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3일, 31일 차, 퓌센

숲 속의 보물을 찾아 엄청난 모험을 한 퓌센입니다

by 현준

오늘은 확고한 목적이 있습니다. '노이슈반슈타인 성을 보고 오자'. 디즈니 로고의 모티브가 되었다는 바로 그 성입니다. 노이슈반슈타인은 퓌센에 있는데, 뮌헨에서 두 시간 정도면 찾아갈 수 있는 근교라고 합니다. 유럽여행에서 가장 기대했던 것 중 하나는 유럽 느낌이 물씬 드는 성을 꼭 보고 오자는 것이었습니다만, 지금까지 한 달간 돌아다니면서 본 몇몇 성은 솔직히 그렇게 인상 깊지는 않았습니다. 동화에 나올법한 예쁜 성이라니 이번엔 정말 제대로 보러 간다는 생각에 설렘이 멈추질 않습니다.

실물을 보게 될 날이 올 줄이야

아침 여섯 시 반에 일어나 부지런히 출발 준비를 합니다. 뮌헨에서 퓌센으로 가는 기차는 거의 한 시간에 한 대 꼴 있는데, 9시 기차를 놓치면 시간이 너무 늦을 겁니다. 역에 도착해서 간단하게 빵으로 아침을 때우고 기차를 찾아봅니다. 아슬아슬하게 플랫폼에 도착하니 다행히 아직 기차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기차를 확인하기 위해 승무원에게 물어보는데 제 뒤로 한국인 다섯 명이 승무원과 실랑이를 하는 게 보입니다. 어떤 이유에선지 승무원에게 티켓을 사야 한다고 안내를 받고 탑승을 포기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유레일 패스가 있어서 문제가 없지만, 어떤 경위로 탑승을 포기했는지 조금 궁금하긴 합니다. 퓌센으로의 당일치기 여행은 하루치 바이에른 티켓을 끊어 사용하면 되는데 무슨 착오가 있었 봅니다. 플랫폼에서 발을 종종 구르며 대책회의를 하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저는 갈길을 가기로 합니다.


우리나라의 무궁화호쯤에 해당하는 Regional Expression을 타고 퓌센으로 내려가는 풍경은 완전히 시골 동네의 풍경입니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초원과 밭, 목장의 푸른 풍경이 눈에 들어옵니다. 가끔 방목되어 있는 소들을 볼 수도 있습니다. 시골 동네라고 인터넷 로밍도 중간에 끊기고 들어오기를 반복합니다. 그렇게 달리던 차가 어느 구간에서 천천히 달리더니 중간에 멈춰서 버립니다. 무슨 문제인지 기차는 움직이지 않고 아무것도 없는 풀밭에 소 몇 마리만 지나다니기 정말로 한적하기가 그지없습니다. 부족한 시간에 애를 태우며 속만 새까맣게 타들어갑니다.


퓌센으로 가는 기차는 한 시간을 타고 중간 역인 Biessenhofen에 내려서 환승을 해야 합니다. 환승 시간이 11분 정도 여유가 있고 기차도 제 때 왔기 때문에 별 문제없을 줄 알았는데, 기차가 중간에 15분이나 멈춰서는 바람에 영락없이 차를 놓치게 생겼습니다. 차가 1시간 간격이기 때문에 놓치면 환승역에서 1시간을 죽치고 기다려야 합니다. 결국 Biessenhofen 역에 도착해 시간을 보니 이미 기차 출발 시간에서 2분이 지난 상황입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기차역엔 덩그러니 저 혼자 남게 됩니다. 인터넷도 안 터지고 주변에 아무것도 안 보이는 시골 간이역에 미아가 되어 버린 겁니다. 플랫폼 건너편에 작은 역사가 있어서 정보나 좀 물어볼까 역사 문을 두들기지만 영업을 안 하는 것 같습니다. 완전히 망했다고 역사 앞에서 망연자실하고 있는데 플랫폼만 하염없이 바라볼 뿐입니다. 그런데 이게 웬걸 반대편 플랫폼에서 아까 지나갔을 기차가 다가오는 게 보입니다. 저는 허겁지겁 서둘러서 간신히 기차에 타는 데 성공합니다. 알고 보니 이 기차도 연착이 돼서 도착이 늦었던 겁니다. 연착에 연착이 겹쳐 운이 좋게도 기차에 타게 된 것과, 역 주변에 뭐 있나 어슬렁거리다가 진짜로 기차를 놓칠 뻔한 것을 생각하며 가슴을 쓸어내립니다.

