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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살리아 Nov 17. 2019

돌고래 훈련생

로이는 비치체어에 몸을 뉘었다. 선글라스를 통해 저물어 가는 태양을 바라보았다. 지구에서 가장 드라마틱한 하늘의 색을 볼 수 있는 순간이다. 고요한 인피니티 풀장 너머의 낮게 깔린 구름 사이로 태양은 조금씩 얼굴을 숨겼다.

세렝게티 중심에 위치한 이 호텔은 로이가 탄자니아에 올 때마다 머무는 곳이다. 전 세계 어느 곳이든 자연과 가장 가까이에서,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만끽하며, 자연과 동화되는 경험을 투숙객들에게 선물하기로 정평이 난, 호텔 체인이다. 여기 이 곳 세렝게티 초원 중심을 향해 버기 로드를 따라 달리면, 자연 속에 파묻혀 있는 5성급 호텔을 만날 수 있다.

“유레카! 드디어 찾았네!”

호텔 가운을 걸친 늘씬한 한 여자가 로이를 향해 조심스럽게 발걸음을 옮겼다. 맨발의 그녀는 마치 먹이를 발견하고 달려드는 앞다리가 긴 암컷 하이에나 같았다. 로이는 노을빛에 취해 그녀의 존재를 감지하지 못하고 있다. 천천히 그에게로 다가가던 여자는 걸음을 멈추고 가운을 벗었다.

위아래로 화이트 칼라에 심플한 디자인의 비키니 차림이다. 볼륨 있는 봉긋한 가슴에, 길고 곧게 뻗은 다리, 탄탄한 힙라인은 화이트칼라의 비키니와 잘 어울렸다. 분명 주목할 만한 몸매의 소유자였으나 그녀의 먹잇감은 여전히 노을을 감상하며 풍류에 젖어 있을 뿐이다. 여자는 아무도 없던 고요한 풀장에 몸을 던졌다. 요란한 소리가 났다. 그제야 로이가 고개를 돌렸다.

‘뭐지?’

풀장으로 뛰어든 여자는 잠영을 했다. 로이의 시선이 그녀의 곡선을 끝까지 따라갔다. 인피니티 풀장 끝 선까지 한 숨에 흘러간 그녀가 고개를 내밀었다. 깊은숨이 터져 나왔다. 로이는 그녀의 뒤통수를 보았다. 그제야 선글라스를 벗고 자리에 일어섰다. 그녀가 남기고 간 물살이 노을빛에 반짝였다. 여자도 한 참을 풀장 안에서 저물어가는 태양을 감상했다.

로이가 그녀를 좀 더 가까이 보기 위해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것을 캐치한 암컷 하이에나는 다시 얼굴을 담가 물속으로 숨어버렸다. 처음 점프했던 지점으로 움직였다. 로이도 풀장 밖에서 그 움직임을 천천히 따라갔다. 여자가 벗어던진 가운이 그곳에 있었다. 로이는 허리를 숙여 그것을 잡았다. 다시 허리를 피려던 순간 풀장 안에서 물기둥이 일었다. 깜짝 놀란 로이가 순간적으로 뒷걸음 질 쳤다. 풀장 안을 두리번거렸으나 여자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다시 고요해진 풀장, 아무도 없던 비치체어, 완전히 얼굴을 감춘 태양. 호텔에서 밝힌 조명만이 그 공간에 정말 로이뿐이라는 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로이는 손에 든 가운을 바라보았다.

“그거 이리 줄래?”

로이가 서있던 뒤쪽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이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에지?”

“천하에 바람둥이가 이렇게 감을 잃어서야.”

에지가 고개를 흔들어 보였다.

“놀랬잖아! 이게 얼마만이야. 잘 지냈어?”

“감성 팔이 멘트나 날릴 거면 집어치워. 가운이나 이리 줘.”

“어? 어. 그래. 미안. 여기……”

로이가 가운을 펼쳐 에지의 몸에 둘렀다. 두 남녀가 가까이 몸이 붙자 로이의 시선이 젖은 에지의 가슴골에 꽂혔다.

“에지. 뭐야. 오랜만에 나타나서는 날 꼬시려고 일부러 흰색을…… 미리 언질을 줬으면 내가 준비라도……”

로이가 능글맞은 웃음으로 농담을 흘렸다. 에지는 뒷걸음치며 가운을 제대로 입었다. 그녀가 허리끈을 묶을 때까지 로이의 시선이 그녀의 가슴에 가있었다.

