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 생활에는 어려운 점이 하나 둘이 아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힘든 것은 바로 의지할 곳이 없다는 것이다. 나의 경우에는 정확히 말하자면 의지할 곳이 남편밖에 없다. 아직 정해진 생활반경도 일상을 공유하는 친한 친구나 이웃도 없다보니 무슨 일이 생기거나 해도 연락할만한 사람은 남편 하나 뿐이다. 시부모님과 시누네는 비행기로 두 시간 거리, 가장 가까운 친척은 차로 1시간 거리이다. 그나마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남편이 해결해 주겠지만 남편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나 혼자 어찌해야 할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이런 사실을 새삼 깨달은 것은 뉴욕에 혼자 차를 몰고 갔다가 핸드폰이 고장나는 바람에 네비도 없고 연락 수단도 없이 1시간 반 거리를 4시간을 헤매다가 겨우 집에 돌아온 사건이 있고 나서였다. 미국 시골이라 길도 어둡고 거리에 사람도 없고 가게도 별로 없는 길을 헤매다 편의점을 찾아 들어가 묻고 또 물어 집에 돌아왔을 때의 그 멘붕 상황은 정말 평생 기억에 남을 만큼 무서웠다.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는데, 내가 이 넓은 땅에서 없어져도 나를 찾을 사람은 남편밖에 없을 거라는 생각에 정말 정신차리고 몸을 사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유일한 의지처인 남편과의 갈등은 나의 멘탈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 최대 리스크다. 이 넓은 땅에서, 내 존재를 아는 이도 거의 없고 내 인생의 흔적이 거의 형성되어 있지 않은 이 땅에서 그나마 하나밖에 없는 내 편이 내 편을 들어주지 않을 때, 사소한 것이라도 정말 외로움의 끝을 경험하게 된다. '내가 왜 여기에 있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서로가 그 어려움을 잘 알기에 사사로운 다툼 외에 큰 갈등은 별로 없고 금방 푸는 편이다. 국제결혼이라 하면 흔히 문화 차이를 먼저 떠올리겠지만 사실 그런 것은 둘 다 서로의 언어와 문화에 개방적인 편이라 오히려 초기에 극복한 것 같고 대부분의 갈등은 성격차이 때문이다. 그런데 성격차이 성향차이 또한 서로 이해하고 넘어가면 그만인데 나의 경우 정말로 답답한 것은 부부가 '객관적인 사실을 놓고 다른 인식을 할 때'이다.
객관적인 사실을 놓고 다른 인식을 할 때
말 해 놓고 보니 거창하지만 사실은 정말 사소한 것들이다. 예를 들면 같은 색을 보면서 나는 회색이라고 하고 남편은 까만색이라고 하는 식이다. 정말 별 거 아니지만 그 빈도가 높고 반복적으로 발생하다 보면 정말 말이 안 통해 답답해 미쳐 버리는 상황이 발생한다. 게다가 우리 남편은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건망증이 제일 심한 사람이다. 우리 엄마는 물론 웬만한 노인 저리가라일 정도다... 본인이 한 얘기를 금세 잊어버리는 것은 물론 본인이 안 한 얘기도 했다고 기억하는 사람이다. 아니, 식탁에 참기름, 깨소금이 놓여 있는데도 비빔밥에 고추장만 넣어 비비고는 '아차' 하는 사람이다. 반면, 나는 어릴 때부터 기억력이 좋은 편이다. 그런데 남편은 내가 기억력이 더 좋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본인이 말했는데 내가 기억 못할 수도 있지 않냐고 항변한다. 나는 이틀 전에 누가 뭘 말했는데 그 내용은 고사하고 말했다는 사실조차 기억 못하는 사람이 아니지만, 대화를 다 녹음해 두는 것도 아니고 답답하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다. 정말 이럴 때는 상대방의 뇌구조가 궁금해진다. 그리고 어떻게 이런 것까지 다른 사람과 같이 살게 됐는지 새삼 신기한 생각이 든다. 거기서 끝나면 다행이지만 감성적인 날에는 답답함과 더불어 좌절감도 밀려온다. 외국에 있으니 외로움까지 덤이다.
문제는 이런 것은 딱히 누가 잘못한 것도 아니고 해결 방법도 없다는 점이다. 그저 속으로 '참을 인'자를 외치며 상대방이 내가 아님을 다시 한 번 되새김질하는 수밖에 없다. 서로의 뇌구조를 들여다볼 수도, 눈알을 바꿔서 볼수도, 코를 바꿔서 냄새를 맡아볼 수도 없는 노릇이니. 부부는 한몸이 아니다. 내 몸이 아니니 그의 몸으로 보고 느끼는 것이 틀렸다고 할 근거는 없는 걸 잘 안다. 다만 초능력이 생긴다면 다른 사람의 뉴런을 체험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