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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맑음 Sep 26. 2022

4. 무적의 처세술


  수돗물이 세차게 콸콸콸 쏟아졌다. 슬아는 갑자기 머릿속이 텅 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같은 반인데도 오늘에서야 처음 본 얼굴들이었다. 아직 이름도 모르고, 인사를 한 적도 없는 사이였다. 그래도 매주 도서관에서 만나다 보면 자연스레 친해질 수 있겠지, 혼자 청소를 하며 희망적인 생각을 품었던 슬아였다. 그런데 그 아이들이 공식 지정 기피 대상인 왕따들이라니. 

  슬아는 아이들이란 존재가 얼마나 잔인할 수 있는지 지난 5년간 숱하게 봐왔다. 아이들은 인기 있는 아이가 싫어한다는 이유만으로 특정 아이를 배척하고 따돌렸다. 공부를 잘하거나, 집안이 좋거나, 예쁘고 잘생긴 친구들은 선망의 대상처럼 여기며 추앙했다. 반대로 공부를 못 하는 아이들은 무시당하기 일쑤였고, 지저분하거나 지나치게 뚱뚱한 아이는 놀림과 비아냥의 대상이 됐다. 왕따가 되면 삽시간에 전교에 소문이 퍼졌고, 학년이 올라가도 왕따 꼬리표는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왕따에겐 말을 걸지 말라’는 게 불문율이었으며 왕따와 친하게 지내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 없었다.

  악의에 찬 모욕과 공격을 받으며 점점 침울해져 가는 아이들을 보면서 슬아는 잔인한 공포를 느꼈다. ‘만약 내가 아이들의 미움을 한 몸에 받는다면...’ 상상만으로도 몸서리가 쳐졌다. 슬아는 친구들의 손가락질을 받는 아이들을 위해 발 벗고 나서진 못할지라도 덩달아 손가락질하진 않겠다고, 그것만큼은 절대로 지키겠다고 혼자 다짐하곤 했었다. 그런데 막상 왕따로 소문난 아이들과 매주 같은 공간에서 같은 활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두려운 마음이 앞섰다. 

  ‘너도 조심해. 괜히 걔네들이랑 어울렸다간 왕따 클럽 멤버로 찍힐지도 모르니까.’

  가윤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슬아는 암담했다. 가뜩이나 짙은 먹구름이 드리운 자기 인생에 천둥 번개가 내리치는 기분이었다. 

  슬아는 지금까지 친구 문제로 속앓이를 한 적은 있어도 왕따를 당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초등학교 입학 후 일련의 사건들을 거치며 나름의 처세술을 익힌 덕분이었다. 한 몸처럼 붙어 다니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거친 말을 내뱉고 패를 갈라 싸우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슬아는 아이들과 깊이 엮이지 않는 게 상책이라고 여겼다. 상대가 없는 틈을 타 험담을 하고 돌아다니는 아이, 앙갚음을 하겠다며 끈질기게 복수의 기회를 노리는 아이를 보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에너지가 소모되는 기분이었다.  

  슬아는 마음에 안 드는 친구가 있어도, 친구의 말과 행동으로 상처받았을 때도 기분 나쁜 내식을 하기 보다 자리를 피하는 방법을 택했다. 싸우고 마음이 불편한 것 보다 혼자 참고 삭히는 게 더 안전한 해결책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적을 만들지 않은 덕분인지 슬아는 지금껏 큰 싸움에 휘말린 적이 없었다.  

  1년 간 같이 청소를 하며 한마디도 하지 않을 수 있을까? 슬아는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어떤 아이들인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다른 아이의 말만 믿고 친구들을 멀리할 생각부터 한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슬아는 서둘러 걸레를 빨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네가 슬아지? 걸레까지 빨아오고. 정성을 다해줘서 고맙다!”

  사서 선생님이 걸레를 들고 들어서는 슬아에게 말을 건넸다. 

  “아... 걸레질만 하고 저도 얼른 끝낼게요.”

  “잠깐 이리 와봐. 자! 이건 열심히 한 선물!”

  선생님은 슬아에게 작은 젤리 봉지를 건넸다. 슬아는 선생님께 꾸벅 인사를 하고 허둥지둥 창고로 향했다. 

  “어디 갔다 이제 와?”

  창고 안에서 책을 읽고 있던 서준이 슬아를 보며 말했다.

  “네가 왜 여기 있어?”

  “선생님이 우리 반 윤독 독서 상자에 담아 가져가라고 하셔서. 이게 이번 달 책이라는데, 별로 재미없어 보인다. 윽.”

  서준이 읽던 책을 덮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청소 벌써 끝낸 거야? 다른 얘들은?”

  “내 구역은 생각보다 깨끗해서 일찍 끝났어. 다른 애들은 잘 모르겠는데? 각자 할 일 끝나면 알아서 가는 거니까. 청소 끝났다고 나한테 보고할 필요는 없어. 아무리 내가 우리 반에서나 회장이라도.”

  서준이 씩 웃으며 말했다.

  “저기...혹시 너도 알고 있어?”

  “뭘?”

  서준이 선반 아래서 쓸 만한 상자를 찾으며 되물었다.

  “우리랑 같이 청소하는 애들.”

  “서범이랑 한솔이랑 혜빈이?”

  “응.”

  “너도 아는구나? 걔네 유명한 거.”

  ‘왕따가 아니라 유명하다고?’

  슬아의 눈빛이 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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