“야! 그만 좀 쳐다볼래?”

“에지. 그 가운……”

로이의 시선이 머문 에지의 가슴 부근에 호텔 이름이 적혀있었다.

“……킬리만자로?”

에지가 얼른 몸을 돌려, 뒤돌아 걷기 시작했다. 로이가 그런 그녀 뒤를 따랐다.

“그 가운 여기 호텔 거 아니지? 킬리만자로에서 오는 길이야? 날 찾으려고? 혹시 잔지바르나 다르에스살람도 갔었어? 에지!”

로이가 그녀에게 바짝 다가가 어깨에 손을 둘렀다. 에지가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속삭였다.

“방으로 가자. 보여줄 게 있어.”

 

 

“빔을 쏠만한 곳이 없네.”

에지는 로이가 묵고 있던 객실로 넘어왔다. 가운 주머니에 넣어 둔 휴대용 미니 빔 프로젝터를 꺼내 들고는 주변을 이십 분째 두리번거리고 있다. 넓은 객실 어디에도 흰색의 벽을 찾아볼 수 없었다. 가만히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 서있던 로이가 에지에게 다가가 손목을 잡아끌었다.

“네가 찾는 거라면 침실에 있어.”

사각의 캐노피가 쳐져 있는 침대가 침실 한가운데에 가득 차 있었다. 하늘거리는 흰색의 커튼을 들춰 로이가 벌러덩 누웠다.

“로이. 장난치지 마.”

에지가 짜증스러운 음성을 내뱉었다. 그런 그녀를 로이가 힐끗 쳐다보더니, 자신의 빈 옆자리에 손바닥을 쳤다.

“너랑 장난칠 기분 아니야. 로이.”

구겨진 미간을 하고는 에지가 다시 한번 힘주어 말했다. 로이가 손가락으로 침대 바로 위 천장을 가리켰다.

 

 

“이 친구, 많이 피곤했나 봐요.”

제이슨은 소파에서 잠이든 지훈에게 담요를 덮어주었다. 잔뜩 웅크린 지훈의 모습을 보고 반대편 소파에 누워있던 카일이 제이슨에게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였다. 이내 다시 사라졌다 나타난 제이슨의 손에는 담요 한 장이 더 들려있었다. 웅크린 지훈 위로 담요가 추가되었다.

“오늘도 잠이 안 오세요?”

제이슨은 어두운 거실에서 침묵을 지키던 카일에게 물었다. 카일은 대답 대신 팔짱을 낀 채, 몸을 꼼지락거리며 등을 지고 돌아 누웠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제이슨도 빈 소파 깊숙이 등을 기대앉았다. 엉덩이를 쭉 빼고 고개를 뒤로 젖혀 소파에 파묻었다. 천천히 눈꺼풀을 덮었다. 어깨는 축 늘어뜨리고, 두 팔은 아무렇게나 떨궈졌다. 그의 무릎이 소파 앞에 놓인 탁자에 닿을 듯했다. 둘 사이에 적막함이 감돌았다. 깊게 잠이 든 지훈의 옅은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에지는 좀 전에 탄자니아로 떠났다.”

카일이 여전히 눈을 감은 채 목소리를 냈다. 그의 목소리에 감았던 제이슨의 눈이 떠졌다. 어두운 거실 천장이 그곳에 있었다.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반사적으로 눈이 떠졌다. 어두운 방 안 천장이 그곳에 있었다.  대수롭지 않은 듯 침대의 누운 남자는 다시 눈을 감았다. 또 한 번의 거슬리는 소리가 들렸다. 상반신만 일으켜 세워 아래층에서 잠이 든 친구를 살폈다. 고요하게 잠이 든 모습을 확인하고는 다시 몸을 누우려던 찰나, 뭔가에 부딪히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자세히 소리에 집중하니, 방 문 너머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남자는 2층 침대에서 벗어나 순간적으로 방문 앞에 섰다. 뒤를 돌아 깊은 잠에 빠진 친구를 바라보았다.

‘오늘 훈련이 빡세긴 했나 보네.’

