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1일, 19일 차, 부다페스트

언제까지고 조문의 여운이 남아 있는 부다페스트입니다

by 현준

날이 너무 덥습니다. 그렇게 습한 건 아닌데 계속 식은땀이 흐릅니다. 전날 밤 열린 창문 너머로 계속 클락션 소리와 사이렌 소리가 들려와서 중간중간에 계속 잠을 깼습니다. 아무리 숙소가 큰 도로의 로터리에 위치한다고 해도 그렇지 밤새도록 사이렌 소리가 계속 들려오는 게 혹시 큰 일이라도 난 게 아닐까 속이 불편합니다. 창문이라도 닫으면 소음 문제에서 조금 해방될 것 같지만, 그랬다간 에어컨도 없는 방에서 쪄 죽을 것 같아 엄두가 나질 않습니다. 옆 자리에선 밤새 뭘 하는지 모르겠지만 무언가 계속 떨어뜨리고 침대가 들썩거리는 진동이 넘어옵니다. 정신이 너무 산만해서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해 시작도 하기 전부터 힘든 하루입니다.


잠을 제대로 못 자서 피곤하긴 하지만 오늘은 아침부터 분주하게 움직여야 합니다. 오전에 가이드 투어가 예약되어 있기 때문에 늦장 부릴 시간은 없습니다. 신청할까 말까 고민을 많이 했는데, 헝가리 역사에 대해 개략적으로나마 이해하면 좋을 것 같아서 투어를 신청하기로 합니다. 혹시 기회가 돼서 같이 점심이라도 먹을 사람이 생기면 더욱 좋습니다. 미팅 장소는 영웅 광장으로 숙소를 나와 언드라시 거리를 따라 20분 정도 걸어가면 도착입니다. 길게 뻗은 가로수길 양옆으로 빌딩들이 줄지어 서있는데, 빌딩에는 여러 나라의 국기들과 함께 경호원들이 호위를 하는 게 대사관 건물들인 듯합니다. 파리의 샹젤리제를 본떠 만든 거리라는데 일직선으로 뻥 뚫려 높다란 가로수들 사이로 대사관들이 보이는 거리가 시원시원합니다. 거리 끄트머리에 다다르면 높게 솟은 기둥 위에 서있는 가브리엘과 함께 터키의 위대한 인물들의 동상들이 학익진처럼 펼쳐선 영웅 광장에 도착합니다. 높고 푸른 하늘 아래 결연한 자세를 취한 동상들의 모습은 영웅 광장이라는 이름답게 넓은 광장을 엄숙함으로 가득 채웁니다. 마치 위대한 선조들의 넋을 기리는 공간 같습니다.

20190621_112223.jpg 샹젤리제를 본떠 만든 언드라시 거리.
안드라시 거리의 일부는 대사관이 밀집되어 대사관 거리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국기를 보니 이탈리아 대사관인 듯합니다.


가브리엘이 이끄는 터키의 영웅들입니다.


미팅 장소에서 가이드 분과 만나 본격적인 투어를 시작합니다. 투어는 페스트 지구의 영웅 광장, 시민 공원, 세체니 온천을 지나, 성 이슈트반 대성당, 어부의 요새를 보는 2 시간 코스입니다. 가이드 분이 헝가리의 역사에 대해서 소개하면서, 헝가리의 초대 왕 성 이슈트반, 동쪽에서 건너온 마자르 7 군장과 그들이 정착한 896년에 대해서 계속 강조해주신 덕에 머릿속에 속속 박힙니다. 투어는 주요 포인트를 맛보기 식으로 방문하는 일종의 하이라이트 투어로, 투어를 따라다니는 동안 부다페스트에서 남은 시간 동안 다녀볼 곳들을 정리해봅니다.


루마니아의 드라큘라 성을 모방해서 만든 버이더후녀드 성. 시민공원과 잘 어우러지는 아담한 성입니다.
뜬금없이 발견한 안익태 동상.
20190621_120938(0).jpg 성 이슈트반 성당 앞에서 한 컷.
화려하고 세련된 이슈트반 성당 내부입니다.
아직까지 보관되어 있다는 성 이슈트반의 손. 누가 코인을 넣으면 내부 조명이 비추어져 선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부다 성 지구에 있는 마차슈 성당. 지붕에 모자이크 양식으로 알록달록하게 꾸며져 독특한 멋을 자랑합니다.
어부의 요새에서 바라보는 부다페스트의 전경. 도나우강 너머로 의회의사당이 눈에 들어옵니다.


