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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준 Jun 26. 2019

6월 10일, 8일 차, 베를린

해지는 저녁놀의 회색도시, 베를린입니다.

오늘은 잠을 조금 일찍 깹니다. 눈을 뜨니 다섯 시 반입니다. 한국에 있었을 땐 8시 전에 잠에서 깨려면 제법 각오를 해야 했는데, 해가 뜰 때쯤 잠에서 깨니 느낌이 이상합니다. 시차 적응이 아직 덜 된 건지, 여행 내내 긴장을 해선지, 아니면 잠자리가 익숙지 않아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여하튼 일찍 일어나서 할 것도 별로 없어서 좀 더 잠을 청합니다. 세 시간 정도 자고 일어나니 몸이 그렇게 좋을 수 없습니다. 어제 감기 기운으로 고생을 했었던 것은 이제 기억도 잘 나지 않습니다.


오늘은 딴청 부리느라 가지 못한 베를린의 명소들을 가볼 예정입니다. 원래라면 인근에 포츠담을 하루 돌고 올 예정이었지만 아직 베를린에서도 못 본 곳이 너무 많습니다. 하나 걱정인 건 오늘이 월요일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박물관들이 휴관을 한다는 점입니다. 하나 더 걱정되는 건 새벽에 비가 몰아쳤는데 해가 쨍쨍하기 때문에, 습하고 더운 날이 될 거라는 겁니다. 이래저래 쉽지 않은 날이 될 것 같습니다.




첫출발은 샤를로텐부르크 궁전에서 시작합니다. 유럽여행을 와서 그동안 돌아다닌 곳은 박물관 아니면 성당이 전부였던 것 같습니다. 명색이 유럽을 왔는데 성, 궁전 정도는 가줘야 유럽에 왔다는 티는 낼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 같잖은 생각과 함께  U반을 타고 궁전으로 향합니다. 멀찍이서 보이는 샤를로텐부르크 궁전은 제가 생각한 궁전의 이미지하고는 좀 다릅니다. 궁전이라기보다는 거대한 박물관처럼 보입니다. 월요일은 휴관일이기에 간단하게 둘러만 보다가 갈 생각이었는데 티켓 오피스가 열려 있습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오늘도 영업을 하나 봅니다. 밖에서 보기엔 조금 단조롭지만 궁전 안은 재밌을 거라 기대하며 궁전 안으로 들어갑니다.


궁전이 조금 작은 느낌입니다만, 알고 보니 샤를로텐부르크는 별장 느낌으로 지어진 궁전입니다.

오디오 가이드의 샤를로텐부르크 궁전에 대한 설명을 요약하면 대충 다음과 같습니다. 1701년에 소피 샤를로테가 별장으로 짓기 시작한 건물로, 샤를로테는 1705년 사망하지만, 남편 프리드리히 3세와 그 후손들이 계속 궁전을 완성해나갔다고 합니다. 때문에 많은 방의 설명에서 샤를로테가 완성을 보지 못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가로로 길게 뻗은 궁전은 긴 복도에 각 방들이 하나씩 놓인 형태를 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방들은 거대하고 많은 장식들이 되어있습니다. 방마다 꼭 빠지지 않고 초상화, 각종 장식들과 천장의 벽화들이 있습니다. 좀 과하다 싶은 방들을 보면서 궁전에서 생활하던 사람들은 어떤 느낌이었을까 조금 궁금합니다. 생활공간으로 익숙해지면 역시 별다른 감흥을 못 느끼게 되는걸 아닐까요? 특별히 눈에 띄는 건 샤를로테가 꾸민 방에는 중국 풍의 도자기나 가구들이 많았다는 겁니다. 아예 차이니즈 룸이라고 불리는 방도 있고요. 1700년에 중국 물품들이 귀족 사회에서 얼마나 인기였는지, 또 여기까지 어떻게 오게 됐는지 무척 궁금합니다.

아무래도 이런 방에서 사는건 좀 많이 과분합니다. 너무 미니멀라이프만 추구한 나머지 과한게 거추장스럽게 느껴지는지도 모르죠.
유럽 왕궁에 중국식 도자기들이 장식되어 있습니다. 상당히 흥미로운 역사가 담겨있을 듯 합니다.

궁전 건물을 나서니 매우 덥고 후덥지근합니다. 오전 10시 반부터 돌았는데 벌써 1시 반이 다 되어 갑니다. 궁전 뒤편의 정원을 돌아볼까도 생각했지만 도무지 엄두가 안 납니다. 애초에 시간도 너무 많이 지났습니다 도대체 왜 이렇게 시간이 많이 흘렀나 했더니 샤를로텐부르크 궁전에서 방 하나하나 오디오 가이드를 들으며 정성스럽게 관람한 게 원인입니다. 사실 그 시기에 왕가가 어땠고, 왕가의 관계가 어떻고, 그들의 개인적인 관심사가 뭐였는지 등까지 세세하게 알 필요는 없는 일입니다. 그다지 재밌지도 않은 내용을 하나하나 꼼꼼히 듣는 게 별로 좋은 관람 방법은 아닌 것 같습니다. 시간은 시간대로 가고 금방 지쳐버립니다. 갈 길도 먼데 배는 고프고 날은 덥고 어쨌든 걸음은 멈추면 안 되니 부정적인 생각들이 머리에 듭니다. 내가 왜 의미도 없는 고생을 해야 하나. 아직 온 지 일주일밖에 안 됐는데 돌아가려면 얼마나 남았나. 그냥 다 때려치우고 집에 가면 어떻게 되나. 기분이 조금 안 좋다고 이런 생각들이 들다니 정말로 괜찮은 건가. 머릿속이 진정이 되질 않습니다.