복도를 천천히 걸었다. 그 끝에서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긴 복도를 지나자 막다른 길에 닿았다. 벽 너머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얼굴을 돌려 벽 가까이 귀를 가져갔다. 남자의 단 잠을 방해했던 소리의 근원이 그곳에 있었다. 얼굴을 들어 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다시 자신이 걸어왔던 긴 복도를 돌아보았다. 복도 끝에는 아무도 없다. 그러나 벽 너머에는 뭔가가 있다. 남자의 호기심은 다음 단계로의 발 빠른 판단을 가져왔다.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한 뒤, 벽 너머의 공간으로 트래블을 시도했다.

‘윽. 뭐… 뭐지?’

남자의 몸이 잠시 사라졌다가 처음에 서있던 벽 앞에서 엉덩방아를 찧었다. 무언가에 가로막힌 듯 튕겨져 원래에 있던 자리로 내던져졌다. 여러 차례 트래블을 시도했으나 똑같은 행동을 반복할 뿐이다. 처음 경험한 이상한 현상은 남자를 당황케 했다. 더집중하여 강한 움직임을 취할수록 벽에서 더 멀어진 복도로 밀려났다. 여덟 번째 대차게 넘어진 뒤 힘겹게 바닥에서 몸을 일으켜 세우려 하는 순간, 벽 앞에 또 다른 남자가 나타났다.

검은색 후드를 뒤집어쓴 채 바닥에 널 부러진 남자를 내려다보며 서있다. 서로가 얼굴을 맞대고 그 공간에서의 마주침에 놀란듯했다. 자신과는 다르게 멀쩡하게 벽 앞에 서있는 정체 모를 남자의 존재에 놀랐다. 그리고 자신의 잠을 방해했던 소리가 사라진 뒤 나타난 남자의 등장은, 그가 그 소리의 주원인이며, 왠지 모를 개운치 않은 일들이 벽 너머에서 행해졌다는 생각으로 빠르게 전환되었다.

“누구세요?”

바닥에 있던 남자의 물음에 서있던 남자는 대답 대신 넘어진 남자 쪽으로 손을 뻗었다. 일어나는 것을 도와주려던 행동처럼 여겨졌으나, 서있던 남자의 출혈로 인해 바닥으로 떨어진 핏방울들이 넘어진 남자의 시선을 끌었다. 그들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일었다.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 경보음이 울렸다. 서있던 남자는 넘어져 있던 남자를 한 번 응시한 뒤,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가 서있던 자리에 흥건한 피의 흔적이 남았다. 그리고 그 위로 손톱만 한 정육각형의 큐브 하나가 떨어져 있었다.

 

 

“오웬은 5년 전부터 나자르를 만나왔던 거 같아.”

로이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다. 에지가 가져온 사진이 그가 누워있던 천장 위에 확대되어 보였다. 에지는 화장대에 몸을 기대고 서서 준비한 말들을 쏟아냈다. 로이는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에지의 말을 경청했다.

“줄리의 죽음에 어쩌면……”

에지는 잠시 말을 머뭇거렸다. 그녀도 내뱉기 힘든 말이었다. 잠깐의 공백이 그들 사이에 흘렀다. 로이는 왼팔을 들어 그의 눈을 가렸다. 에지는 천장을 쏘고 있던 프로젝터의 전원을 껐다. 완연한 어둠이 찾아왔다. 에지의 동공이 어둠에 익숙해져 로이의 형체가 보일 때쯤 그가 입을 열었다.

“에지. 오웬한테는 네가 전부였어.”

가만히 누워 있던 로이가 꺼낸, 첫마디였다.

 

 

“유일한 목격자 인가?”

“23기 훈련생이에요. 코드네임 제이슨. 25세. 오늘 새벽, 잠결에 소음을 들었다네요.”

“훈련생들 숙소까지 거리가 얼마나 되지?”

“120m 정도 될 거예요.”

그 말에 카일이 고개를 돌렸다. 여자는 말을 계속 이어갔다.

“저도 처음엔 놀랐죠. 특별한 청력을 가졌어요. 15만 헤르츠까지 소리를 감지할 수 있답니다. 보통의 인간 청력, 평균 2만 3천 헤르츠에 비하면 어마어마한 수치죠. 저희들 사이에선 이미 돌고래로 소문이 났어요. 각성 나이는 17세. 다른 훈련생들에 비하면 매우 늦은 편이죠. 근데 들리는 얘기로는 훈련생들 사이에서도 이미 특출 나다고 하더군요. 이번 주만 지나면 훈련도 모두 끝나고, 우수한 성적에 정식 요원으로 발탁됐을 텐데…… 아까운 친구예요.”

