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살리아 Nov 17. 2019

순백의 흑인

“Lies come in, that`s where that drama begins. 이 곡 마지막 가사예요.”

지훈이 여전히 창밖에 서있는 에지에게 다가가 말했다. The Roots의 “You Got me”가 계속 반복해서 플레이되고 있었다. 그의 말에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그녀가 읊조렸다.

“Lies come in, that`s where that drama begins. 거짓을 말하면 그곳에서 드라마가 시작된다.”

에지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내 지훈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 드라마…… 비극일까? 희극일까?”

“글쎄요. 거짓말을 한다는 건 결과적으로 비극적이지 않을까요? 뭐. 어쩌면 말한 사람이 의도한 건 희극을 원했을지도 모르겠지만요.”

지훈의 말에 에지의 고개가 천천히 끄덕여졌다. 어느덧 힘차게 쏟아지던 빗소리도 잦아들었다. 지훈은 밖을 내다보고서는 곧 자신이 이 공간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재빨리 그러나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갔다.

“근데 누나는 주로 어떤 시나리오를 쓰세요? 비극인가요? 희극인 가요? ”

그의 물음에 에지는 대답 대신 현관을 쳐다보았다. 그쪽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그녀의 조심스러운 행동에 지훈은 음악을 껐다. 음악이 삭제된 공백에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집에 손님이 와 있었나 보네.”

카일의 목소리였다. 지훈은 놀라서 에지와 그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누… 누나? 저분은 누구세요? 혹시 누나 결혼하셨어요?”

지훈의 물음에 카일이 재빨리 대답했다.

“아.. 아… 오해 말아요. 우린 직장 동료입니다. 아… 그러니까……”

“나랑 동거하는 남자야.”

에지가 덤덤하게 설명했다.

“누… 누나… 동거 남이요?”

“아니 아니. 에지, 그렇게 말하면 오해하지. 아… 그러니까 우린 뭐 전략적으로 같이 지내는 파트너? 뭐 그런……”

그때 제이슨이 들어왔다.

“에지. 그 아이스크림가게 문 닫았어. 내일 아침에 사 가지고 올게”

지훈은 제이슨을 보고 한 번 더 놀랐다.

“아! 에지 손님이 와있었구나. 안녕하세요?”

제이슨이 지훈에게 다가가 악수를 청했다. 지훈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그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이내 고개를 돌려 에지를 향해 물었다.

“작가 누나! 이 분도같이 사는 동료인가요?”

지훈이 난처한 표정을 하고 있다.

“작가 누나?”

제이슨이 황당한 듯 에지를 바라봤다.

“에지가 저 친구한테는 작가 누나인가 본데요?”

제이슨이 카일을 향해 속삭였다. 눈치 빠른 카일이 잽싸게 지훈을 향해다가 갔다.

“아. 그러니까. 우린 지금 작품을 같이 하나 만들고 있어요. 에지가 시나리오를 쓰고. 아. 나는 연출을 맡고 있어요. 카일입니다. 반가워요. 그리고 여기 호리호리한 이 키 큰 친구는 아… 그러니까…”

카일이 적당한 단어를 찾고 있을 때 제이슨이 먼저 치고 나갔다.

“아! 저는 캐스팅 디렉터 제이슨입니다. 로케이션 매니저도 하고 배우도 발굴하고 있어요. 요즘은 주로 감독님과 다니면서 장소 섭외하고 있죠. 방금 러시아에서 오는 길입니다. 다음 작품 찍을 장소를 찾고 있거든요.”

두 남자의 역할 놀이에 에지가 옅은 실소를 보였다.

