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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살리아 Nov 17. 2019

펜트하우스

 은색 종 모양의 스탠드 조명에 불을 켰다. 창문 없는 실내가 은은한 불빛에 모습을 드러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조명을 껐을 때와 별반 다를 것이 없다. 단지 그곳에 있는 색을 품은 형체라고는 그 종 모양의 스탠드뿐이라는 것을 증명해 줄 뿐. 완벽한 백색 지대에서 이불을 젖히고 맨발의 사내가 침대에서 걸어 나온다. 헝클어진 머리, 짙은 눈썹 아래로 눈은 부어 있다. 오뚝한 콧날 밑, 듬성듬성 자란 수염은 다소 그를 형편없어 보이게 위장해 주는 듯하다. 그을린 피부, 날렵한 턱 선, 그리고 단단한 넓은 어깨 선이 구겨진 흰색 셔츠에 가려져있다.

 두 개의 방 문이 그곳에 나란히 있다. 온통 흰색 칠을 해둔 터라 벽 한 켠에 방 문이 있는지 알아차리기 조차 쉽지 않아 보인다. 맨발의 사내는 왼손으로 허리 뒤쪽을 긁적이며, 오른쪽 방문을 열었다. 새하얀 계단실이 원형 아래로 나있다. 계단을 타고 그의 발길이 이어졌다. 아래로 내려올수록 계단실 밑이 조금씩 드러났다.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꽤나 넓은 공간이다.

 마지막 계단에 발을 디뎠을 때, 계단 하단의 벽이 앞쪽으로 튀어나왔다. 그곳에는 오색찬란한 운동화가 빼곡히 들어있다. 새하얀 실내와 완연하게 대비가 된다. 튀어나온 수납공간으로 발을 디딜 수 없게 된 그는 발아래 운동화들을 바라보며 살짝 점프를 뛰었다. 앞으로 걸아 가다 다시 뒤를 돌아보며 튀어나온 수납장을 긴 다리를 쭉 뻗어 다시 제자리로 밀어 넣는다.

 움직임이 감지된 계단실 아래의 공간에 순차적으로 실내조명이 들어온다. 높은 천장, 흰색의 대리석 바닥 위를 성큼성큼 걸어간다. 그의 오른편에는 바닥부터 천장까지 뻗어 있는 통유리가 있다. 유리창 사이 천장에서 4분의 1 지점에 짜여있는 프레임 위로 세계 각국의 술들이 진열되어 있다. 사람 손이 닿지 않는 높이의 그 술들은 빈 술병인지, 아직 병뚜껑도 따지 않는 술병들인지 확인할 길이 없어 보인다.

5분 뒤, 동시에 조명이 꺼지고 사내는 다시 걸어 내려왔던 원형의 계단실을 성큼성큼 올라가기 시작했다. 꽤나 많은 계단이다. 얼마나 높은 곳에서 내려온 것인지 한 참을 계단을 올라야만 했다. 다시 똑같은 방문을 열었다. 백색 지대와 고요함이 여전히 그곳에 있다.

 방문 앞에 서있던 그의 손에는 보드카가 들려있었다. 한 모금 들이키고 그는 침대 속으로 다시금 몸을 뉘었다. 그의 오른팔은 뒤로 젖혀 머리를 받치고 있다. 더 이상 잠을 청하지 않을 기색이다. 그의 상체 반을 덮고 있던 이불 밑에서 미세한 움직임이 이렀다. 잠시 뒤 부드러운 손길이 올라와 그를 이불 안으로 잡아당겼다.

 그의 심장 가까이에 가벼운 압력이 가해졌다. 고개를 아래로 숙여 콧구멍을 실룩거린다. 민트향이다. 등 뒤로 척추 골, 움푹 들어간 부분에서 그의 왼쪽 손이 천천히 위아래로 움직였다. 세 번째와 네 번째 손가락이 건반을 누르듯 리듬을 탔다. 완전한 나체의 여자는 남자가 만들어내는 리듬에 따라 움찔거린다. 안대에 가려진 그녀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그를 이불속으로 이끈 손은 어느새 남자의 바지 속 엉덩이를 타고 단단한 치골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간다. 그녀의 정수리에 파묻혔던 그의 얼굴이 들어 올려졌다. 이내 그의 짙은 눈썹이 비대칭으로 찡그려졌다. 나지막한 그의 목소리에 미끄러지던 여자의 손길이 멈추었다.

“돌아갈 시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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