여자는 아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카일이 그녀에게 고갯짓을 하며, 중지와 엄지 손가락을 부딪혀 튕겼다. 여자는 그의 행동에 재빨리 밀봉된 지퍼백을 넘겼다. 지퍼백 안에는 피 묻은 정육각형 큐브가 들어있다. 여자가 말을 이어갔다.

“제이슨과 같이 발견됐어요.”

“훈련생들한테는 안티텔레프에 대한 교육을 하고 있나?”

그 말에 여자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4년 전, 그러니까 오웬이 우리 한테서 완전히 사라지기 3달 전, 거지꼴을 하고 나타나서는 미래 얘기를 떠들더라고.”

어둠 속에서 여전히 로이와 에지가 함께 있었다. 거쳐진 침실 커튼에 달빛이 객실을 은은하게 밝혀주고 있다. 낮은 조도는 상대방의 대화에 집중할 수 있게 해주는 신의 한 수였다. 이번에는 로이의 말을 에지가 가만히 듣고 서있었다.

“아마도 우리 미래를 본 거 같아. 일부러 의도 한 건 아니었을 거야. 네가 끔찍이도 싫어한다는 걸, 오웬도 잘 알고 있으니까. 블라디보스톡. 그곳에서 너와 나, 생의 마지막을 목격했다고 했어.”

“블라디보스톡? 내 마지막이 러시아 땅이라니…… 나쁘진 않네. 근데 왜 너와 함께 지?”

무거운 표정의 로이와는 다르게 에지는 덤덤하게 대꾸했다.

“사고 사야.”

“사고? 우리가? 열차 추돌이라도 일어나나? 아! 드미트리 만나러 가는 길이었나 보네. 너 늘 시베리아 횡단 열차 타고 가잖아. 근데 난 왜 따라갔지. 드미트리는 완전 그림쟁이 영감탱이가 돼있겠다. 그지?”

“마린스키 극장이라고 했어.”

“극장에서 공연보다 죽는다고? 나름 로맨틱하네.”

“4년 뒤라고 했어. 에지…… 크리스마스 이브에……음..흠…”

로이는 목이 매이는 듯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러니까. 4년 뒤 크리스마스 이브에 마린스키 극장에서 폭탄이 터질 거래.”

로이의 말에 에지는 할 말을 잃었다. 그녀의 표정이 달빛에 비쳤다. 벌려진 그녀의 입술선이 또렷하게 보였다.

“뭐…… 뭐라고? 4년 뒤? 폭탄?”

“이제 한 달 남았어.”

“하! 진짜 어이없네. 오웬이 그래? 우리 둘이 그러니까, 크리스마스 이브에 러시아에서 죽는다고? 말도 안 돼.”

“나도 처음에는 믿기 어려웠어.”

“한 달 뒤에 너랑 극장에 있는 것부터가 말이 안 돼. 그렇지 않아? 로이? 우리가 왜?”

“오웬은 우리 셋다 그곳에 있었다고 했어. 아마도 셋이……”

“거짓말하지 마. 오웬이랑은 끝났잖아. 4년 전에 이미 사라져 버렸잖아. 지금 어디서 뭘 하는지 아무도 모르잖아. 근데 갑자기 우리 셋이 극장에 간다는 게……”

에지의 동공이 심하게 흔들렸다.

“오웬은 미래를 바꾸기 위해 4년 전에 우리 곁에서 사라진 거야. 그가 생각했던 패턴을 바꿀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이 너와 헤어지는 거라고 생각했던 거 같아.”

에지의 눈시울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애써 덤덤한 척 흔들리는 다리에 힘을 주어 버티고 섰다.

“에지. 괜찮아? 미안해. 진작에 너한테 말했어야 했는데, 나도 갑자기 사라진 녀석한테 화가 많이 났었어. 2년은 원망하며 보내고, 2년은 녀석의 행적을 찾아 헤매느라……”

“폭탄이 터졌다고 해도 우린 트래블을 했을 거잖아. 오웬이 말도 없이 왜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했는지 이해가 안 돼.”

에지는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감추며 로이의 말에 반박했다.

“현장에 안티텔레프가 있었을 거야. 아마도 우리 정체를 알고 있는 누군가가 덫을 논거 같아. 오웬은 미래를 바꾸려고 여러 차례 패턴을 바꿔봤다고 했어. 그런데 늘 그 시각에 폭탄이 터졌다고 했지.”

