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살리아 Nov 17. 2019

카르멘

 밤의 프라하는 더욱 아름답다. 소소한 골목길을 누비며 강가로 나가면, 강 너머 프라하 성의 노란 불빛이 어둠 속에서 신비로운 보물처럼 반짝인다. 보랏빛 밤하늘과 완벽한 대조를 이룬다. 한낮에는 절대 볼 수 없는 색감이다. 사실 강 너머의 야경을 감상하는 것보다 더 운치 있는 것은 밤의 까를교를 걷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프라하성에 매료되어 등지고 있는 곳에, 연둣빛 비경이 숨어있다. 오웬과 에지가 까를교 위에 함께 있었다. 모두가 프라하성을 바라보고 걷는 다리 위에서 그들은 반대방향으로 걷고 있었다.

“춥지 않아?”

“아니. 따뜻해.”

“응?”

“자기 손. 너무 따뜻해.”

에지의 말에 오웬은 미소를 보이며,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을 자신의 코트 주머니 속에 넣었다. 그런 오웬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던 에지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까 낮에 바츨라프 광장에서 봤던 길거리 공연 있잖아.”

“맨발에 탱고?”

“응. 그 많은 사람들이 구경하는 광장에서 몰입하면서 맨발로 추는 모습, 너무 멋있었어. 마치 그 공간에 자신과 자신 앞에 서있던 파트너만 있었다는 듯이……”

“두 남녀, 분명 연인 사이지 않았을까?”

“글쎄. 그 순간만큼은 서로 사랑하는 사이처럼 춤을 췄던 거 같긴 해.”

에지의 대답에 오웬이 손바닥을 펴 에지 앞에 내밀며 물었다.

“Shall we dance?”

(우리 춤출까요?)

에지는 주변을 한 번 둘러보고는 오웬의 손위에 자신의 손을 살며시 올렸다. 그가 그녀의 손을 잡고 자신 쪽으로 바짝 잡아당겼다. 가까이 얼굴을 맞댄 두 남녀의 팔이 자연스럽게 서로의 얼굴을 감쌌다. 에지가 웃으며 말했다.

“아까보다 더 따뜻해졌어.”

오웬의 한쪽 팔이 에지의 허리를 감싸 안아 부드럽게 들어 올렸다. 에지의 들린 두발이 살포시 오웬의 발 위에 안착했다. 두 사람은 뒤뚱거리며 발을 맞추었다. 발뿐만 아니라, 서로의 눈을 맞추며 카를교 위를 걸었다. 에지의 웃음소리가 오웬의 귀에 선명하게 들려왔다.

“어? 오웬, 저기 가보자!”

에지가 오웬의 발 위에서 내려와 그곳에 있던 한 동상 앞으로 다가갔다. 오웬은 그녀의 웃음소리가 사라진 공간에 아쉬움을 느꼈다. 동상 앞에 서있던 그녀를 뒤에서 감싸 안았다. 에지의 옆머리에 입맞춤하며 그의 아쉬움을 대신했다.

“저기 봐봐, 오웬. 사람들이 하도 만져서 저기만 금빛이야!”

에지의 한 손은 자신을 감싸 안은 오웬의 팔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 동상 왼쪽 아래의 한 부분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갑옷을 입은 기사와 그 앞에서 무릎을 굽히고 기사를 바라보고 있는 충견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었다. 다른 조각상은 녹이 쓴 듯한 고철덩어리로 보였으나 충견의 모습만큼은 금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나도 너를 계속 만져서 금빛으로 빛나게 해 줄게!”

오웬이 에지의 머리와 어깨를 장난스럽게 쓰다듬었다.

“이 동상 유명한 건가?”

에지의 물음에 그제야 오웬이 장난을 멈추고 동상을 제대로 보았다.

“얀네포무츠키 동상이네. 저기 매끄러운 부분을 만지면 소원이 이뤄진다는 말이 있어. 근데, 그 소원은 평생 딱 한 번만 빌 수 있어.”

오웬이 에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진짜? 에이, 그럼 난 다음에 와서 소원 빌어야겠다.”

“…”

“근데 오웬, 저 동상은 십자가를 품고 있네. 신부였나 봐?”

“응. 당시의 왕비가 이 사람한테 고백성사를 봤었어. 왕은 왕비의 비밀을 알고 싶어서 이 사람을 불러다가 물었다는 거야. 근데 그는 끝까지 왕비의 비밀을 지켰지.”