“아. 그러셨구나. 안녕하세요. 저는 오지훈입니다. 작가 누나랑은 어제 처음 이태원에서 만났어요. 제가 개발하고 있는 이 안경에 관심을 보이셔서…… 오늘은 같이 콜드플레이 공연도 보고, 뭐. 찾을 사람이 있다고…… 그런데 누나가 비 오는 날 집에 혼자 있으면 무섭다고 그래서…… 근데 지금 비도 거의 그친 거 같고, 시간도 너무 늦었으니, 또, 이렇게 같이 사시는 분들도 오셨으니까. 그래 가지고 에어로스컬 스피커를 누나가 선물해줘서, 지금 그것을 제가 들고 이제 막 나가려고 하던 참이었어요.”

지훈은 두서없이 에지와의 있었던 일들을 쏟아냈다. 그리고 본인의 퇴장을 알렸다.

“지훈? 보니까 내가 한참 형이니까 말 편하게 할게. 아 그러니까 그건 여기 잠시 두고.”

카일은 지훈이 품에 안은 해골 모양의 스피커를 가로채 제이슨에게 넘겨 두고는 그를 소파에 앉히며 말했다.

“우린 또 손님이 오면 근사하게 대접하는 게 룰이니까.”

 


두 팔을 멀리 벌려 품에 안으려면 성인 남자 열둘은 족히 필요한 둘레의 나무가 있다. 아주 오래전 태초부터 그곳에 우뚝 서 스스로 자라난 것처럼 우직함이 느껴진다. 몸통에 뚫린 큼지막한 구멍이, 힘차게 하늘을 향해 뻗어 있는 여러 갈래의 굵은 줄기가, 그 사에 풍성하게 청록 빛을 발하는 잎사귀들이 그 세월을 증명해준다.

우직한 한 그루의 나무 주변에는 발목까지 자라난 연두 빛의 풀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간지럽게 발목에서 나부끼는 사이, 나무에 가만히 등을 기대고 서서 지평선을 바라보고 서있노라면 드넓은 초원은 어머니의 품처럼 평온하다. 그곳에서 인간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그것은 형언할 수 없는 완벽한 자유다. 거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눈을 감고 숨을 깊게 들이마신 뒤 모든 세포의 멈춤을 제어한 순간 찰나의 적막을 느낀다. 이내 천천히 조금씩 숨을 초원 밖으로 내뱉는다. 살아있음을 느낀다. 아직 살아있다. 바지 뒷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절묘한 타이밍이네.”

로이는 영상통화로 걸려온 전화를 내려다보았다. 잠시 전화를 받을지 말지를 고민했다. 또 한 번의 들숨과 날숨이 있었다. 그리고는 결정했다.

“파데우스. 어떻게 알고 전화를 했어요?”

“하하. 로이! 뒤에 보이는 나뭇결을 보니 루아하에 있는 것 같네!!”

“귀신같네요.”

“왠지 루아하 국립공원에 가 있을 거라 생각했어. 심바를 보았나?”

“글쎄요. 눈을 감고 있는 사이 지나갔을지도 모르겠네요.”

로이의 아이폰 액정화면에 모습을 보인 파데우스는 탄자니아인이다. 그곳에서 태어났고 자랐다. 그는 태어났을 때부터 남들과 다른 모습이었다. 흑인이었지만 검은 피부와 검은 머리, 그리고 검은 눈동자를 가지지 못한 채 세상에 나왔다. 그는 백색증 환자로 불리는 알비노였다.

그의 피부는 백인보다 하얗고 자외선에 치명적이었다. 그의 머리는 금발보다 더 빛났다. 그의 눈동자는 옅은 붉은색에 동공은 불안하게 늘 흔들렸다. 그는 탄자니아에서 자신과 비슷한 처지에 놓인 순백의 흑인들을 위한 자선단체의 단장을 맡고 있다. 그것이 그의 숙명이라 여겼다.

“그래, 언제 이쪽으로 넘어올 건가?”

“지금 바로 당신 눈 앞에 서있으라는 얘긴 거죠?”

“지금 내 집무실에 있네.”