마침 목적지로 가는 길에 커리부어스트를 파는 가게가 보입니다. 베를린을 뜨기 전에 꼭 먹고 싶었던 커리부어스트를 지금이 아니면 먹지 못할 것 같습니다. 가게에 앉아 햄버거와 커리부어스트를 주문합니다. 햄버거는 야채가 싱싱해서 기분이 좋고 커리부어스트는 향이 독특해서 재밌습니다. 많이 짜기는 하지만 햄버거, 콜라와 같이 먹으니까 괜찮게 먹을만합니다. 먹는데 집중하다 보니 아까의 부정적인 생각들도 어느새 수그러든 모양입니다. 먹는 거 하나로 기분이 풀어지다니 제가 이렇게 단순한 사람이었나 싶습니다.

역시 배고프면 예민해지고 배부르면 기분이 풀어지는 단순 바보입니다.

오후에는 박물관 섬을 돌아다닙니다. 베를린 중심가에 있는 박물관 섬에는 정말 볼 게 많습니다. 부족한 시간을 쪼개서 빠르게 돌아보도록 합니다. 처음 본 건 베를린 티비 타워입니다. 높이 솟은 타워는 조금 투박한 느낌이 납니다. 배경을 보니 동독 정부가 서베를린에서 보이도록 지은 일종의 선전용 건축물이라고 합니다. 주위에 고풍스러운 건축물들하고는 잘 어울리지는 않는데, 그 때문인지 혼자 더 돋보이는 느낌입니다. 타워 내부에도 들어가 볼 수 있는 것 같지만 그다지 관심이 없어서 그냥 지나갑니다.

다시 봐도 투박한 티비 타워.


박물관 섬을 나와서 조금 걷다 보니 공사 중인 건축물들이 보입니다. 그중엔 베를린 궁도 있는데 입장이 불가능해 보입니다. 조금 아쉬워하며 재미있는 곳을 찾다 보니 DRR이라는 독특한 분위기의 간판이 보입니다. 바로 동독 박물관입니다. (도이치 민주공화국, Deutsche Demokraticsche Republik의 준말이라 DDR이라 하나 봅니다.) 박물관은 당시 동독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고 체험할 수 있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실제 집을 그대로 옮겨 놓거나, 자동차를 몰고 당시의 동베를린의 거리를 돌 수 있는 시뮬레이션 게임을 즐길 수 있습니다. 가정의 일상부터 스포츠, 군대, 이데올로기까지 알짜배기들을 압축해놓은 공간입니다. 특히 서독과 체제 경쟁을 하던 시기에 동독의 입장에서 본 시선과 생각들이 전시되어 있는 게 조금 신기합니다. 서독 사람들은 한 때의 추억 같은 이야기로 받아들이는 걸까요?


사이버네틱한 분위기의 동독 박물관.
당시 동독의 가정집을 그대로 옮겨 놓은 전시관. 사람들이 너무 편하게 소파에 앉아 있어서 재연 배우인줄 알았습니다. (웃음)
DER FRIDEN MUSS BEWAFFNET SEIN, 상당히 섬뜩한 문구입니다.

DDR 박물관 바로 맞은편에는 베를린 돔이 보입니다. 사실 시간이 부족한 관계로 베를린 돔은 패스할까 싶었지만 구글맵 평점을 보니 지나치기에 조금 아쉽습니다. 티켓을 끊을 때만 해도 반신반의했지만 돔에 첫 발을 딛는 순간 좋은 선택이었다고 확신이 듭니다. 기존에 들렀던 성당들하곤 달리 돔 형태로 이루어진 성당의 모습은 장엄합니다. 이렇게 성당만 둘러봐도 좋은데 계단을 타고 돔 꼭대기까지 올라갈 수 있습니다. 돔 위에는 어떤 광경이 있을지 두근거리며 계단에 들어서는데, 육체적으로 힘들 수 있다는 경고문이 보입니다. 농담 정도로 생각했는데, 막상 계단을 오르니  끝이 보이질 않습니다. 생각해보니 돔 꼭대기면 웬만한 빌딩 옥상을 걸어 올라가는 수준입니다 다행히 돔 꼭대기에 도착하자 시원한 바람과 함께 멋진 베를린의 전경이 보입니다. 하늘 높은 줄 모르던 티비 타워도 이제는 좀 만만해 보입니다. 이 정도면 한 번 정도는 더 고생해도 올라가 볼 만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강건너 보이는 베를린 돔. 저는 처음에 궁전인줄 알았는데 성당입니다.
장엄한 분위기의 베를린 돔 내부 모습.
빙글빙글 계단을 오르고 또 오르면
베를린의 전경이 눈에 들어옵니다. 티비 타워는 몇 번을 봐도 기묘합니다.