어부의 요새까지의 투어를 마감하고 버스를 타고 이슈트반 대성당으로 돌아오면서 가이드 분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눕니다. 개인적으로 이민의 과정과 어려움, 이민 후의 삶에 대해서 궁금점들이 많은데, 가이드분께서 선뜻 이런저런 자기 이야기를 해주십니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이민이 별세상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이야기란 걸 느낍니다. 꼭 이민을 간다는 건 아니지만 앞으로의 삶에서 진지하게 고민해볼 선택지 인지도 모릅니다.


가이드 분과 헤어지고 혼밥 레스토랑에 도전해봅니다. 가이드 분이 오리고기 맛집을 알려주셨는데 최근에 거의 레트로 음식만 먹은 것 같고, 혼자서는 레스토랑을 와 본 적이 없어서 도전하기 딱 좋은 찬스입니다. 식당의 웨이터에게 물어보니 테라스의 4인석 자리로 안내해주는데, 밥이 당겨서 오리고기 밥을 시켜 먹습니다. 달짝지근한 소스가 입맛에 맞는지 후딱 밥을 술술 넘어갑니다. 나중에 물값과 팁까지 포함된 영수증을 보고 살짝 놀라긴 했지만 가끔은 사치를 부려도 괜찮지 않을까 합니다. 근처에 유명한 젤라토 집에서 젤라토까지 한 입 물고 다시 여정을 시작합니다.

맛있게 먹었는데 이름을 잊어버렸습니다. (울음)
장미꽃 모양으로 떠준 젤라토입니다. 하지만 이런 모양은 만드느라 시간이 너무 오래걸리고, 양도 적습니다. 개인적으로 보는 멋 보다는 맛있게 먹는 게 최고입니다.

남은 일정은 거의 고지대 투어입니다. 부다페스트에서 가장 높은 건물인 성 이슈트반 성당과 부다 성에서 보이는 마을 풍경들을 찍느라 오후 시간을 거의 보냅니다. 많은 성당들이 전망대 타워가 있어서 입장료를 내면 올라가 볼 수 있는데, 빙글빙글 이어지는 계단을 타고 올라가는 건 많이 지치는 일입니다. 관람을 마치고 내려가는 길에 올라오는 청년이 "How long?"이라고 물어보길래 손짓과 함께 "Half"라고 답했더니 웃으면서 절규하던 모습이 기억에 남습니다.


빙글빙글빙글.
이슈트반 대성당 돔에서 바라본 도로의 풍경입니다.
생각보다 깔끔하게 정비된 도시의 모습.

부다 성 지구에는 여러 볼거리들이 있는데, 이곳저곳 쏘다닌다고 시간을 쏟다 보니 제가 도착한 시간에는 이미 대부분 박물관들이 폐점 상태입니다. 원래는 구경을 하면서 시간을 때우고 야경까지 보고 내려올 생각이었는데 아무래도 조금 힘들 듯합니다. 다행히 내일 역사박물관이 오후 11시까지 개장한다고 하니, 저녁을 먹고 박물관을 본 후 해가질 때쯤에 야경을 구경하면 계획을 세워봅니다.

부다 성에서 본 도나우 강.
이미 문을 닫은 역사박물관입니다. 내일을 기약해봅시다.
부다 성 지구를 거니는 군악대.
부다 성 지구는 성벽으로 둘러싸인 작은 마을 같습니다.
하얀 대리석으로 지은 것같은 성의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부다 성 지구를 본 후 시간이 조금 남아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도나우 강을 따라 걷습니다. 강변을 따라 걷다 보니 잡생각들이 많이 듭니다. 여행을 떠난 이유, 살면서 힘들어했던 일, 괴로워했던 일들이 떠오릅니다. 일상에서 도피한 지금은 여행 생각으로 가득하지만 돌아간 다음에 저는 다시 고통 속에서 허우적거릴지도 모릅니다. 라이프치히의 오노 요코 전에서 누군가 적었던 "We are stronger than they think"란 문구가 문득 떠오릅니다. 저는 저를 괴롭히는 고통에 도망가기 위해 여기 있는 게 아니라 맞서 싸울 에너지를 얻기 위해 여기 있다고 다독여봅니다. 신기하게 위안이 되는 문구입니다.