로이는 파데우스와 전화를 끊었다. 다시 나무에 기대서서 지평선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또 한 번의 들숨과 날숨이 있었다. 그리고는 사라졌다.

 

 

“아. 배 터지겠어요.”

지훈 앞에 놓인 테이블 위에 빈 접시들이 잔뜩 깔려있다.

“마지막 하나 더 남았어.”

카일은 제이슨을 향해 눈짓을 보냈다. 이내 제이슨은 그의 뜻을 알아차리고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그 행동이 사실은 두 시간 전부터 계속 반복되고 있었다.

“아. 진짜 괜찮아요. 진짜 세계 맛 기행을 한 것 같네요. 너무 배불러요.”

지훈은 배를 문지르며 힘겨운 표정을 내 비췄다. 두 시간 전, 돌아간다는 그를 카일이 억지로 앉혀 놓고는 전 세계 대표 음식들을 하나씩 내왔다. 모로코의 타진, 멕시코의 타코, 헝가리 굴라쉬, 스페인 빠에야, 오스트리아 슈니첼, 태국 팟타이, 인도 탄두리, 터키 케밥, 중국 훠궈, 일본 초밥까지 뷔페 같은 한 상차림이 지훈 앞에 순식간에 놓였다. 물론 제이슨이 직접 그 나라의 길거리에서, 상점에서, 레스토랑에서 하나씩 공수해 온걸 지훈은 눈치채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한국음식?”

카일의 말에 지훈은 손사래를 쳤다.

“헤? 한국음식이요? 뭐 어떤 거요? 비빔밥? 갈비탕? 순댓국? 삼겹살? 어후. 더 이상 못 먹어요!”

지훈과 카일이 실랑이를 할 때 에지는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에서 냄비를 꺼내왔다.

“설마 누나 거기다가 라면을 끓인다는 건 아니죠?”

그 사이 제이슨의 손에는 검은 봉지가 들려있었다. 그가 에지가 들고 온 냄비에 콸콸 쏟아붓는 것은 갈비탕도 순댓국도 아니었다. 카일은 냄비 속 음식을 바라보며 흡족해 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마지막은 누룽지 가야지.”

 

 

배가 부른 네 남녀는 각자의 위치를 고수했다. 에지는 피곤하다며 방으로 들어갔고, 제이슨은 두 시간의 세계일주에 나른해졌는지 욕조에 몸을 담갔다. 거실에는 카일과 지훈이 남아있었다.

“들고 있는 그건 뭐지?”

카일은 지훈이 가지고 있던 안경에 관심을 보였다. 콜드플레이 공연장에서 에지가 쓰고 있었던 투명 뿔테의 안경이다.

“사람을 식별하는 안경이에요. 아직 태양빛에만 작동해서 해가 지면 별 쓸모가 없어요.”

“사람을 식별하는 안경이라……”

“몇 가지 조건을 입력해서 부합되는 것을 읽어 들여요. 최대 1.5Km까지 스캔이 가능해요. 인간 시력 한계를 보안해주죠. 근데 아직 완벽하진 않아요.”

카일은 지훈에게 안경을 보여달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지훈이 건 낸 안경을 받아 들고는 착용을 시도했다.

“지금은 그냥 평범한 안경이에요. 실내에서는 작동되지 않거든요.”

카일은 안경을 벗지 않은 채 지훈을 바라보았다. 손가락으로 안경을 가리키며 말을 이어갔다.

“근데 이건 왜 개발한 거지?”

