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름다운 정원'이 남긴 메시지, 지나간 독서가 남긴 인생의 흔적
스쳐간 책들은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누구나 책을 읽을 때 최고의 집중력을 발휘합니다. 그러나 내가 읽은 책들은 대개 기억 속에서 희미하게 흩어집니다. 처음 책장을 펼칠 때의 설렘이나, 밑줄 그어둔 문장의 울림도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곤 하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책들이 헛되이 지나간 것은 아닙니다. 사상가이자 시인인 랄프 왈도 에머슨은 “나는 내가 읽는 책들을 내가 먹은 식사들보다 더 기억하지 못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나를 만들었다.”고 했는데요. 그의 말처럼 읽은 책은 마치 몸에 흡수된 음식처럼, 우리의 생각과 감정, 삶의 태도 속에 스며듭니다. 책 한 권이 인생을 직접 바꿔놓을 순 없지만, 스쳐간 독서는 작은 결을 남겨 결국 나라는 사람을 빚어냅니다. 즉, 독서는 기억의 소멸 과정을 거치는 것 같지만, 인생의 축적을 만들어가는 과정인 것이죠. 겉으론 사라진 것 같지만 내면의 어딘가에 퇴적되어, 어느 날 불현듯 떠오르고 삶을 움직이는 힘이 됩니다.
제가 걸어온 길을 말하자면 너무 뻔한 이야기일지도 모릅니다. 지방 방송국의 라디오 PD로 삼십 년 가까이 일했고, 책과 함께하는 프로그램을 기획하며 성과도 얻었습니다. 때로는 소외감을 느꼈지만 흔들리지 않고 신념을 지키며 나름의 길을 만들어왔습니다. 그렇다고 특출난 것은 아닙니다. 누구나 사람은 자신의 분야에서 최선을 다해 삶을 영위하지요. 그러다보니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거에요.
“그래서 어쩌라고? PD가 열심히 일했으니 박수라도 쳐달라는 거야?”
맞습니다. 저의 삶도 다른 사람과 비슷한 길을 걸었고 평범합니다. 하지만 비슷비슷해 보이는 삶의 이야기 속에도 우리를 공감하게 하는 특별한 무언가가 숨어 있기 마련입니다. 그것이 바로 스토리의 힘이자, 책이 우리에게 주는 매력이 아닐까요.
저는 한동안 오전 11시에 시사 프로그램을 진행한 적이 있습니다. ‘중앙이 아닌 지역의 눈으로 세상을 보겠다’는 포부로 시작했지요. 로컬에서 피디 저널리즘을 구현해보고 싶었죠. 뜻밖에도 주부들의 반응이 폭발적이었습니다. 아침 살림을 마친 뒤 차 한잔하며 듣기 딱 좋다는 것이었습니다. 인터뷰를 엮어낸 구성이 마치 잡지를 읽는 듯하다는 청취자들의 평가는 제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열광한 것은 본격적인 시사 대담이 아니라, 짧게 끼워 넣었던 ‘시민컷’이었습니다.
“안녕하세요, 중앙공원 옆에서 호떡집을 하고 있는 ○○○입니다. 지금 여러분께서는 저와 함께 라디오매거진 오늘을 듣고 계십니다.”
내가 사는 이 도시의 익숙한 장소와 소리, 현장의 목소리가 오히려 더 큰 울림을 줬던 것이지요. 저는 그때 배웠습니다. 큰 주제나 날카로운 분석 못지않게, 작은 일상의 목소리가 더 강하게 사람들에게 스며든다는 것을요.
저는 한국 최고의 인터뷰어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 시간짜리 대담 프로그램에서 패널과의 대화를 음악처럼 구성했습니다. 대화의 흐름이 끊기지 않게 조율하면서 질문과 답변이 리듬을 타게 이끌었지요. 덕분에 듣기에 지루하지 않고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 대형마트 노동자들의 현실을 다룬 방송으로 ‘이달의 PD상’을 받기도 했습니다. 사회적 주제를 깊이 있게 다룰 수 있었던 것도 책과 독서가 제 사고의 기반이 되어준 덕분이었습니다.