오지에 나홀로 버려진 기분을 잠시나마 만끽(?)해봅니다.
진짜 아무도, 아무것도 없어
연착에 연착이라니 세상사 새옹지마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닌가 봅니다
놓치지 않아서 다행이야

퓌센 역에 도착하니 정말 사람이 한 바구니입니다. 역에서 티켓 판매소까지 가는 버스에 대기 줄이 엄청 깁니다. 버스 한 대를 다 채우고도 줄이 꽤 남아 다음 버스를 기다립니다. 버스를 타고 가는 길에 창밖의 풍경을 보니 완전히 첩첩산중입니다.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절벽과 알프 호수, 그리고 산중에 숨어 있는 듯이 간신히 보이는 성들을 보니 완전히 도시 문명에서 벗어나 판타지 세상 속으로 들어온 기분입니다.

버스 정류장에서 벌써 오늘의 목적지가 눈에 들어옵니다
알프스라고요?! 생각해보니 여기가 스위스와의 접경지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판타지스러운 분위기를 느끼기 위해 퓌센으로 찾아오는 모양입니다. 티켓 판매소엔 인기 있는 놀이기구 대기줄처럼 사람이 한가득 합니다. 대기줄 시작 지점에는 오후 3시부터 관람이 가능하다는 팻말이 붙어있습니다. 이제 겨우 오전 11시인데 말이죠. 미리 예약을 했으면 좋았을 텐데, 3일 전에 예약하려고 보니 이미 예약이 꽉 차서 현장 구매밖에 방법이 없었습니다. 다소 기다리는 걸 감안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으로 왔는데, 한 시간 반을 기다려서야 겨우 티켓을 끊게 됩니다. 굳이 외관만 둘러보고 올 거면 표를 끊을 필요가 없지만, 이왕 온 거 역시 성 내부 투어까지 하고 가야 하지 않을까요?

잘 세운 계획은 정말 많은 시간을 아낄 수 있습니다

노이슈반슈이츠의 가이드 투어까지 시간이 많이 남기에, 기왕 퓌센으로 온 거 볼 거 다 보고 가자고 노이슈반슈타인 성과 함께 호엔슈방가우 성, 박물관 티켓까지 세트로 구매합니다. 티켓마다 가이드 투어가 시작하는 시간이 적혀 있는데, 박물관, 호엔슈방가우, 노이슈반슈이츠 순으로 관람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한참을 기다려서야 겨우 받을 수 있었던 티켓들

첫 방문지인 박물관은 바이에른 왕가와 퓌센의 성들에 대한 자세한 역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몇 대 왕의 누가 무엇을 했고 누가 중요했고... 개요를 넘어서 역사 교과서를 보는 듯한 자세한 설명에 질려 금방 나가기로 합니다. 박물관 앞 뜰에 앉아 알프 호수를 보면서 방금 본 이야기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해 봅니다.

바이에른 박물관은 솔직히 재미있진 않습니다
알프 호수를 보며 머릿속을 비어 봅니다

박물관을 나와서 호엔슈방가우 성으로 향해봅니다. 호엔슈방가우 성은 황토색 빛을 띤 성으로 막시밀리안 2세가 산속에 지어진 폐성을 발견하고 재건한 성입니다. 낮은 언덕에 위치해서 쉽게 올라갈 수 있는데, 노이슈반슈타인 성의 주인인 루트비히 2세가 성장기를 보낸 성이라고 합니다. 비교적 성 크기가 크지 않고 언덕이 낮은 곳에 있어서 주변 경치가 나무에 다 가립니다. 그나마도 예정된 도착시간보다 늦게 도착해서 가이드 투어의 반 정도를 스킵해 버립니다. 신기하게 오디오 투어인데도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 팀으로만 움직일 수 있어서 시간을 놓치면 원래 입장 자체가 안된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살짝 투어를 망쳐버린 것으로 텐션이 완전히 떨어져 제대로 성 구경할 기분도 나지 않습니다. 노이슈반슈타인에서 한 번에 터뜨릴걸 기대하면서 다음 목적지를 향합니다.

