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을 떠나는 날입니다. 체크아웃 시간인 10시를 아슬아슬하게 맞추고 숙소를 나옵니다. 지금까지 지냈던 호스텔 중에서 가장 만족스럽습니다. 리셉션 아저씨가 마지막에 '안녕히 가세요'하고 인사해주시는데 기분이 좋습니다. 체크 아웃을 하고 기차의 출발시간까지 조금 여유가 있어서, 중앙역까지 한 시간 정도 산책하며 걸어가 봅니다. 번화하고 복잡한 중심지에서 벗어나니 한적한 주택가가 보입니다. 좋은 날씨에 놀이터에서 유치원 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 도로를 공사하는 인부, 가로수 길을 따라 조깅을 하는 사람들이 보입니다. 평일 오전 시간의 생생한 일상들을 훔쳐보는 느낌이 듭니다. 일상을 영유하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여행이라는 핑계로 하염없이 돌아다니기나 하는 스스로의 모습을 생각하게 됩니다. 따지고 보면 별다른 목적도 없는 백수인 제가, 여행이 끝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초조해집니다. 초조함을 떨쳐내기 위해 괜히 발걸음을 재촉하며 걸어갑니다.
그렇게 역에 서둘러서 도착하고 브라티슬라바로 가는 기차를 기다립니다만, 일찍 온 보람도 없이 기차가 연착되다 못해 15분쯤 지나서 아예 캔슬이 됩니다. 기다리던 기차가 사전 공지도 없이 늦는다 늦는다 하다가 아예 취소가 되다니 생각지도 못한 일입니다. 캔슬 안내가 나오자마자 사람들이 일제히 플랫폼을 떠나 다른 기차를 찾아가는데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일인지 조금 궁금하긴 합니다. 아니면 오스트리아 사람들이 이런데 관대한 편인 걸까요? 다행히 빈에서 브라티슬라바까지 짧은 거리이고 편성된 기차도 많아서 다른 기차를 타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습니다. 처음으로 기차를 타고 국경을 넘어가는데 특별한 게 있을까 기대해봅니다만, 끝없이 이어진 밭과 풍차들을 보다 보니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해있습니다.
기차에서 내리고 본 첫인상은 '여기가 동유럽이구나'입니다. 제가 도착한 브라티슬라바 역은 슬로베니아 수도 중앙에 위치한 가장 규모가 큰 역일 텐데 우리나라의 지역 터미널을 보는 것 같습니다. 전체적으로 낡고 주변에 부대시설도 없이 간단한 케밥 가게 하나와 구멍가게만 있어서 완전히 허름한 정류소를 보는 느낌입니다. 방금 전까지 복합 쇼핑센터와 멀티플렉스로 화려한 시설을 갖추고 있었던 빈 중앙역과 비교를 했을 때 차이가 너무도 많이 납니다.
옛날 인천시외버스터미널을 보는 느낌입니다.
점심으로 먹는 케밥입니다만, 저 얇은 막으로는 흘러넘치는 소스를 막을 수가 없습니다. 캐리어에 소스가 흘러내려 한고생 합니다.
중앙역에서 호스텔까지 약 20분을 걸어가면서 감상한 브라티슬라바의 거리는 역사에서 받은 느낌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곳곳에 금이 가고 방치된 건물들이 보입니다. 수백 년 전에 건축된 건물들을 지금까지도 활용하는 여태까지의 도시들과는 달리, 브라티슬라바의 건물들은 지은 지 몇십 년 정도 되어 보입니다만 그나마도 낡은 느낌이 많이 납니다. 마치 재개발을 하지 못한 채 방치된 우리나라의 70~80년대의 허름한 동네를 보는 느낌입니다. 호스텔에 도착해보니 입구가 많이 낡아서 폐가인 줄 알았는데 다행히 안에 건물은 멀쩡해서 한시름 놓습니다.
방치된 느낌의 도심 내 공원입니다.
그래피티와 낡은 이정표가 독특한 분위기를 그려냅니다.
집으로 기능하는 건물일까요?
짐을 풀고 거리를 나서 가이드 맵을 따라 올드 타운으로 걸어가 봅니다. 올드 타운은 브라티슬라바에서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곳으로, 입구를 들어서는 순간 여태 본 칙칙하던 동네가 활기찬 거리로 바뀌어 있습니다. 브라티슬라바에 랜드마크나 유명한 볼거리들이 있는 건 아닙니다만, 동네가 아담하여 예쁘고 곳곳에 재치 있는 동상들이 많이 세워져 있습니다. 올드 타운의 이곳저곳을 쏘다니며 숨은 동상을 찾아서 사진을 찍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특히 하수구에서 몸을 내밀고 웃고 있는 'Man at Work' 동상이 인상 깊은데, 힘든 노동을 웃음으로 극복하려는 모습에 저도 괜히 기분이 좋아집니다. 머리를 만지면 행운 이온 다고 하는데 사람들이 하도 많이 만져서 그런지 정수리 부분만 금색으로 빛나는 게 더 재밌어 보입니다.
아기자기하고 귀여운 느낌의 푸른 교회 입니다. 정말로 이름이 푸른 교회(Blue Church)입니다.
구시가지를 들어서는 입구입니다. 여기서부터 도시의 분위기가 확 달라집니다.
브라티슬라바의 명물 맨 앳 워크입니다. 도시를 상징하는 랜드마크가 역사적 유물이 아니라 소박하고 유쾌한 동상이라니 무척 흥미롭습니다.
동상들과 사진찍는게 즐거운 올드 타운 투어.
낡은 멋이 이색적인 세인트 마틴 교회입니다.
올드 타운을 나와 대로변으로 내려오면 강 건너 언덕 위에 브라티슬라바 성이 보입니다. 바로크 양식으로 지어진 성치곤 복잡한 장식 없이 흰 벽과 붉은 지붕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심심한 멋이 동네 풍경과 오히려 잘 어우러집니다. 언덕을 따라 올라가는 건 조금 힘들지만, 성벽 위에 올라 한눈에 들어오는 동네를 보고 있으니 뿌듯합니다. 한 편에는 주황색 지붕으로 덮인 올드 타운의 아담한 모습이, 강 건너편 다리에는 빌딩이 들어선 도시의 모습이 보입니다. 강을 경계로 대로를 따라 현대적으로 변하는 경치가 시대에 따라 변해가는 시간의 스펙트럼을 보는 것 같습니다. 이 독특한 풍경이 밤이 되면 또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구경하면 좋겠지만, 늦은 시간에 돌아다닐 자신이 없기 때문에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하루를 마무리 짓기 위해 숙소로 향합니다.
투박한 멋이 돋보이는 브라티슬라바 성.
붉은 빛이 돋보이는 구시가지와 다리를 건너 회색 빛이 돋보이는 브라티슬라바의 모습은 강을 경계로 시대가 양분된 독특한 풍경입니다.
도시 구경을 마치고 여느 때처럼 숙소로 돌아와서 여느 때처럼 하루를 마무리하려고 하는데 여러 문제들을 발견합니다. 동전 지갑은 모습이 안 보이고, 캐리어 안에서 샴푸통은 터져있고, 샤워 가방은 지퍼가 빠져 고장 나 있습니다. 언젠 터져도 이상하지 않은 문제들이지만 하루에 몰아서 터지니까 조금 지칩니다. 그나마 비상용으로 들고 온 비닐 팩들이 있어서 임시로 땜빵합니다만, 앞으로도 소모될 소지품과 망가질 물건들을 생각하니 속이 좀 아립니다. 여행이 끝날 때까지 저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잃어버리게 될까요? 앞날이 걱정되는 브라티슬라바의 하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