“우리를 노린 테러라……극장이었다면 분명 많은 사람들이 있었을 텐데, 우릴 노렸다면 굳이 이슈를 만들 필요가 없었을 거잖아?”

“글쎄. 그건 나도 의문이야. 테러범이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했을지도 모르지.”

“혹시 그럼, 그게 나자르와 연관이 있다는 거야? 오웬이 5년 전부터 그를 만난 것이 어쩌면……”

“탄자니아 정부와 러시아에서의 테러가 어떤 연관이 있는 것 같아. 지금 그걸 찾고 있어.”

로이는 침대로 다시 걸어갔다. 침대 시트의 끄트머리를 움켜 잡았다.

“뭐 하는 거야? 로이?”

“우리 집으로 가자. 이번엔 내가 보여줄 게 있어.”

로이가 시트를 움켜쥔 손 반대 손으로 에지를 향해 손짓했다. 그의 행동에 에지가 고개를 끄덕이며 다가갔다.

“난 안대는 안 씌워줘?”

에지가 로이의 손을 잡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고개를 바짝 들고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에지의 행동에 옅은 미소를 띠던 로이가 검지 손가락으로 그녀의 콧등을 툭툭 친 뒤 귀에 대고 속삭였다.

“넌 에이급이니, 안대가 필요 없지.”

로이는 침대 시트를 걷어 높이 올렸다. 널따란 시트가 객실 천장 위로 솟구치며 펼쳐졌다. 시트가 다시 침대 위로 내려앉는 순간, 객실 안이 온통 흰색으로 변해있었다.

‘이렇게 여자를 꼬셔서 자기 방으로 데려간다는 거구나.’

에지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은색 종 모양의 스탠드 조명을 제외하고는 온통 순백의 공간이었다. 로이는 오른쪽 방문 앞에 섰다.

“방 문이 두 개네?”

에지가 로이에게 물었다.

“왼쪽은 페이크! 오른쪽이 진짜 우리 집! 혹시 여자들이 자는 사이에 안대를 풀 수도 있으니까. 일종의 안전장치지.”

로이가 오른쪽 방문을 열었다. 순백의 계단 실이 원형으로 나있는 그곳을 성큼성큼 내려갔다.

“여기로 내려와 에지!”

그의 부름에 에지도 따라서 방문을 나섰다. 왠지 기분이 이상해서 뒤를 돌아보았다. 세렝게티 초원 한가운데에 있다가 온통 흰색인 그곳에 서있으니, 분명 확실히 이상했다.

공간 가운데 놓인 커다란 직사각형의 테이블 위에는 사진들과 종이 서류들이 불규칙적으로 흩어져있다. 에지는 제이슨이 보여주었던 자료들과 동일한 대부분을 그곳에서 발견했다.

“오웬이 그렇게 사라지고, 너 마저도 연락이 되지 않아서, 나도 너무 혼란스러웠던 거 같아. 이렇게 네가 그를 추적하고 있었을 줄은…… 오해해서 미안해. 로이.”

“사과는 오웬을 만나면 해. 아니지. 그 녀석이 우리한테 사과해야지! 누가 자기 보고 살려 달랬나? 혼자 영웅 짓은 다하고 있어.”

“오웬은……”

“뭘 좀 마실래?”

에지의 말에 로이가 화제를 돌렸다. 에지도 더 이상 그것에 대해 말하고 싶진 않았다.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을 논의할 순간이다. 사건의 본질에 집중할 시간. 근본적인 사건의 원인을 풀어내야 했다.

에지가 고개를 들어 끄덕였다. 로이 너머 창가에 놓인 로벨리아 화분이 그 순간 에지의 눈에 들어왔다. 에지의 시선이 화분에 한동안 머물렀다. 그것을 본 로이가 말했다.

“아. 저거. 예쁘지? 오늘 선물로 받은 거야.”

에지는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리고 어깨를 쓸어내렸다. 그것을 본 로이가 말했다.

“여긴 탄자니아가 아니니, 그렇게 젖은 머리에 가운 하나만 걸치고 있으면 감기 걸리겠다. 잠깐 기다려. 금방 다녀올게.”

로이는 잠시 망설이다 에지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귀에 대고 말했다.

“난 오웬처럼 네 눈앞에서 갑자기 사라지진 않을 테니, 그렇게 불안한 표정은 보이지 말아 줘.”