라디오 프로그램을 기획할 때마다 책을 다루지 않은 적은 없었습니다. 시사 프로그램에 배치한 ‘책 읽는 CEO’ 코너에서는 2백여 명의 CEO들이 자신이 읽은 책을 소개했습니다. 개인적으로도 책은 제 일상의 중심이었습니다. 신간 기사를 보면 우선 장바구니에 담고, 절판된 책은 중고 거래로 어렵사리 구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뒤였습니다. 책을 구할 때까지는 조바심을 내다가도 내 손에 들어온 순간 마음이 풀리며, 읽지 않고 쌓아두는 책들이 늘어갔습니다. 그럴 때마다 장정일 작가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내가 읽지 않은 책은 이 세상에 없는 책이다.”
책을 사두고도 읽지 못하면 결국 내 삶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따끔한 경고였지요.
30년 가까이 방송과 독서캠페인을 통해 다룬 책들은 셀 수 없을 만큼 많습니다. 그중 대부분은 스쳐갔습니다. 그러나 몇몇 책은 제 삶에 깊은 흔적을 남겼습니다. 특히 ‘책 읽는 청주’ 캠페인을 이끌며 선정했던 열여섯 권의 책들은 서재 한 쪽에 따로 모셔두었습니다. 그 책들은 단순한 독서를 넘어, 시민들과 함께 읽고, 함께 공감했던 특별한 시간의 기록이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2009년, 용산 참사가 일어났을 때 우리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함께 읽었습니다. 말없이 책을 펼치며, 슬픔과 분노를 함께 나누던 그 시간은 제게 잊을 수 없는 경험이 되었습니다. 책은 현실의 상처를 드러내고, 함께 슬퍼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책 읽는 청주’ 두 번째 선정 도서는 심윤경 작가의 『나의 아름다운 정원』이었습니다. 동구하는 아이의 눈으로 그려낸 성장과 상실의 이야기는 많은 시민들의 마음을 울렸습니다.
세월이 흐른 뒤, 저는 이 작품을 다시 만났습니다. ‘김예림의 북살롱’ 패널인 김예림 선생님이 자신의 독서노트를 나누며 이 책을 소환했지요. 그날 방송은 마치 오래된 친구와 재회한 듯, 저를 뭉클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더 놀라운 경험은, 30주년 한겨레문학상 앤솔로지에서 만난 심윤경 작가의 신작이었습니다. 세월이 흘러 『나의 아름다운 정원』 속 주인공 동구가 가장이 되어 다시 등장한 것이지요. 동구의 입장에서 바라본 ‘다시 만난 세상’ 이야기였습니다. 그 순간 저는 깨달았습니다. 스쳐간 줄 알았던 책도 다시 돌아와 새로운 의미로 나를 찾아온다는 사실을요.
이어령 교수는 아이들을 키우는 것을 “콩나물 시루에 물을 주듯, 다 흘러버리는 것 같아도 매일 물을 주면 콩나물은 무럭무럭 자란다.”고 했습니다.
책도 그렇지요. 다 잊어버린 것 같아도, 한 문장 한 문장이 내 안에 스며들어 언젠가 내 삶을 지탱하는 뿌리가 됩니다. 우리가 읽은 책 대부분은 제목조차 기억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 책들은 이미 나를 만들고 있었습니다. 스쳐간 책들의 울림은 사라지지 않고, 나의 사고와 감정, 그리고 삶의 태도 속에 녹아들어 있지요. 결국 책은 흘러가지만, 흘러간 만큼 우리를 키웁니다.
이제 당신에게 묻고 싶습니다.
잊은 줄 알았던 책 가운데, 불현듯 떠오르는 책은 무엇입니까?
그 책은 언제, 어떤 순간에 다시 당신을 찾아왔나요?
혹시 읽다 만 책이 책장에 쌓여 있나요?
지금은 무의미해 보일지 몰라도, 언젠가 그 책의 문장이 당신을 다시 불러낼지도 모릅니다. 당신의 삶을 바꾸는 순간은, 책장을 덮은 바로 그 책에서 시작될 수도 있습니다.
오래전 청춘의 시절에 읽고 지나간 책이 있나요?
그 책이 지금 당신의 아이들에게, 혹은 자신에게 다시 말을 걸고 있지 않습니까?
스쳐간 책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습니다.
책은 언제나 당신 안에 남아, 언젠가 또 다른 모습으로 되살아납니다.
지금 당신의 마음에 스쳐 지나가고 있는 책은 무엇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