20190621_155245.jpg 도나우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들을 몇 번이다 걷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무 생각없이 계속 걷다보면 종종 사색에 빠지곤합니다.


생각에 잠겨 한참을 걷다 보니 벌써 머르기트 교를 다 건넙니다. 머르기트 교 아래에 보니 꽃들이 놓여 있는 게 보입니다. 가지런히 놓여있는 꽃들은 말라비틀어진 지 제법 된 것 같습니다. 헌화들 사이사이로 돌아오기를 염원하는 글귀와 사랑하던 사람을 떠나보내는 이별의 인사가 적힌 한글 시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그 사이 몇 번 비가 왔는지 조문을 위한 촛불은 미쳐 다 타들어가지 못했고, 시구가 적힌 편지들은 쭈글쭈글해져 있습니다. 벌써 유람선이 침몰한 지 한 달이 되어가는데 못다 한 이별의 아픔만이 멈춰 선 시간 속에서 자리를 지키는 듯합니다.

다리 밑에 붙어 있는 편지들입니다.
비바람이 몰아쳐도 그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이별의 편지.
꽃들은 아직 시들었지만 치우지 않고 자리에 남겨져 여전히 고인들의 넋을 위로하고 있습니다.


도나우 강을 따라서 조금 더 내려가면 철로 만든 신발 동상들이 강변에 놓여 있는데, 나치에 의해 희생된 유대인들을 기리며 만든 기념물이라고 합니다. 여전히 이들을 기리는 국기, 꽃, 사과 등이 놓여 있는 것을 보며, 안타까운 이들을 위한 기도는 시간도 국경도 뛰어넘는 것일까 생각해봅니다. 천천히, 천천히 걸어가며 도나우 강에서 본 떠나간 자들을 위한 조문의 흔적들에 대해 곱씹고 또 곱씹어 봅니다.

학살당한 유태인의 명복을 빌기 위해 놓여진 도나우(다뉴브) 강가의 신발들.

해가 막 지기 시작할 때쯤, 하루 일정을 마무리하고 그만 숙소로 돌아갑니다. 돌아가는 길엔 유럽에서 두 번째로 개통했다는 부다페스트 지하철 1호선을 타고 옵니다. 1896년부터 지금까지 계속 운영했다는 지하철은 정말 아담하고 오래된 물건이라는 느낌이 확 듭니다. 워낙 오래된 지하철이다 보니 안내판이나 별 정보가 없다 보니 돌아오는 길에 작은 트러블을 겪습니다. 뵈뢰슈머르치 광장에서 탑승을 하는데 방향을 착각해서 잘못 타버린 일입니다. 일반 역이었다면 한 정거장 정도 가서 반대로 타면 그만이지만 하필 종점에서 실수를 해버린 겁니다. 다른 사람들이 다 내릴 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정신이 없습니다. 차량이 가다가 서서히 멈추더니 완전히 어두운 공간에 그대로 정차해 버립니다. 주위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비좁은 차량에 갇혀 꼼짝달싹도 못하는데, 혹시나 이대로 차량을 세워두고 떠나버리면 여기에 갇힌 채 밤을 보내는 건 아닐까 확 겁이 납니다. 도무지 답이 보이지 않아 소리라도 질러야 하나 망설이고 있는데, 마침 지나가던 사람이 (아마 차장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Sit down"이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차가 반대 방향으로 움직이면서 다시 역으로 돌아가길래 저를 위해서 차를 돌리는 줄 알았더니, 차량의 궤도가 바뀌어 반대 방향 노선으로 다시 운행을 하더라고요. 한 승객이 저한테 "What happend?"라고 물어보길래 방금 일을 설명했더니 막 웃으면서 괜찮냐고 물어봅니다. 안심이 됐는지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는 부다페스트의 하루입니다.

20190621_115140.jpg 100 년도 더 된 낡고 아담한 지하철입니다만,
꼼짝없이 갇혀서 5분 정도 멍때리고 있습니다. 보이는 건 벽과 전선뿐입니다. 한 때는 정말 큰일나는 줄 알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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