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2일, 20일 차, 부다페스트

폭우에 야경이 잠긴, 역사를 돌아보는 부다페스트입니다.

by 현준

밖에서 울리는 경적소리를 들으며 잠에서 깨어나니 시계가 5시 반을 가리킵니다. 숙소가 대로 바로 옆에 있는 데다가 창문을 열지 않으면 더위 때문에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어서 창문을 다 열어놓고 자다 보니, 새벽 내내 들려오는 트램, 자동차, 클락션, 사이렌 소리를 버텨낼 재간이 없습니다. 그래도 어떻게든 잠을 자야 한다고 억지로 잠을 청하다 보니 여덟 시가 넘어서 일어나게 됩니다. 여전히 피로에 몸을 일으키기도 쉽지 않지만, 사람들이 부스럭거리기 시작하면서 더 잠을 청하기도 힘들 것 같습니다.


잠을 자는 건 포기하고 해야 할 일들이나 하기로 합니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빨래를 처리해야 합니다. 어제 호스텔에 빨래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을까 물어봤는데 사람들이 요청한 빨래가 워낙에 많이 밀려서 이틀은 기다려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참입니다. 그래서 빨랫감을 싸들고 근처에 코인 세탁방으로 바리바리 갑니다. 어제 돌아오는 길에 얼핏 본 코인 세탁방은 경쟁률이 치열해 보였기 때문에, 오픈 시간인 새벽 6시에 맞추어 가려고 했지만 너무 피곤한 몸을 일으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었나 봅니다. 다행히 빈자리가 있어 기다리지 않고 바로 빨래를 돌릴 수 있습니다. 세탁과 건조가 끝나고 나니 벌써 점심시간입니다.

세탁기 사용법이 쉬어서 다행입니다. 한국에서 몇 번 여행연습을 한 게 도움이 됩니다.

오늘의 목표는 어제 가지 못했던 박물관과 중앙시장, 시타델라를 구경하고, 부다 성 지구에서 야경을 보는 게 목표입니다. 부지런히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점심을 든든하게 파스타로 채우고 오늘의 여정을 떠나봅니다.

언제 어디서 먹든 파스타는 맛있습니다.

처음 향한 곳은 헝가리 국립 박물관입니다. 박물관은 선사 시대부터 공산주의로부터의 해방까지 헝가리의 역사에 대해서 전시하고 있습니다. 꼭 역사책 한 권을 나열한 구성 덕에, 헝가리가 역동적인 역사를 겪어왔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유럽 중앙에 위치한 덕에, 로마, 훈, 프랑크, 이슬람, 합스부르크, 나치까지 끊임없이 공격받고 파괴를 경험했던 나라입니다. 왜 부다페스트 곳곳에서 건국 천 주년을 기념하는 요소를 찾을 수 있는지 알 듯합니다. 분명 어렵사리 지켜온 역사에 대해 큰 자긍심과 애착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헝가리 국립 박물관
원시 헝가리인의 움막.
무덤에 매장되어 있던 유골.


박물관에 전시된 전시물 중에서 가장 눈이 가는 것은 무덤과 무덤 석판입니다. 음각으로 글자가 새겨진 무덤 석판이 무더기로 전시되어 있는데,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유물들입니다. 헝가리에서만 발굴되는 형태인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조금 궁금해집니다. 박물관 세미나실 문이 살짝 열려 있어 지나가는 길에 흘겨보니, 무덤 석판과 유골을 복원하고 분석하는 진행이 한참 진행 중인 듯합니다. 고고학 작업의 현장을 직접 보는 건 처음인데 작업하시는 분들의 진지한 표정을 보니 제가 다 긴장이 됩니다. 밖에서 계속 구경하고 있으면 방해가 될 것 같아 그만 가보기로 합니다. 버킷리스트에 고고학 발굴의 현장 체험을 추가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적혀있는 내용이 궁금한 석판.
틈 사이로 무언가 있을 것 같은 석관.
헝가리 국립 박물관에선 다양한 석판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좋은 구경을 마치고 중앙시장으로 향합니다. 보통 다섯 시쯤부터 정리한다고 하는 데, 세시 반쯤 도착해서 여유 있게 시장 구경을 할 생각이었습니다만, 막상 도착하니 시장 정문이 닫혀있습니다. 옆에 안내를 보니 토요일만 오후 세 시까지 한다고 적혀있더군요. 일정을 확인하지 않은 제 불찰입니다. 시장을 둘러싸고 있는 건물의 창문 틈새로 보이는 가게들에는 다양한 과일과 육류가 놓여있는 게 보입니다. 입맛을 다시며 허기진 배를 붙잡고 지나갑니다.