베를린 돔을 나오니 독일 의회 의사당 입장까지 시간이 조금 남습니다. 오늘은 빡빡하게 시간을 활용하기로 했으므로 남는 시간에 공원들을 산책하기로 합니다. U반을 타고 북쪽으로 향하니 베를린 장벽 기념 공원장벽 공원이 있습니다. 몇 가지 전시물들과 장벽들이 있는 곳을 설렁설렁 산책하며 시간을 때우기에 적당한 것 같습니다. 공원에는 일광욕을 즐기러 나온 시민들이 많습니다. 사람들이 평범하게 이용하는 공원에 깊은 역사적 의미를 갖는 기념물들이 세워져 있는 건 참 좋은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만큼 추모의 생각들을 일상적인 일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니까 말이죠.

장벽 기념 공원의 화해의 조각상. 우리는 분열 속에서 우리가 주고받는 상처들을 때때로 잊어버리곤 합니다.
장벽 공원의 놓여진 긴 장벽은 그래피티의 천국입니다. 지나가는 길에 발견한 그래피티 '증오'.

장벽 공원을 나와서 의사당으로 가는 길을 찾아보니 대중교통보다 자전거가 더 빠르다고 나옵니다. 구글 지도가 LIME이라는 전기자전거 공유 서비스를 소개해줍니다. 직접 가는 교통편이 없으면 자전거가 더 빠를 수도 있겠지만, 트램으로 30분 거리를 자전거로 20분 만에 간다는 건 역시 흥미로운 일입니다. 독일에 와서 자동차와 동등한 수준으로 취급받는 자전거를 꼭 한 번 타보고 싶기도 했습니다. 차선 하나를 떼어서 자전거 차선으로 만들고 자전거 전용 신호등도 있는 게 신기했거든요. 당장 LIME 어플리케이션을 깔고 결제를 한 후 자전거에 타봅니다. 자전거 안장이 꽤 높은데 페달을 살짝 밟으니 생각지도 못한 속도가 나와 자칫 넘어질 뻔합니다. 자세히 자전거를 살펴보니 전동 자전거입니다. 이렇게 빠른 자전거를 타도 되나 겁이 나서 다시 돌려놓을까 싶습니다만 놓치기 아까운 기회입니다. 자전거 핸들 거치대에 스마트폰을 내비게이션 모드로 켜놓고 길을 나서기로 합니다. 생각보다 빠른 속도와 자동차의 서행으로 도로에서 자동차랑 거의 같은 속도로 움직입니다. 그냥 차를 모는 느낌입니다. 마침 여행을 나오기 전에 운전면허를 따두지 않았다면, 좌회전을 위한 차선 변경 같은 상식도 몰라 헤맸을 겁니다. 자전거를 몰다가 사고를 냈을 수도 있겠구나 조금 아찔한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확실히 편하고 빠르고 또 재밌습니다. 이렇게 힘을 들이지 않고 막힘없이 자전거를 탈 수 있다면 확실히 자전거를 탈 맛이 날 겁니다. 기본료 1유로 + 분당 0.15유로라는 비싼 요금으로 20분을 타는데 4.5유로를 결제했지만 심심할 때 종종 타면 확실히 재밌을 것 같습니다. LIME이 유럽 곳곳에서 서비스를 제공하니 기회가 된다면 또 이용해 보고 싶습니다.

무지막지한 성능의 Lime 전동 자전거.



오늘의 마지막 목적지는 독일 의회 의사당입니다. 의사당 옥상에 유리로 된 돔이 있는데 미리 신청을 해두면 올라가 볼 수 있습니다. 다행히 이틀 전에 현장 예약을 해서 해가지는 좋은 시간대에 입장하게 됩니다. 의사당은 정말 중요한 건물이기 때문에 입구에서부터 몇 중에 걸쳐서 검사를 철저히 합니다. 검문을 통과하고 엘리베이터를 이용해서 옥상에 도착하니 모서리 타워에서 펄럭이는 깃발들이 꽤 멋있습니다. 특히 해가 지면서 길게 뻗은 햇빛과 베를린의 정경이 멋들어져 보입니다. 유리로 된 돔 내부에는 나선을 따라 돔 꼭대기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있습니다. 계단을 따라 오르며 점점 변해가는 베를린의 모습은 절대 잊히지 않을 것만 같습니다. 오전에 좋지 않았던 기분이 별 일 아니라는 것처럼 뿌듯한 기분으로 지는 해를 바라보는 베를린의 하루입니다.

해가 지는 의사당 옥상에서 한 컷.
옥상에 놓인 돔. 나선을 따라 천장까지 올라갑니다.
돔을 따라 올라가며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베를린의 풍경은, 평생 잊지 못할 것만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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