“그냥 요. 별 뜻은 없어요. 예전엔 사진 찍는 것을 좋아했는데, 어떤 순간을 포착하고 싶으면 카메라에 담았거든요. 그런데 나중에 찍힌 사진을 확인해보면 그때 눈으로 보고 느꼈던 감정들이 그 사진 속에는 담겨있지 않는 거예요. 그때부터였던 것 같아요. 인간의 망막을 카메라가 넘어설 수는 없겠구나. 그래서 카메라를 들이대기보다는 최대한 내 눈으로 그 순간을 담아내야지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인간이 늙으면 어쩔 수 없이 노환이 오는데, 그럼 결국 카메라가 넘지 못했던 망막의 위대한 여정이 끝나는 걸까? 인간은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할 운명인가? 그것이 신이 인간에게 감내하라고 부여한 고통인 건가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이걸 만들어봤어요. 인간에게 놓인 숙제와도 같은 숙명을 거슬러보자. 망막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 가능할까 하는 뭐 그런 단순한 호기심 같은 거였죠. 뭐. 에지 누나처럼 누군가를 찾고자 하는 의뢰인이 꾸준히 생기면 돈벌이가 될 수도 있을 것 같고. 아. 그렇다고 이번에 누나한테는 돈을 받진 않았어요. 대신 공연을 보여주시긴 했죠. 뭐. 결국 이러다가 쓸모가 없어지면 제 방 책상 서랍으로 들어가겠죠. 이런 게 사실 한 두 개가 아니거든요.”

지훈은 멋쩍은 듯 머리를 매만졌다. 카일은 안경을 벗어 지훈에게 건넸다.

“지훈이 너는 남극을 가봤나?”

“아니요. 죽기 전에 가보고 싶은 곳 중 한 곳이긴 한데, 왜요? 가보셨어요?”

지훈은 카일에게 넘겨받은 자신의 투명 뿔테 안경을 그의 손바닥 만한 보라색 극세사 천으로 닦으며 물었다. 카일은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인간이 언제 처음 남극점에 도달했는 줄 아나?”

“글쎄요.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19세기 위대한 누군가의 호기심과 모험심이 만들어낸 결과물이었겠죠.”

“그랬지. 인간의 호기심과 모험심은 많은 변화를 가져다 주기도 하고 새로운 것에 확실한 동기부여가 돼지.”

“맞아요. 문제는 그런 호기심과 모험심이 나만 가지고 있진 않다는 거죠. 그런데 진짜 남극의 존재는 어떤 이의 호기심으로 처음 수면 위로 오른 거예요?”

“남극 탐험대는 두 남자의 라이벌 전이었어. 먼저 시도한 건 영국의 스콧 대령이었지. 하지만 결과적으로 남위 90도 남극점에 최초 발을 디딘 사람은 노르웨이의 아문센이야. 아문센이 이끄는 탐험대가 1911년 12월 14일 오후 3시에 남극점에 도달해. 그들이 도착했을 때 뭐가 보였을까?”

“쌓인 눈, 광활한 대지. 뭐 이런 것이 보였을 까요? 아님 혹시 시체?”

“그들이 도착한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지. 특히나 사람의 흔적은 아무것도 찾아볼 수 없었어. 인류 최초로 남극점에 도달한 거야.”

“아…… 그럼 라이벌이었던 스콧은 어떻게 됐을까요? 아문센의 소식을 듣고 포기했을 까요?”

“아니. 스콧 일행도 남극점 도달에 성공해. 하지만 그들은 그곳에서 펄럭이는 노르웨이 깃발을 봐야만 했지. 후세에 우리들은 남극을 정복한 아문센을 기억해. 스콧은 한순간에 잊혀졌어. 중요한 건 먼저 시작하는 사람이 아니라, 먼저 끝을 보는 사람이라는 거야. 사람들이 기억하는 것은 깃발을 꽂은 아문센이야. 그러니 너도 아직 멈추지 마. 분명 네 뒤에, 어쩌면 너보다 더 앞서가는 누군가가 있을 거야. 그들보다 먼저 너의 깃발을 꽂아. 잊혀지는건 한 순간이야. 그전에 끝을 봐야지.”

카일의 두툼한 손이 지훈의 어깨를 다독였다.

 

 

지훈은 소파에서 그대로 잠이 들었다. 한강이 내려다 보이는 전략적 파트너들의 오피스텔, 어두운 거실 한 켠에서 빔 프로젝터의 불빛이 흘러나왔다.