닫혀있는 중앙 시장. ㅜㅜ

해지기 전까지 오후의 남은 시간은 등산의 연속입니다. 세체니 다리 건너편에는 산 위로 시타델라가 보입니다. 부다 성 남쪽에 지어진 요새에는 여신상이 서 있는데 산 아래서도 그 웅장함을 확인할 정도로 크기가 제법 큰 것 같습니다. 여신상을 보겠다는 일념으로 뻘뻘 대면서 산을 타고 요새에 오르니, 부다 지구와 페스트 지구가 한눈에 다 들어옵니다. 마을 전체를 아우르는 전경을 바라보면서, 이 요새가 사실 합스부르크 제국이 헝가리인들을 감시하기 위해 지은 요새라는 설명을 보게 됩니다. 산 아래서 보였던 여신상은 소련이 나치를 정복한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지어놓은 것이라고 합니다. 저는 찾지 못했지만 요새 곳곳에 세계 대전 당시에 박힌 탄환의 흔적도 있다고 하더군요. 멋진 전망을 보러 올라와서 생각지도 못한 역사의 흔적들을 발견하니 생각이 무거워집니다. 시타델라에서 내려와 부다 성으로 다시 올라가는 동안, 피지배와 비극의 역사를 교훈으로 보존하는 것에 대하여 계속 곱씹어봅니다. 분명 논란이 많았을 텐데, 과거의 아픈 상처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보존함으로써 뼈저린 역사의 상처를 후대에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은 분명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겁니다.

다시 세체니 다리를 건너 부다 지구로.
산을 오르고 올라서
시타델라 요새의 여신상. 소련이 점령을 기념하기 위해 지은 치욕적인 기념물입니다. 치욕적인 역사도 역사로써 보존하는 헝가리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부다 성 보다도 마을 전경이 더 잘 보입니다.

어제에 이어 부다 성에 다시 찾은 저는 곧장 부다페스트 역사박물관으로 향합니다. 보통 박물관이 문을 닫는 여섯 시가 넘은 시간이지만 오늘은 스페셜 나이트로 오후 11시까지 개장합니다. 개표소 직원한테 확인 차 오늘 폐장 시간을 물어보는 데, 자신이 이 시간까지 야근을 하는 걸 보면 알 수 있지 않으며 하소연을 합니다. 괜히 물어본 것 같아서 조금 미안하기도 하고, 야근에 찌들었던 얼마 전의 저를 생각하니 동정심도 듭니다만, 뭐, 그러거나 말거나 저는 지금 손님인걸요!


부다페스트 역사박물관은 부다페스트와 부다 성의 역사에 대해 전시하고 있습니다. 부다페스트는 원래 도나우 강을 경계로 부다와 페스트로 나뉘어 혼돈의 역사 속에서 다른 국가에게 각각 지배당하여 대립하거나 침략으로 파괴당하고 결합하여 다시 부흥하는 등 험난한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각 시기 별로 자세한 설명과 함께 그 시기를 상징하는 유물 등을 볼 수 있는 게 너무 좋습니다. 박물관 지하에는 부다 성 지하의 모습을 그대로 전시해 두었는데 마치 지하 미궁을 탐험하는 것처럼 돌아다니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특히 지하에서 타워로 올라가는 샛길이나 지하에 숨겨져 있는 듯한 왕가의 채플 등을 찾아다니는 묘미가 있습니다. 역사박물관 이용권을 끊으면 근처의 네 개의 건물동에 전시된 미술품들도 같이 볼 수 있는데, 세기별로 헝가리 미술의 역사를 전시하고 있어서 관심 있으신 분들은 좋아할 것 같습니다. 원래라면 꼼꼼히 챙겨보겠지만, 박물관 구경을 하다 보니 어느새 여덟 시 반이 넘었고 해가 슬슬 질 것 같아서 다 보지 못하고 밖으로 나옵니다.