“그래서?”

“결국 왕의 손에 죽임을 당했지. 죽음 앞에서도 왕비의 비밀을 지킨 거야.”

“얀네포무츠키…… 혹시 왕비를 사랑했던 걸까?”

오웬은 대답 대신 에지를 더 꽉 안았다. 프라하 까를교 위의 강바람이 세차게 불어왔다. 다리 위를 걸어가는 많은 사람들이 불어오는 바람에 몸을 잔뜩 웅크리고 지나갔다.

“그만 방으로 돌아갈까?”

오웬의 말에 에지가 동상에 시선을 고정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인파 속에서 두 남녀가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아침에 산책하다가 예뻐서 샀어. 10시 전에 돌아올게. -오웬’

침대 옆에 푸른 잎의 화사한 꽃이 놓여있었다. 막 잠에서 깬 에지는 오웬이 남긴 메모를 보고 미소 지었다. 아침잠이 많은 에지는 늘 비슷한 패턴대로 오웬의 공백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가 돌아오기까지 고작 20분이 남아 있었다. 에지는 그가 오기 전에 이 예쁜 꽃을 꽃병에 꽂아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침구를 정리하고 꽃을 들고 방을 나섰다.

“dobré ráno”

(안녕하세요.)

에지는 옆방에서 나오던 백발의 할머니에게 아침인사를 했다. 간단한 인사말은 늘 현지의 언어로 얘길 나누는 오웬으로부터 배웠다. 에지의 인사에 그녀가 반갑게 대답했다.

“굿모닝! 꽃이 예쁘네!”

“선물 받았어요. 예쁘죠?”

“로벨리아.”

“로벨리아?”

“그 꽃 이름이야.”

“아하. 로벨리아. 이름도 예쁘네요!”

“예쁜 꽃이지. 그렇지만 꽃말은 불신, 원망, 위기의 시작을 의미해.”

“정말요?”

“물론, 선물 준 사람은 사랑스러운 당신한테 모르고 줬겠지.”

에지는 그녀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백발의 할머니로부터 전해 들은 얘기를 오웬이 돌아오면 들려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날 일은 그녀에게는 별로 중요치 않은 해프닝일 뿐이다. 그러나 에지는 오웬에게 말하지 못했다. 그 일을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다.

 

 

“오늘이 널 보러 오는 마지막일 거야. 에지가 싫어하니까, 이제 미래로 와보는 건 그만 하려고.”

오웬은 자연스럽게 프레임 위에 진열되어있는 위스키 한 병을 집어 들었다.

“뭐야? 그 표정은?”

과거에서 온 오웬을 거실에서 맞닥 드린 로이는 당황했다. 순간 오늘 날짜를 머릿속으로 되새겼다.  

‘내가 방금 2019년도 11월 17일에 다녀오는 길이야. 그게 마지막으로 미래의 널 본 날이야.’

로이는 5년 전 오웬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때 오웬은 미래의 로이를 보고 왔다는 얘길 했었다. 그리고 오늘이 11월 17일, 바로 그날이다. 오웬의 말대로라면 이제 과거의 그를 만날 수 있는 기회는 지금이 마지막이다.

“수건은 왜 들고 있어?”

오웬이 물었다. 수건과 따뜻한 차를 에지에게 가져가던 중이었던 로이는 불안하게 맞은편 방 문을 보았다. 그의 어색한 행동에 오웬의 시선도 함께 움직였다.

“방에 누가 와있어?”

“어? 아……아니, 아니. 샤워하고 나오는 중이야. 방금. 내가.”

로이는 들고 있던 수건으로 자신의 머리 위에 비벼댔다. 그리고는 차를 앞으로 한 번 들어 보인 뒤, 입에 가져갔다.

“요즘 샤워하고 나서 마시는 보이차가 그렇게 좋더라고.”

“뭐야. 그새 취향이 바뀌었어? 무슨 야밤에 보이차야. 이리 와서 같이 술이나 한 잔 하자. 이별 주는 마셔야지.”

소파에 앉는 오웬을 보고 로이는 불안한 듯 다시 에지가 있던 방문을 힐끔 보았다. 그녀가 거실 밖으로 나오지 않길 바라며, 오웬 옆으로 가서 앉았다.