시작지점에서 호엔슈방가운고 올라가 봅시다.
꽃마차는 조금 사치인거 같군요.
경사길을 따라 올라가다보면
호엔슈방가우가 보입니다
입구로 들어가보면
살짝 맛이 간(?) 백조의 분수상이 보입니다

노이슈반슈타인 성에 올라가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40분가량 산 길을 올라가는 것이고, 하나는 마차를 타고 올라가는 것이고, 하나는 버스를 타고 올라간 다음 걸어가는 겁니다. 시간에 여유가 있어서 걸어 올라가기로 하는데 깊은 산길을 등산하며 산림욕을 하는 느낌입니다. 등산길 좌우로 마차가 다니는 길이 있는데 말들이 터벅터벅 걸어가는 게 꽤 웃깁니다. 다만, 말들이 다니면서 똥을 하도 많이 싸다 보니까 올라가는 길바닥은 그야말로 말똥 천지입니다. 가능한 안 밟기 위해서 피해 다닌다고 해도 말똥 냄새가 유쾌한 산행길을 다 망치는 느낌입니다. 낭만이고 여유고 서둘러 올라가는 데 길이 꽤 가파른지라 고생을 합니다. 특히 요즘 너무 걸어 다니며 발바닥과 족저근막에 계속 피로가 누적된지라 상태가 말이 아닙니다. 이렇게 고생한 보람이 있기를 부디 바랍니다.

노이슈반슈타인을 향해 '걸어서' 출발
마차가 지나갈 때마다 한 쪽으로 길을 비켜주어야 합니다. 말이 푸드득푸드득 변을 놓는 모습에 충격이 가시질 않습니다

멀리서 볼 때에는 잘 몰랐는데 가까이서 보니까 노이슈반슈타인 성은 엄청 거대한 성입니다. 가까이서 카메라에 담으려고 하니까 성의 모습을 제대로 담을 수가 없습니다. 아까 호엔슈방가우 성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크고 구경 온 사람도 많고 한 번에 이동하는 투어 그룹의 규모도 다른 듯합니다. 성에서 내려다보는 마을, 호수, 절벽이 어우러지는 풍경은 생각했던 것 보다도 더 비현실적으로 느껴집니다. 대자연 속에 사람의 흔적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간 느낌이랄까요?

거대한 성의 크기에 압도당합니다
성의 뒷편은 공사가 한창입니다
파노라마로 담아보려고 애를 씁니다만 생각보다 사진이 잘 나오지가 않군요

오디오 가이드를 들으며 진행한 노이슈반슈타인 성의 내부 투어는 참 흥미롭습니다. 19세기 후반에 들어서 순전히 루트비히 2세의 취미로 지어진 성은 상당히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유럽의 다양한 양식들을 한데 모아서 방마다 그 모습들을 재현해 놓은 성 내부는 각 방마다 매우 독특한 양식들을 담고 있습니다. 어떤 방에서는 고딕 양식의 엄숙함이, 어떤 방에서는 비잔틴 양식의 화려함이 있는 식으로 말이죠. 어떤 방은 인공 석회동굴로 꾸며놓은 방까지 있습니다. 여기에 19세기 말 근대적인 양식이 섞여 들어가니 굉장히 기묘한 느낌이 가득합니다. 20세기를 코앞에 두고 근대의 절대 왕권을 그리워해 그 양식들을 흉내 내었다는 루트비히 2세의 생각이 너무 강렬하게 담긴 궁전입니다. 게다가 각 방마다 바그너의 오페라를 벽화로 재현해 놓은 모습에서 덕질의 규모가 차원이 다름을 느낄 수 있었죠. 이렇게 공을 들여 지은 성이지만 본인은 성의 완성도 보지 못하고 강제로 퇴위당해 의문사를 당했으니 안타깝기는 했을 겁니다. 한편으로는 바이에른 왕가가 무너져가는데 국가규모의 덕질이나 하고 있었으니 그런 결말은 어쩔 수 없는 수순이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대신 기능적인 의미가 하나도 없는 덕질의 산물이었던 만큼 더 아름다운 성이 된 것이 아닐까 아이러니함도 느낍니다.

