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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준 Jun 29. 2019

6월 12일, 10일 차, 드레스덴

몸이 고생하는 드레스덴입니다.

침대에서 일어나기 싫습니다. 어제 숙소로 찾아오는 길에 고생한 걸 생각하니 가능한 침대에 오래 누워있고 싶습니다. 시계를 보니 아침 여덟 시입니다. 너무 일찍 일어났다고 불평하며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립니다. 제가 묵는 airbnb 방이 호스텔과 달리 아침을 제공하지도 않고, 적어도 1km  거리에는  아무것도 없는 주택가입니다. 어제 아침거리를 사 왔어야 했지만 정신이 없어서 준비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된 거 아침은 그냥 포기하고 잠이나 더 자기로 합니다.


오늘은 꼭 대충 돌아다니자고 다짐하면서 정오쯤에 숙소를 나섭니다. 근처에 버스정류소에 가보니 어제 그렇게 찾았던 티켓 발매기가 보입니다. 알고 보니 드레스덴의 트램, 버스는 같은 표를 공유하고 일회권을 끊으면 끊은 시점으로부터 한 시간 동안 유효합니다. 어제 버스를 타기 전에 트램에서 이미 뽑은 표가 있었기 때문에, 사실 버스에서 그 난리를 벌일 필요가 전혀 없었던 겁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니 머리가 괜히 지끈거립니다. 대중교통 시스템이 왜 이렇게 이상한지 한탄스럽기도 합니다. 어쨌든 오늘 하루 종일 쓸 수 있는 데일리 티켓을 6 유로를 주고 뽑습니다.


처음 방문할 곳은 드레스덴 파노라마 전시관입니다. 대부분의 볼거리가 드레스덴 중앙역 북쪽에 몰려있었기 때문에, 조금 외지에 있는 전시관을 먼저 들르기로 합니다. 네이버 블로그 등지에 거의 정보가 없는 걸 보고 괜히 또 남들 잘 찾아가지 않는 곳을 간다고 살짝 들뜹니다. 전시관은 돔 형태로 이루어져 있는데 입장료는 11.5 유로로 조금 비쌉니다. 사설 전시관이라서 조금 비싼 게 아닐까 생각하며 전시관으로 입장해봅니다.


돔 형태의 파라노마 전시관

전시관은 중앙 돔의 메인 전시관과 돔으로 들어가기까지 빙글빙글 돌면서 드레스덴 폭격이 있기까지의 역사를 설명하는 전시관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검은색 천으로 둘러싸인 외곽 전시관은 꼭 어두컴컴한 암실에 있는 느낌입니다. 외곽 전시관에서는 드레스덴의 짤막한 역사와 함께 나치가 드레스덴을 장악하는 과정, 그리고 드레스덴에 이어진 폭격에 대한 설명들이 나열되어 있습니다. 점점 절망을 향해서 다가간다고 암시하는 것인지 암실의 조명은 붉게, 그리고 어둡게 변해갑니다.


메인 돔으로 들어가는 통로는 점점 불안감을 더해갑니다.

점점 어두워지는 통로를 따라 드디어 중앙 커튼을 젖히니 강렬한 라이트와 함께 폭격 소리가 들려옵니다. 돔의 벽면에는 드레스덴 폭격 당시의 드레스덴의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강렬한 빛과 소리와 함께 돔 벽에 그려진 도시는 불에 타들어갔고 이곳저곳에서 폭격은 끊이지 않습니다. 돔 중앙에는 3층짜리 타워가 있는데, 타워에 올라가서 돔을 둘러보니 불에 타들어가는 도시가 더 생생하게 보입니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폭격은 드레스덴 폭격 당시 사람들이 느꼈을 공포감과 무력함을 실감케 합니다. 사방에서 쏟아지는 폭격이 실제 상황이었다면 저는 그 자리에 엎드린 채 공습이 끝날 때까지 부디 무사하기만을 빌었을 겁니다.


그런데 마음속 한편에선 작은 의문점이 응어리집니다. 드레스덴 폭격은 사실 경위를 따져 보면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가 다른 국가에 퍼부었던 폭격에 대한 보복일 것입니다. 폭격의 피해자들은 민간인들이 태반이지만 총력전 체제 아래서 나치의 전쟁에 직간접적으로 동조했던 당시 독일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였을지 생각해 봅니다. 이 폭격은 단순한 인과응보였을지, 무고한 민간인들까지 말려들어간 무차별 폭격이었을지, 아니면 대의명분을 모두 불살라버리는 순수한 공포와 폭력이었을지, 의미를 찾는 여러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뒤엉킵니다.


강렬한 붉은 조명 때문에 눈을 질끔 감을 수 밖에 없습니다.
돔이라서 그런지, 타워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너무나 현실감이 듭니다.

강렬한 경험 속에서 머릿속이 다소 복잡해진 채로 파노라마 전시관을 나섭니다. 두 시가 넘었지만 아직 오늘의 첫 끼조차 먹지 못했습니다. 원래는 파노라마 전시관으로 가는 길이나 파노라마 전시관 주위에서 점심을 먹을 생각이었지만, 전시관을 나올 때까지 밥을 먹을만한 곳을 찾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도심 외곽이라고 하지만 이렇게 편의 시설이 없을 줄은 생각도 못한 일입니다. 중앙역에 도착해서야 굶주린 배를 채우지만 스무 시간 정도 공복이었던 배가 음식물을 받아들이니 살짝 복통을 호소합니다. 앞으로 먹는 것은 신경 써서 잘 먹어야겠습니다.