“뭐지. 뭔가 좀 수상한데?”

“뭔 소리야. 술이나 쳐마시고 빨리 네 시간대로 돌아가.”

“오늘 보니까 너 좀 늙은 거 같다. 살도 빠진 거 같고. 핼쑥한데 아주, 지금!”

로이는 오웬이 따른 술잔에 든 술을 빠르게 마셨다. 그의 속도에 술병에 든 술은 빠르게 줄어들어갔다. 그는 벽에 걸린 시계를 봤다. 에지를 방 안에 혼자 너무 오래 둔 건 아닌가 불안해져 갔다.

‘오웬. 오랜만이다. 내 눈 앞에 있는 넌 아닐 테지만, 난 4년 만에 널 보는 거야. 보고 싶었다.’

로이는 옆에 앉은 오웬을 곁눈질했다. 로이의 침울한 표정은 숨겨지지 않았다. 그걸 느낀 오웬은 모르는 척, 마지막 술잔을 채웠다. 미래에 관여하지 않는 것이 모두를 위한 것임을 잘 아는 그다.

“아. 이것만 마시고 그만 가봐야겠다. 이제 안 온다!”

오웬은 위스키 한 병에 남은 술을 자신의 잔에 털었다. 그들이 소파에 앉고 나서, 시계의 분침이 반 바퀴를 돌고 있었다.

“이별의 막 잔 가자! 친구야!”

오웬이 잔을 높이 들었다. 로이는 굳은 표정으로 잔을 들어 부딪혔다. 목구멍으로 마지막을 털어 넣는 오웬을 지켜보던 로이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마지막 아니야. 오웬.”

“응?”

“오늘이 마지막이 아니야.”

“무슨 소리야?”

로이는 에지가 있는 방문을 한 번 다시 쳐다본 뒤, 오웬에게 고개를 돌려 말했다. 목구멍까지 넘어온 그 말을 애써 참고 있었으나, 마지막으로 넘어가던 위스키 한 잔이 그의 절제력을 무너뜨렸다.

“넌 다시 미래를 보고 올 거야. 끔찍한 걸 목격하게 될 거야.”

 

 

크로아티아 항구도시, 스플리트의 남단에 위치한 브라츠 섬에는 놀라운 해변이 있다. 바다를 향해 삐죽하게 튀어나온 해변의 형상은 고깔을 뒤집어 놓은 모양을 닮았다. 해변의 끝을 기준으로 왼쪽 모래사장과 오른쪽 모래사장의 날씨가 다른 것이 신비로운 해변이다. 꼭짓점에 해당하는 부분의 모래사장에는 얕은 둔덕이 있다. 움푹 들어간 부분에 등을 대고 바다를 향해 누우면 부드러운 모래사장은 자연이 주는 베개가 되고, 따뜻한 태양은 이불이 되어 포근하게 몸을 감싸주며, 아드리아 해안의 짙은 푸른 빛깔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작가 미상의 경이로운 미술작품으로 다가온다.

잔잔한 파도소리가 평화롭게 들리던 그곳에서 한 남자가 쓰러져 있었다. 둔덕 밑에서 몸이 가려진 채 가로로 누워 있어, 남자의 두 다리만이 멀리서 겨우 보였다.

“이봐요? 괜찮으세요?”

쌍둥이 두 아이와 한가롭게 태닝을 즐기고 있던 젊은 여자가 걱정 어린 눈빛을 하고는 쓰러져 있는 남자에게 다가가 물었다. 남자를 발견한 건 그녀의 어린 두 딸아이였다. 그녀의 다섯 살 배기 어린아이들은 바닷물에 발을 담고 놀다가 남자를 보았다. 누워있던 남자의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는 엄마에게 달려가 남자의 존재를 알렸다.

“이봐요! 정신 차려봐요!”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남자를 흔들어 깨웠다. 감겼던 남자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눈부신 태양빛 아래로 생김새가 똑같은 쌍둥이 여자 아이들의 얼굴이 들어왔다. 그리고 아이들의 옆에 자신을 불러 깨운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의 걱정스러운 눈빛은 남자의 눈 맞춤으로 안도에 눈빛으로 변해갔다. 태양 빛에 남자의 갈색 눈동자가 선명하게 빛났다.

“내 목소리가 들리나요? 정신이 드세요?”

