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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준 Jun 28. 2019

6월 11일, 9일 차, 라이프치히

뜻 밖에 오노 요코를 만난 라이프치히입니다.

오늘은 시작이 좋습니다. 호스텔의 8인 실을 어젯밤 내내 혼자 독점했습니다. 잠이 들 때 아무도 없었고 일어나고서도 아무도 없습니다. 열 두시까지 아무도 들어오지 않길래, 마음껏 빨래하고 덜 마른 옷들을 말릴 수 있었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정리하고 빨랫감을 정리하는데, 소음 때문에 괜히 다른 사람들 잠을 깨울까 봐 눈치 볼 필요가 없습니다. 호스텔에서 이런 호사를 누리다니 오늘은 운이 따르려나 봅니다.


침대 여덟 칸 중 내거 하나만 사용 중~

오늘의 일정은 베를린에서 라이프치히로 이동하여 오후 시간까지 구경하고 저녁에 드레스덴으로 이동하는 일정입니다. 하루 종일 바쁜 일정이라 다른 때보다 서둘러 방에서 나옵니다만, 다리가 말을 잘 안 듣습니다. 독일에 와서 하루 평균 2만 8천 보를 걸었고, 어제 걸은 걸음 수가 3만 5천 보에 달합니다. 자기 전에 붙여둔 파스가 무색하게 발목과 발바닥에서 통증이 옵니다. 특히 예전에 크게 앓았던 족저근막염이 재발할까 봐 슬슬 걱정됩니다. 한 번 도지면 걸어 다니는데 치명적이기 때문에 신중하게 다녀야 합니다.


이체헤를 타고 라이프치히 중앙역에 도착하니 바흐의 초상화가 크게 붙어있습니다. 라이프치히는 과거의 영광을 담고 있는 도시로 바흐의 고향으로도 유명합니다. 며칠 후부터 바흐 페스티벌을 시작한다고 온 동네에 광고가 붙어있는데 아쉽게 조금 일찍 온 것 같습니다. 중앙역 너머에는 넓은 광장을 따라 테라스가 끝없이 줄지어 있습니다. 사람들은 테라스에 앉아서 식사를 하거나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이 북적북적한 게 도시 전체가 축제 분위기가 납니다. 길거리에는 이모 패션 내지는 래더 본디지를 입고 다니는 사람들이 눈에 띄는데, 신기하기도 하고 살짝 무섭기도 합니다.

조금 부담스러운 바흐 축제 포스터


화요일 대낮부터 사람들로 가득한 테라스들

저는 북적거리는 광장을 잠시 뒤로 하고 조형 예술 박물관으로 향합니다. 지도가 가리키는 위치에 판교에서 볼법한 커다랗고 투박한 유리 빌딩이 서 있습니다. 무슨 사무실 건물이 있는 건지 주위를 둘러보며 박물관을 찾아보지만 여태 본 고풍스러운 양식의 건물은 주위에 보이지 않습니다. 건물을 한 바퀴 다 돈 다음에야 대형 사무용 빌딩처럼 생긴 건물이 박물관이라는 걸 깨닫습니다.


암만봐도 박물관 같지는 않은데...


건물 정문에는 'YOKO ONO PEACE is POWER'라고 거대한 포스터가 걸려 있습니다. 어디서 들어본 이름인데 생각이 잘 안 납니다. 전시관 입구에 걸려있는 존 레넌의 사진을 보고서야 YOKO ONO가 오노 요코라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저는 솔직히 오노 요코를 존 레넌의 아내 정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이미 오래전 사람이며 가끔 존 레넌의 이야기가 나올 때 따라오는 사람 정도로 알고 있었죠. 그런 생각들이 부끄럽게도 오노 요코가 현대 예술에 한 획을 그은 인물이며 지금까지도 활동 중이라는 걸 깨닫게 됩니다. 이번 전시는 지금까지 오노 요코가 세계 곳곳에서 전시했던 작품을 모은 토탈 패키지입니다. 메인 전시는 독일의 미술사를 다룬 전시입니다만, 미안하게도 전혀 기억에 남질 않습니다.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이름. YOKO ONO?