마더 테레지아, 그의 영향력은 도대체 어디까지 손을 뻗는 걸까요?
성 지하를 내려가면
지하에 조금 위험해 보이는(?) 공간도 보이고
왕들이 사용했던 지하의 채플도 보이고
지금은 폐쇄된 타워로 올라가는 계단도 보입니다. 솔직히 으스스 합니다.
무슨 던전으로 통하는 위험한 통로같아요.
부다 성 미술관에서 사진 전시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절실히 자유를 갈구하는 듯한 남자가 인상적인 사진입니다. 사진의 배경은 80년대 한 콘서트 장입니다.

밖으로 나오니 이미 하늘은 어둑어둑합니다. 해가 지는 시간대와 맞물려 짙푸른 색으로 물들고 있는 구름을 사진으로 담으니 꼭 운석이 떨어지는 하늘을 보는 것처럼 예쁘게 나옵니다. 부다 성에서부터 어부의 요새까지 걸어가면서 해가 진 마을의 야경을 사진에 담는 데 배경이 너무 좋아서 어디를 찍어도 사진이 근사하게 나옵니다. 저녁 시간에는 어부의 요새 2층이 무료로 개방되기 때문에 좋은 전망과 함께 사진을 찍을 수 있습니다. 항상 사람이 붐빈다길래 걱정을 했는데 생각보다 사람이 적습니다. 웬 횡재냐 싶어서 요새에 올라간 순간, 천둥번개와 함께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한두 방울씩 쏟아지는 비는 순식간에 폭우로 변합니다.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조명에 굵은 빗줄기가 다 보일 정도입니다. 빗줄기와 조명과 야경의 조화는 또 색다른 멋을 줍니다만 이제 야경을 신경 쓸 때가 아닌 것 같습니다. 여기서 빠져나가서 숙소로 돌아갈 걱정을 해야 합니다.

해가 지는 부다 성.
부다 성 입구.
너무나 인상적인 하늘입니다.
점점 심상치 않아지는
하늘의 모습.
먹구름에 잠기고 있는 도나우 강의 야경.


요새에 갇혀서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는데 삼십 분이 지나도 빗줄기가 약해지기는 커녕 점점 더 강해집니다. 우산이 없어서 갇혀 기다리던 사람들도, 하나둘 인내심이 다했는지 대충 가방을 머리 위에 얹고 뛰쳐나가기 시작합니다. 저도 이제 슬슬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가능하면 비가 그치기를 바라는 이유는, 버스를 타고 부다 지구를 내려가야 하는데 제가 가진 티켓은 없고 부다 성 지구 정류소에는 티켓 판매기가 없다는 점 때문입니다. 최소한 세 정거장은 버스를 타고 내려가야 티켓 판매기가 있을 겁니다. 언제까지고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든가, 티켓 판매기가 있는 곳까지 15분 거리를 빗속을 뚫고 뛰어가든가, 무임승차를 하든가 선택해야 합니다. 인내심이 바닥난 저는 무임승차를 하다가 걸리면 큰일 날 것을 각오하고 버스에 타는 걸 선택합니다. 버스 정류장까지 우비를 쓰고 냅다 달려가서 버스를 탄 후, 내려가는 내내 검표하지 말라고 속으로 빌어봅니다. 다행히 비에 젖은 사람이 너무 많고 버스가 혼잡해서인지 검표를 하진 않습니다. 겨우겨우 숙소로 무사히 돌아와서 가슴을 쓸어내립니다. 일기예보를 확인하고 우산을 가지고 나왔으면 이런 미친 짓은 하지 않았을 텐데, 항상 몸으로 먼저 고생하고 후회하는 스스로가 원망스럽습니다. 다음에는 이런 바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말자는 다짐을 가슴속에 새기는 부다페스트의 하루입니다.

어부의 요새에서 사진을 찍자마자
비가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빗방울과 조명에 잠긴 부다페스트의 야경도 독특한 분위기가 운치있습니다만,
겨우겨우 도착한 숙소 근처에 경찰 들이 출동해 있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가슴 졸인 하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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