“오늘이……”

남자가 입을 꼼지락거리자 여자는 남자의 입술 근처로 자신의 귀를 바짝 가져갔다. 희미한 남자의 육성이 그녀의 귓구멍을 타고 들려왔다.

“오늘이 며칠입니까?”

“언제부터 여기에 쓰러져 있었던 거죠? 오늘은 5월 9일이에요. 일어날 수 있겠어요?”

“아……지금이 몇 년도인가요?”

“네? 당연히 1988년이죠.”

쓰러져있던 남자의 물음에 여자는 당황했다. 남자가 다시 여자에게 무언가를 말하려고 입술을 실룩거리자 여자가 다시 귀를 기울였다.

“에지……”

남자의 눈 커플이 다시 서서히 내려와 감겼다. 주먹을 쥐고 있던 그의 손이 풀리자 손톱만 한 정육각형의 큐브가 모래사장 위로 떨어졌다.

 

 

“카일?”

“응.”

“궁금한 게 하나 있어요.”

“…”

“오웬은 왜…… 145개의 안티텔레프를 훔친 걸까요?”

카일은 제이슨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대답 대신 다시 소파 안쪽으로 돌아누웠다. 팔을 괴고는 이내 눈을 감는다. 제이슨도 다시 눈을 감았다. 그날 처음 올려다본 후드를 뒤집어쓴 오웬의 모습이 보였다. 그때 붙잡아 두지 못한 그를 이렇게라도 잡아보고 싶었다. 그의 갈색 눈을 마주한 채 제이슨이 다시 말했다.

“정말 줄리의 죽음에 쓰였던 걸까요?”

 

 

“안녕하세요? 오페라를 좋아하시나 봐요?”

“네?”

“지난주에도 이 공연을 보셨죠?”

블라디보스톡의 마린스키 극장, 오페라 카르멘 공연의 3막이 방금 끝이 났다. 로이는 3층 로비의 난간에 기대서서 1층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옆으로 한 여자가 말을 걸어왔다. 큰 키에 타이트한 빨간색 원피스를 입고 있다. 굵은 웨이브에 금발의 긴 머리는 왼쪽으로 가르마를 타, 왼쪽 귀로 넘겨져 있다. 볼륨 있는 몸매에 긴 다리가 짧은 치마 아래로 곧게 뻗어 있고, 화려한 메이크업과는 상반되게 검은색 하이힐의 디자인은 심플했다.

“참 매력적이죠?”

“네. 그러네요.”

여자의 물음에 로이가 그녀를 바라보며, 무미건조하게 대답했다.

“열정적인 집시 여인, 카르멘 말이에요. 호세가 반할만한 매력적인 여자 같아요. 결국 그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비극의 여주인공이지만, 야성적인 아름다움. 함부로 가질 수 없는 아름다움을 그녀가 가졌던 거 같아요.”

“야성적인 아름다움이라……”

“마지막에 호세가 카르멘에게 에스카밀로를 정말 사랑하느냐고 묻잖아요. 매정하게 그를 죽도록 사랑한다고 소리치는 그녀의 마음이, 진심이었을까요?”

“글쎄요. 그녀의 진심이 무엇이었든 간에, 결국 그녀가 선택한 길이겠지요.”

“그래요. 그녀는 자신의 죽음도 선택했죠.”

“Envain pour eviter”

(도망쳐 봐야 아무 소용없지)

로이는 3막에서 카르멘이 자신의 종말을 예고하며 부르는 아리아의 곡명을 내뱉었다.

“맞아요. 그녀의 죽음을 암시하는 것들이 복선처럼 몇 차례 나오죠. 그녀의 죽음을 예고했던 트럼프 카드, 스페이드 에이스! 어쩌면 카르멘은 자신의 죽음 또한 미리 예상하고 있었을 거예요.”

“…”

“자신의 마지막을 알고 있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요?”

“그건……”

로이가 입을 떼려던 순간, 인터미션이 끝나고 곧 4막이 시작된다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로비에 모여있던 사람들이 다시 공연장 안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의 움직임에 여자가 먼저 난간에 기댄 몸을 돌려 공연장 입구로 향했다. 로이도 그녀를 따라 몸을 세웠다. 앞서 걷던 여자가 뒤따르던 로이를 향해 눈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결과를 알더라도 마지막 앤딩은 즐겨야죠.”

이전 09화 돌고래 훈련생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