오노 요코의 전시물들은 마치 함축적인 메시지들을 하나씩 던지면서 제게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느낌입니다. 평화를 주제로 하는 전시는 처음에 은유적인 조형물들로 제 머릿속을 두들기더니, 점점 갈수록 강렬한 메시지들이 머릿속을 휘감습니다. 폭력의 피해자들이 겪었던 고통, 공포, 두려움의 시간을 점점 빨려 들어갈 듯 한 괴이한 이미지들 속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강렬하고 끔찍한 이미지들의 반복 속에서 오노 요코가 던진 평화에 대한 질문은 머리를 해머로 두들긴 것처럼 깊은 현기증을 만들어 냅니다. 저는 거의 휘청거리며 박물관을 나섭니다. 컨테이너 박스 같은 빌딩 속에 이렇게 강렬한 에너지가 담겨있으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요?


각각 여성들이 겪었던 폭력을 상징하는 모래무더기
폭력의 피해자들이 남긴 그들의 이야기와 눈동자
하늘이 퍼즐처럼 조각나 철모 속에 담겨있다.
누구도 보지 못한 사람의 이야기
전시관 곳곳에 이렇게 작은 글씨로 쓰여진 수수께끼 같은 단어들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 중 가장 마음에 드는 문장입니다.
'여러분이 겪었던 폭력에 대하여 작성해주세요', 가장 가슴에 와 닿았던  문구.
영원히 그리워할 거에요. 오노 요코.

이후의 관광은 오노 요코로 머릿속이 가득 차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성 토마스 교회도 가보고, 바흐 박물관도 가보고 역사박물관도 가봤지만 다소 고리타분한 이야기들로밖에 들리지 않습니다. 저는 오늘은 더 이상 텍스트를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남은 시간 동안 건물들 구경이나 해보기로 합니다. 라이프치히에서 한 가지 놀란 점은 관공서로 쓰이는 건물들이 고상한 궁전처럼 보인다는 점입니다. 법원, 시청, 은행 등의 건물을 들을 구경하며 여기가 과거에 얼마나 번영했던 공간인지 짐작해 봅니다. 한편으로는 이런 공간들이 별다른 문제없이 지금까지 잘 활용되고 있는 비결이 조금 궁금하기도 합니다.


바흐가 작곡할 때 썼다고 알려진 오르간
라이프치히 법원. 무슨 의리의리한 궁전 같은 건물을 공무용으로 사용중입니다.

대충 돌아다니고 나니 드레스덴으로 가는 이체에까지 시간이 거의 다가옵니다. 더 돌아다닐 만한 곳은 남아있지만, 그냥 쉬고 싶습니다. 이미 오늘 돌아다니면서 정신적으로 충분히 만족한 상태입니다. 더 돌아다녀봤자 찝찝하고 더운 날씨에 다리만 혹사시킬 것 같습니다. 괜히 못 본 관광명소에 미련을 두지 않기로 합니다. 어서 다음 숙소로 가고 싶은 마음뿐입니다.




드레스덴의 숙소를 찾아가는 길은 고난의 연속입니다. 사람이 몰려서 간신히 탄 이체에가 출발할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독일어로 계속 방송이 나오는데 무슨 이야긴지 도통 모르겠습니다. 제 옆에 앉아있던 중국인이 저에게 무슨 일이냐고 묻습니다. 저라고 알 턱이 있겠냐고 고개를 젓는데, 건너편에 앉아 계신 분이 영어로 설명을 해주십니다. 기술적인 문제로 출발을 못하고 있지만 곧 다시 출발할 거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하지만 통역해주신 분의 친절이 무색하게 사태는 점점 이상해집니다. 기차의 전기가 나가고 에어컨은 꺼지고 심지어 화장실 문 개폐도 되지 않는 상황에 이릅니다. 기차 안은 찜통이 됐고 화장실을 가지 못해 사람들은 서성이고 사고 관련 방송은 계속 나오고 건너편 자리의 분은 계속 통역해주시고, 언제 출발할지 모르는 기차는 혼란 그 자체입니다. 이 난장판은 한 시간이 지나서야 정리가 되고 드디어 기차가 출발합니다.