“순백의 흑인은 어딘지 모르게 낯선 거 같아.”

에지의 말에 제이슨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빔 프로젝터가 쏘고 있는 벽 쪽으로 가까이 다가가 섰다. 프로젝트 불빛이 그의 얼굴과 몸을 덮었다. 화면에는 피부색이 하얀 다양한 인종들의 모습이 보였다.

“알비노들은 인종에 상관없이 나타나는 선천성 유전 질환이야. 멜라닌 합성 결핍으로 신체부위에 색소 부족 현상이 표출돼. 동공, 피부, 털, 머리카락 등이 일반인과는 달라.”

제이슨은 자신의 오른쪽 팔을 들어 왼손바닥으로 피부를 쓸어 보였다.

“너도 좀 멜라닌이 부족한 거 같은데?”

에지의 말에 카일이 나섰다.

“알비노들은 우리와는 다르게 햇빛에 상당히 취약하지. 긴 옷, 모자, 선글라스, 자외선 차단제가 그들에게는 산소와도 같아. 제대로 보호하지 않으면 실명이 되거나 피부암이 발생돼서 생명의 위험을 받을 수도 있어.”

카일의 말에 에지의 표정이 굳어졌다. 제이슨이 말을 계속 이어갔다. 화면의 슬라이드는 넘겨져 세계지도가 나왔다.

“알비노는 통상 2만 명당 한 명꼴로 나타나. 그런데 가장 햇빛에 노출되기 쉬운 환경인 나라에서 그 비율이 상당히 높게 나타나고 있어. 그 비율이 천 사백 명당 한 명 꼴이야.”

“아프리카겠구나.”

“응. 정확해.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국가들이 지구 상 다른 지역에 비해 그 비율이 높지.”

제이슨이 넘긴 다음 슬라이드에는 순백의 흑인들의 모습이 이어졌다. 에지가 물었다.

“어느 나라 사람인 거지?”

“탄자니아야. 그곳엔 사천 명 이상의 알비노들이 살고 있어. 그들은 사회적 배려가 필요한 약자들이야.”

제이슨의 말에 카일이 덫 붙였다.

“정부 추정치일 뿐이야. 실제로는 십만 명이 넘지.”

카일이 다음 슬라이드로 넘기라고 손짓했다. 제이슨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슬라이드를 넘겼다. 화면에는 여전히 순백의 흑인들의 모습이 비쳤다. 그러나 이전과는 다른 이들이었다. 그들은 팔이 없거나 다리가 없었다.

“탄자니아에서는 알비노의 신체 일부를 가지고 있으면 부와 명예를 얻을 수 있다고 믿고 있어. 아주 오래전부터 행해져 온 그릇된 주술의 잔재들이야. 그들의 뼈를 부적처럼 지니기도 하고, 광부들은 금광을 캘 수 있다는 헛된 믿음에 알비노의 신체 일부를 묻고, 어부들은 그들의 머리카락으로 그물을 짜기도 해. 실제 탄자니아에서는 알비노의 팔과 다리가 사천에서 많게는 칠만 오천 달러에 거래가 되고 있어. 빈민층들이 한 달에 버는 임금의 수백 배가 넘는 액수야.”

“끔찍하네. 대체 누가 그런 짓을……”

에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제이슨은 계속 말을 이어갔다.