오후 시간은 중앙역 북쪽의 도보를 돌면서 구경하기로 합니다. 중앙역을 나와서 크로이츠 교회로 가는 1km 남짓의 길은 대형 쇼핑 거리의 느낌입니다. 마침 휴대폰 내장 메모리를 거의 다 사용해가는 관계로 저장장치가 좀 급한 참입니다. 돌아다니면서 사진 찍고 영상도 찍다 보니 몇 기가바이트는 금세 사용해버립니다. 남은 용량으론 고작 몇 백장 찍으면 끝입니다. 저장공간의 부족으로 사진을 찍지 못하는 상황만큼은 꼭 피하고 싶습니다. 다행히 쇼핑센터 안에는 전자제품 전문점이 보입니다. SD카드를 구매하고 잘 동작하는 걸 확인하니 마음이 좀 놓입니다.


256기가 정도면 충분하겠죠?


크로이츠 교회에 도착해서는 주변을 구경하며 산책합니다. 베일 강을 옆에 두고 바로크 양식의 멋진 교회, 성, 건물들이 펼쳐져 있기 때문에 볼거리들이 많습니다. 광장에 서서 어딜 둘러보더라도 멋진 건축물들로 가득합니다. 커다란 벽화가 이어진 군주의 행렬, 간결한 멋을 보여주는 즈윙거 궁전, 바로크 양식이 돋보이는 크로이츠 교회 등 멋진 건축물들을 따라 걸으며 눈호강을 합니다.


굳은 힘이 느껴지는 크로이츠 성당.
긴 행진이 그려져 있는 군주의 행렬
마이 홈 같은 느낌의 즈윙거 궁전

산책을 하면서 궁전 내부나 박물관, 전시관 등에 들어가 볼까도 싶지만, 오늘 남은 일정 동안엔 산책만 하기로 합니다. 물론 전시를 보는 것도 좋은 여행의 하나가 될 수도 있지만 입장료도 비싸고 별로 흥미가 생기지 않습니다. 유럽에 온 지 열흘 만에 깨달은 건데, 제가 박물관에 많은 흥미를 가지고 있지만, 그 흥미가 현대적인 주제나 적어도 근대 이후의 것에 한정된다는 점입니다. 근대 이전의 역사나 전시물은 신기하기는 한데 별로 와 닿지 않는 게 크기 때문인 듯합니다. 그 사실을 인지한 이후로는 평점이 높은 박물관이라고 막 들어가는 게 아니라 흥미로운 박물관만 가보기로 합니다.


베일 강변에 서서 강 반대쪽 풍경을 보니 너무 좋습니다.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강을 바라보다 보니, 건너편에서 바라보는 이곳의 풍경은 어떨지 궁금해집니다. 아우구스투스 다리를 건넜다 오면 여행을 마무리짓기 딱 좋은 시간일 것 같습니다. 마침 건너편으로 넘어가면 해가 지기 시작할 시간이니 분명히 예쁜 풍경이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약간 시골 느낌이 나는 베일강 풍경. 도시사 박물관에서 본 100 년전 풍경과 거의 비슷합니다.

그렇게 카메라를 들고 다리 반대편에 도착해서 사진을 찍으려던 차에 굵은 빗줄기가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아까부터 시원해지던 날씨가 기어코 천둥번개를 동반한 폭우로 바뀝니다. 일단 근처 건물의 지붕 밑으로 달려 비를 피합니다만 고민에 빠집니다. 우산도 우비도 전부 캐리어에 넣어둔 상태고 우산을 구할 곳도 안보이기 때문에 비를 피할 방법이 업습니다. 숙소에 가기 위해선 중앙역에 한 번 들러야 하는데 적어도 도보로 2km 정도를 가야 합니다. 최소한 아우구스투스 다리를 건너지만 않았다면 문제가 없었겠지만, 이미 다리는 전부 건너온 뒤입니다. 이 정도 폭우면 소나기가 아닐까, 비가 그치길 기다렸다가 가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만, 만약 비가 그치지 않는다면 해가 완전히 지고 어둑어둑해진 길을 비를 쫄딱 맞으며 걸어가야 합니다. 더 큰 리스크를 감수할 수 없기에 결국 저는 가방을 앞으로 메고 빗속을 전력 질주합니다.

예쁜 강 건너의 풍경이고 자시고 일단 살고 봐야합니다.


뒤도 안돌아보고 20분을 내달려서 중앙역에 도착하니깐, 기적같이 비가 그쳐있습니다. 이미 축축하게 다 젖은 몸으로 버스를 타니 사람들이 조금 이상하게 쳐다보는 것 같습니다. 비참한 몰골로 숙소로 돌아가면서, 앞으로 일기예보는 꼭 확인하고 가방에 최소한 우비 정도는 넣어두고 다니자고 다짐하는 드레스덴의 하루입니다.


이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어야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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