출발이 한 시간 지연되었으니 airbnb로 약속한 체크인 시간을 맞출 수 없습니다. 호스트분께 양해를 구하며 최대한 빨리 가겠다고 메시지를 드립니다. 서두르는 와중에 기차 안내에서 드레스덴 소리가 들리자마자 내렸는데, 원래 가야 했던 중앙역이 아니라 다른 역입니다. 역에서 내리니 소나기가 쏟아지고 하늘에 천둥벼락이 내려칩니다. 비를 쫄딱 맞으며 트램과 버스를 타기 위해 움직이는데, 버스 정류장에 가보니 이번엔 티켓 판매기가 보이지 않습니다. 발을 동동 굴리며 다른 손님에게 물어보니 버스에 타면 티켓 판매기가 있다고 합니다만 버스 안에 티켓 판매기는 보이질 않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당황하며 옆에 서 있던 한 청년에게 물어보니, 이 친구도 버스 안에 티켓 판매기가 없는 상황에 당혹스러워하더군요. 제가 무임승차가 된 거냐고 멘탈이 무너져서 발을 동동 구르자 이 친구도 다급해합니다. 고맙게도 저 대신 다른 손님들에게 독일어로 분주하게 물어보더니, 제게 앞에 가서 버스 기사에게 표를 사면 된다고 알려줍니다.


청년의 도움으로 버스 기사에게 표를 사러 가는데 버스 내부가 혼잡해서 캐리어를 끌고 앞으로 가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혼자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가방에서 다용도 와이어를 꺼내 캐리어를 기둥에 묶어서 자물쇠로 잠그고 다녀오면 되지만, 그럴 시간도 정신적인 여유도 없습니다. 제가 이 문제로 당황해 하자 이 친구가 자신이 맡아줄 테니 다녀오라고 합니다. 괜한 호의를 보이는 사람은 당연히 경계를 하는 게 정답이지만 여유가 너무 없었던 저는 도박을 하는 심정으로 이 친구를 믿어보기로 합니다. 버스 기사에게 표에 대해서 물어보니 차를 세우고 뭐라고 이야기하는데 이번에는 기사님이 영어를 못 하는 듯합니다. 차를 세운 채 저한테 막 뭐라고 하시면서 어서 버스를 움직여야 한다고 다그치는 것 같은데 저한테 의미가 통하질 않습니다. 저는 무너져가는 멘탈에 어찌할 줄 모르고 당황해하는데 앞좌석에 앉아계신 비즈니스 맨이 저 대신 통역을 해줍니다. 덕분에 어찌어찌 티켓을 구매하는 데 성공합니다. 다시 제가 있던 자리로 돌아오니 아까 그 친구가 나이스 잡이라고 외치며 캐리어를 돌려줍니다. 그 친구와 간단하게 이야기하다가 차에서 내릴 때 저에게 '즐거운 여행이 되기를 바란다'며 작별 인사를 합니다. 괜히 가슴이 뭉클해져서 저도 좋은 밤 보내라고 인사합니다. 몸은 비에 쫄딱 젖어서 피로에 절었고 분명히 멘탈적으로도 힘든데 가슴 한편은 매우 가볍습니다. 드레스덴으로 가는 길에 참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고 감동하는 하루입니다. 독일 사람들이 무뚝뚝하고 불친절하다는 편견은 역시 편견일 뿐인 듯합니다.


'집에 오는 길은 때론 너무 길어 나는 더욱 더 지치곤 해'

버스에서 내려서 동네 구석으로 조금 걸어 들어가니 airbnb로 예약했던 집이 나옵니다. 호스트분께 늦는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한 시간을 기다려주신 모양입니다. 처음에 airbnb를 예약할 때, 영어가 조금 부족하고 독일어를 못해서 커뮤니케이션에 문제가 생기면 어떡하냐고 물었는데, 자신도 영어를 잘 못하지만 문제없다면서 OK를 해주신 분입니다. 서로 짧은 영어를 가지고 집 사용 규칙을 이야기하며, 간단한 여행 이야기를 하는데 제가 겪은 일들에 공감을 해주시니 그저 감사할 따름입니다. 집에 있던 욕조에 몸을 풀어주며 정신없었던 라이프치히의 하루입니다.

다락방에서 자보는게 소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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