로이가 마실 것을 가지러 사라진 자리에 화분이 더 선명하게 에지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에지는 파란색 꽃잎을 바라보았다. 만개한 꽃잎들이 그녀를 똑바로 주시하는 듯했다. 순간 섬뜩함이 들었다.

‘아…… 저 꽃을 분명 어디서 봤는데…… 뭐지? 왜 이렇게 뭔가 불안한 거지.’

 

 

카일이 밀폐된 방안에 들어서자 제이슨이 불안한 듯 의자에서 일어섰다. 그 모습에 카일은 손목을 위아래로 흔들어 보였다. 두 남자가 마주 보고 자리에 착석했다.

“23기 훈련생. 코드네임 제이슨. 훈련이 곧 끝나가는데, 고작 3일 앞두고 새벽에 이탈을 했다?”

“…”

“그것도 보안 지역에 잠입해서, 뭔가를 훔치려 했고……”

“훔친 게 아닙니다. 이미 말씀드렸듯이 벽 너머에서 소리가 들려서……”

“벽 앞에서 마주친 남자의 얼굴을 확실히 보았나?”

제이슨은 고개를 끄덕였다. 카일은 스피커 폰으로 방문 너머에서 그들을 지켜보던 여자에게 말했다.

“잠깐 자리 좀 비켜줘! 5분이면 충분해. 내가 따로 보고 할게.”

“선배, 카메라는 끄시면 안 돼요.”

여자가 사라지자, 카일은 기다렸다는 듯이 녹화되는 카메라의 전원을 껐다.

“어이쿠. 실수로 카메라가 꺼졌네.”

능청스러운 그의 행동에 제이슨은 긴장을 했다.

“지금 이 공간에는 너! 그리고 나, 우리 둘 밖에 없어. 실수로 카메라도 꺼졌고 말이지. 너처럼 특별한 청력을 가지고 있지 않는 이상, 우리가 지금부터 여기서 나누는 대화는 너와 나, 우리 둘만 아는 거야.”

카일의 눈 빛이 범상치 않게 변했다. 제이슨은 더 긴장이 된 얼굴로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어제 본 남자가 이 자 인가?”

카일이 사진 한 장을 품에서 꺼내 제이슨에게 보여주었다. 분명 오늘 새벽, 제이슨 앞에서 피를 흘리고 서있던 남자와 동일한 인물이었다. 제이슨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카일은 이내 좀 전에 여자로부터 받은 지퍼백을 꺼내 사진 옆에 두었다.

“어제 이 자가 흘리고 간 물건이야. 당연히 너는 이게 뭔지 모를 테지만……”

“중요한 물건인 건 알겠어요.”

제이슨이 빠르게 대답했다. 카일이 그런 그의 눈 빛을 바라보며, 다시 말을 이어갔다.

“맞아. 아주 중요한 물건이지. 이건 트래블러들을 단속하기 위해 만들어진 안티텔레프라고 해. 활성화가 되면 일시적으로 트래블을 막을 수 있어. 정식 요원이 되어도 레벨에 따라 지급되는 품목이라 다룰 수 있는 사람은 한정적이야.”

“그럼 어제 제가 본 그 남자도 레벨이 높은 요원인가요?”

제이슨의 물음에 카일이 잠시 뜸을 들였다.

“146”

“네?”

“오늘 새벽에 사라진 안티텔레프의 개수야. 이건 그중 하나고.”

카일이 지퍼백에 든 피 묻은 안티텔레프를 내려다보았다.

 

 

“카일.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가 갑자기 생각났어요.”

제이슨은 어두운 거실 천장을 올려다보며 실소를 흘렸다.

“그때, 카리스마 엄청났었는데…… 저는 정식 요원 명단에 이름이 누락될까 전전긍긍했던 애송이였고요. 결국 그날 이후 원하던 요원이 되지 못하고 다음날 퇴출당하는 절 보고, 제 룸메이트가 엄청 울었거든요.”

“그 친구는 명단에 들었나?”

카일이 여전히 등을 돌린 채 눈을 감고 말했다.

“아니요. 일 년 뒤에 길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푸드 트럭하고 있더라고요. 그 친구가 다른 건 몰라도 요리에는 소질이 있었거든요.”

“자기 적성에 맞는 걸, 잘 찾아갔네.”

“그러게요.”

“넌? 내가 적성에 맞는걸 잘 찾아 준거 같긴 한데……”

“하하. 카일은 구세주시죠. 근데 그때 왜 저한테 그런 제안을 하신 거죠? 절 뭘 믿고요? 제가 거절할 수도 있었을 텐데……”

카일이 소파 바깥쪽으로 몸을 돌아 누었다. 천천히 감았던 눈을 뗐다.