“실제 탄자니아 길거리에서는 알비노를 향한 칼부림이 나기도 해. 그들의 신체 일부를 갖고 있으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헛된 믿음 때문이야. 심지어 가족마저도 그들에게 칼날을 겨누는 일도 있어. UN 보고서에 따르면 서른여덟 살의 탄자니아 한 여성이 자고 있는 동안 남편에게 팔이 잘렸다고 해. 한 아이는 아버지가 어머니의 팔을 들고 침실을 빠져나가는 것을 지켜봤다고. 알비노의 신체를 먹거나 그들과 성관계를 하면 질병이 낫는다는 속설도 있어. 그래서 신체 절단이나 성폭행들이 심심찮게 일어나. 또, 어떤 이들은 알비노들이 유령이나 저주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알비노를 낳은 여성과 아이를 내다 버리기도 하고, 그들의 무덤이 파헤쳐지고 시신이 사라진 사건도 있어. 이 모든 것이 너무 충격적이고 믿기 어렵겠지만 실제 일어난 일이지. 정말 인간이 저지르는 그 어떤 범죄보다 끔찍한 일이야.”

“마녀사냥이 따로 없네. 그들의 배후가 있어?”

“잔혹한 마녀사냥을 꾸미는 건 대부분 주술사 들이야. 그들은 부와 권력을 얻으려는 정치가들과 결탁돼 있어. 주술사들은 정치가들에게 선거에서 당선되려면 알비노의 신체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며 부추기지. 정치가들은 높은 가격을 주고 알비노의 신체와 시신을 거래해.”

“탄자니아 정부는 뭐 하고 있는 거야?”

“지금까지 알비노에 대한 상해 또는 살인혐의로 재판장에 선 건 고작 열 명뿐이야. 거기에 알비노의 신체를 사려던 구매자는 단 한 명도 밝혀지지 않았지. 이게 현실이야.”

잠시 그들 사이에 침묵이 일었다. 카일이 다음 슬라이드를 넘기며 조용히 자리에 일어섰다. 제이슨이 그에게 포인터를 넘겼다. 카일이 넘긴 슬라이드 화면에 보이는 것은 경호를 받으며 차량에서 나오는 수트 입은 한 남자의 사진이었다. 카일이 입을 열었다.

“나자르 야부. 탄자니아 차데마당 최고위원이야. 알비노 여성 성폭행, 살해 및 신체 유기로 재판에 섰지만 올해 초 무죄로 판결이 났어.”

재빨리 다음 슬라이드를 넘겼다. 한 여성의 사진이 나왔다. 역시나 그녀도 순백의 흑인이었다.

“피해자 줄리아나 아다치에. 당시 나이 열여덟 살. 보는 바와 같이 그녀도 알비노야. 나자르는 3년 전 그녀를 납치해 자신의 별장에서 성폭행한 후 신체를 훼손했어. 방치된 줄리아나는 과다출혈로 끝내 사망하지. 당시 선거일을 두 달 앞두고 저지른 잔혹한 범죄지만 결국 무혐의로 풀려나. 나자르의 별장 뒷마당에서 시체가 발견됐지만 그의 수행비서가 단독으로 저지른 범죄로 수사가 종결되었어. 수행비서가 모두 자백했거든. 물론 거짓자백이야. 그녀의 아버지는 억울함을 호소하며 재판을 열었지만 끝내 나자르는 무죄 판결을 받았어.”

카일의 말을 이어 제이슨이 입을 열었다.

“코드네임 줄리. 줄리아나, 그녀도 우리와 같은 트래블러였어.”

 

 

로이가 집무실에 도착했을 때 파데우스는 자리에 없었다. 파데우스의 집무실은 깨끗했다. 창문은 없었다. 책상 하나와 넓은 책장이 벽을 가득 매웠다. 방 문 근처에 있던 장식장에는 그가 다른 알비노들과 찍은 사진들이 진열돼있었다.

로이는 몸을 돌려 책상 쪽으로 걸어갔다. 책상 위에는 각종 서류들이 잘 정돈되어 있다. 한 켠에 손바닥 만한 뒤집힌 액자가 있었다. 그는 그것을 집어 들었다. 액자 안에는 십대로 보이는 알비노 여성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녀의 옅고 투명한 푸른빛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방문을 열고 누군가 들어왔다. 그 소리에 로이가 뒤를 돌아보았다.

