌 날 가졌잖아)

음악은 블루투스 스피커를 통해 더욱 선명하고 웅장한 사운드로 그녀의 오피스텔에 울려 퍼졌다. 비가 내리는 소리와 잘 어울리는 사운드였다. 틀림없이 그러했다.

 

 

로이는 자연스럽게 일어나 소파 쪽으로 걸어갔다. 드미트리가 그려 넣은 욕조 속 해골 그림의 안대를 코트 주머니 양쪽으로 나눠서 쑤셔 넣었다. 그의 코트 주머니가 불룩 튀어나왔다. 다시 원탁의 테이블로 걸어온 로이. 의자를 잡고 비스듬히 기대섰다. 모래시계가 거의 다 아래로 내려가 있다. 시간이 얼마 없었다. 카일은 로이를 설득해야만 했다.

“네가 얼마나 오웬을 신뢰하는지 알아.”

카일의 입에서 오웬의 이름이 거론되자 로이를 비롯한 모두가 카일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야.”

“저도요!”

카일의 말에 제이슨이 거들었다. 로이는 그들을 향해 비웃었다. 그들의 언어를 알아들을 수 없었던 드미트리는 영문도 모른 채 로이의 표정을 살폈다. 계속해서 카일이 입을 열었다.

“좋아. 네가 믿지 않는다고 해도 상관없어. 그렇지만 지난달에 에지도 우리 팀에 합류했어. 우리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고……”

“에지를 미끼로 던져도 달라질 건 없어.”

로이는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곧 그녀를 만날 수 있을 거예요!”

제이슨이 그런 로이에게 힘주어 말했다.

“아마 탄자니아에서 만나게 되겠지?”

마지막 카일의 말에 로이의 표정이 달라졌다. 그 순간 모래시계 안의 가루가 아래로 완벽하게 쏟아져 내렸다. 안티텔레프는 마지막 빛을 발하며 다시 엄지손톱 크기로 줄어들었다. 원래의 크기로 돌아간 안티텔레프에 의해 위에 올려져 있던 모래시계가 흔들거리며 탁자 위로 떨어졌다.

“Вошла ложь, вот где начинается эта драма”

로이가 러시아어를 내뱉고는 그 자리에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알아들을 수 없었던 카일과 제이슨은 동시에 드미트리를 쳐다보았다. 드미트리는 난처한 듯 로이의 말을 통역해 영어로 내뱉었다.

“Lies come in, that`s where that drama begins.”

(거짓을 말하기 시작하면, 그곳에서 드라마가 시작된다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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