“내 불면증을 치료해 줄거라 생각했지.”

 

 

“아직 별을 보기엔 일러. 달이 너무 밝아.”

사하라 사막 모래 언덕 위에 몸을 뉘어,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제이슨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자신이 누워있던 곳보다 더 높은 언덕 위에 누군가가 다리를 꼬고 누워있는 듯 보였다. 맨발로 모래 언덕을 밟고 낯선 이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여긴 보이는 것보다 멀어. 어느 세월에 걸어올 건가.”

또다시 그 낯선 이의 음성이 들려왔다. 제이슨이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다리를 꼬고 누워있던 남자는 천천히 다리를 풀고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제이슨은 눈을 찌푸려 남자를 보았다. 그의 시력은 청력만큼 특출하진 못했다.

“2달 전에 봤을 때 보다 살이 더 빠졌구만. 사막에서 먹는 밥이 입맛에 잘 안 맞았나?”

“카일?”

제이슨은 그제야 카일의 굵고 낮은 목소리를 알아차렸다. 카일이 있는 곳 가까이로 잽싸게 이동했다.

“멀리서 보니까, 비실대면서 올라오는 게 난 또 트래블을 까먹었나 했네.”

“정말 2달 뒤에 다시 저를 찾아왔네요!”

2달 전 밀폐된 공간에 그들이 처음 마주한 날, 정확히 5분이 지난 뒤에 카일의 여자 후배가 되돌아왔다. 카일은 꺼트린 카메라 때문에 후배의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제이슨과의 몸싸움을 벌이던 그는 방안을 나서며 큰소리로 그에게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카일의 과한 행동은 짜여진 각본이었을 뿐이다. 여자가 방 안으로 돌아오기 전 카일은 제이슨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그의 시나리오대로 라면 제이슨은 원하는 정식 요원이 되지 못할 것이다. 자신이 이 방을 나가는 순간 제이슨은 정식 요원 명단에 누락이 되고, 징계위원회가 열린다. 지난 사건을 몇 차례 되새겨야 할 것이고, 결국 그의 잘못을 추궁한 뒤, 퇴출당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24시간 안에 이뤄질 것이다. 제이슨의 기록은 영구적으로 남아 다시 정식 요원이 되기 위한 길은 영원히 막혀버린다. 그는 이제 평범한 트래블러의 삶을 살게 되는 거다. 비 트래블러들의 무리에 섞여, 그들과 동화되어 사는 것이다. 원한다면 트래블을 할 수 있지만 본부의 관리를 받게 될 것이다.

그런 삶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히든 요원이 되어 카일과 함께 사건에 중심으로 들어갈 것인가.

“당신 말대로 그날 방에서부터 퇴출당하기까지, 24시간이 걸리지 않더라고요.”

“그럼, 매뉴얼이 아주 정확하게 따악 딱, 아주 빈틈없는 놈들이야.”

“여긴 어떻게 알고 오신 거예요?”

“네 룸메이트가 방을 정리하다가 네가 남기고 간 물건들을 전해주더라고.”

카일은 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전원을 켜니, 액정화면에 사막의 밤하늘에 별을 담은 사진이 나타났다.

“이 한 장의 사진으로 여길 찾아온 게 더 용한데요?”

“네가 놀라운 청력을 가진 만큼 나도 출중한 공간지각 능력을 가졌다고나 할까.”

카일이 너스레를 떨며 두 팔을 휘휘 저어 보였다. 제이슨의 룸메이트로부터 모로코와 알제리, 국경지대의 사하라 사막에 대해 평소에 제이슨이 자주 언급했었다고 전해 들은 얘기는 따로 하지 않았다. 카일의 행동에 제이슨이 웃어 보였다. 그 모습에 카일은 흐뭇한 미소를 보였다. 그가 들고 있던 제이슨의 핸드폰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며 물었다.

“좋아 보이네. 그래, 2달간 내가 제안한 것은 잘 생각해 보았나?”

제이슨은 고개를 젖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달빛이 가려지자 밤하늘의 별천지가 펼쳐졌다. 그를 따라 카일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수많은 별들이 빼곡하게 빛나고 있다. 

“물론이에요. 아주 충분히 생각했죠. 여기 이 밤하늘, 별의 개수만큼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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