노이슈반슈타인 성으로 들어가 봅시다
배낭을 앞으로 메고 입장을 기다리는 우리 타임 투어 팀
성 내부에 있는 엘레베이터의 괴리감이란
성에서 바라보는 퓌센의 정경은 아름답습니다
성이 너무 거대해 사진에 담을 수 없어, 대신 모형을 담기로 합니다
인상적인 방들이 이어지는데 내부 촬영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나가는 문을 열기가 조금 아쉽군요.

성 내부 투어를 마치니 성 전체 모습을 담고 싶은 욕심이 생깁니다. 성 뒤편으로 산길을 더 올라가면 마리엔 다리가 있습니다. 철골 구조에 목재 바닥으로 된 다리는 사진을 찍는 사람들로 빼곡합니다. 들어갈 공간이 없어 한참을 기다린 다음에야 겨우 다리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삐그덕 거리는 바닥에 현기증을 느끼며 조심히 걸어 나가 보니 노이슈반슈타인 성의 전경이 눈에 확 들어옵니다. 특히 양쪽에 절벽을 끼고 화창한 하늘 아래 숲이 우거진 한가운데 보이는 노이슈반슈타인 성은 드디어 동화 속 한 장면 같이 느껴집니다. 상당히 고생하면서 올라온 길인데 이런 절경을 보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더 고생을 해도 괜찮을 듯합니다.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좁은 다리에서 어떻게든 틈을 만들어 사진을 연발하며 찍어봅니다. 힘들게 올라왔으니 기념사진도 한 장 찍고요.

어떻게든 이 성을 제 사진에 담는 게 오늘의 소원입니다
그러면 더 고생을 해봐야겠죠
자연에 가려진 성의 모습이 느낌이 좋습니다
그림지도 지치는 하루의 여정입니다
드디어 도착한 마리엔 다리는 사람이 미여터지는 군요.
이 사진 한 장만으로 오늘의 고생은 값어치를 했을 겁니다
정말이라고요. 저 뿌듯한 얼굴을 보시라고요.

마리엔 다리에서 성 구경까지 마치니 오늘 하루 이루고 싶었던 일은 다 이룬 듯합니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고 박물관, 호엔슈방가우 성을 거치며 들었던 불안감은 노이슈반슈타인 성을 보면서 사르르 사라진 듯합니다. 깊은 자연 속을 해치고 들어간 끝에 드디어 숨겨둔 보물을 발견한 기분입니다. 괜히 디즈니가 노이슈반슈타인 성을 배경으로 신데렐라도 만들고 로고도 박은 게 아니라는 걸 새삼 느끼게 됩니다. 마리엔 다리를 건너 절벽을 등반하면 더 높은 곳에서 성을 볼 수 있지만 그만 만족하기로 합니다. 이미 피로 누적으로 몸이 거덜이 난 상탠데 괜히 욕심내고 무리하면 큰일이 날지도 모릅니다.


아까 걸어 올라왔던 길도 버스를 타고 내려옵니다. 그리고 그대로 올 때 탔던 기차를 타고 다시 뮌헨으로 돌아갑니다. 오늘 이동 수단만 다섯 시간을 타고, 티켓팅한다고 두 시간을 서 있었고, 등산만 세 시간을 한 어머어머 한 날입니다. 뮌헨에 도착하니까 8시쯤 됐는데 다시금 돌아봐도 대단한 하루입니다. 숙소로 도착한 후 다리에 파스를 바르고 마사지를 하며 하루의 피로를 달랩니다. 글을 쓰고 정리해야 하는데 여력도 없이 그대로 잠이 드는, 퓌센의 하루입니다.

다시 입구로 돌아오니 이미 텅텅 비어버린 티켓판매소
하루를 마무리 짓는 저녁이 생각보다 맛이 없었던 건 중요하지 않은 이야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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