“안녕하세요. 단장님께서는 지금 정원에 계십니다. 집무실로 손님이 올 거라고 말씀하셨는데, 정말 이렇게 서 있을 줄은 몰랐네요. 놀랍군요. 그가 당신을 안내하라고 했습니다. 저를 따라오시겠습니까?”

방문 앞에는 신체 건장한 흑인 사내가 서있었다.

“혹시 양산이 있습니까?”

“잠시만요. 바로 가져다 드리죠.”

로이가 자신을 정원으로 안내한 이에게 양산을 요구했다. 양산을 들고는 파데우스가 앉아 있던 정원으로 걸어 들어갔다. 파데우스는 파란색 꽃들이 만발한 정원 사이에 쭈그리고 뒤를 돌아 앉아 있다. 더운 날씨에 긴 팔과 긴 바지를 입고 모자를 쓰고 있었다. 로이는 양산을 펼쳐 파데우스 머리 위로 높이 들었다. 그에게 커다란 그림자가 졌다.

“잠깐이라도 이 꽃들을 봐야 밤에 잠이 온다네.”

“예쁜 꽃이네요. 이름이 뭔가요?”

로이의 물음에 파데우스는 여전히 같은 자세로 꽃들을 매만졌다.

“로벨리아. 줄리아나를 떠나보내고, 여기 이렇게 꽃을 심었지.”

“로벨리아…… 당신 딸아이의 눈동자와 닮았네요.”

파데우스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눈을 감았다. 로이는 양산으로 파데우스를 뜨겁게 내리쬐는 햇볕으로부터 보호하고 서있었다. 파데우스가 굽힌 무릎을 피며 돌아섰다.

“자네가 후원해준 덕분에 알비노들을 위한 일자리 창출에 좋은 출발을 시작했네. 그들도 곧 사회에 잘 적응해 나갈 수 있을 걸세. 요즘 탄자니아에서도 알비노들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많이 바뀌어 가고 있어. 좋은 징조야.”

“당신이 있어서 가능한 일들이에요. 파데우스.”

로이가 미소를 지었다. 파데우스는 고개를 돌려 앞으로 걸어갔다.

“그만 들어가세. 줄게 있네.”

파데우스는 서둘러 정원을 가로질렀다. 로이가 그 뒤를 따랐다. 실내에 들어온 파데우스는 모자를 벗었다. 금 빛 머리칼이 반짝였다. 로이를 정원으로 안내했던 이가 이제는 양산 대신 작은 화분을 들고 그들에게 다가왔다. 파데우스는 그것을 보고는 로이에게 말했다.

“자네한테 선물하려고 준비했어. 화분 색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흰색으로 골랐네.”

파데우스의 말에 로이를 정원으로 안내했던 이가 순백 화분의 로벨리아를 로이에게 건넸다.

 

 

제이슨과 카일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만 있던 에지가 손을 들어 보였다.

“잠깐. 제이슨. 슬라이드를 한 장 앞으로 돌려 볼래?”

제이슨이 카일을 쳐다보았고, 이내 카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 슬라이드로 돌아간 화면에는 경호원의 호위를 받는 나자르의 모습이 다시 보였다. 에지는 자리에 일어서서 화면 가까이 천천히 다가갔다. 그녀가 코 앞까지 다가가 걸음을 멈추었다. 이내 화면을 정면으로 응시한 그녀는 두 손을 자신의 입에 가져갔다. 그녀의 작은 얼굴이 손바닥에 거의 가려졌다. 그러나 놀란 두 눈만은 깜박임 없이 화면을 응시하고 있다.

“설마……”

나자르가 내렸던 차 뒷좌석에 창문을 반쯤 내리고 주변을 둘러보는 한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남자의 얼굴은 코밑으로는 보이지 않았지만 에지는 그가 누구인지 정확히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오웬이었다.

이전 07화 드라마의 시작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