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를 기록하며, 다시 책으로 돌아온 나
기억과 상처, 그리고 글쓰기의 딜레마
우리는 누구나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상처를 안고 살아갑니다. 상처가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그런데 상처가 아픈 이유는, 그것이 단순히 지나간 일이 아니라 기억으로 남아 우리를 괴롭히기 때문이지요.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 메멘토는 단기 기억상실증에 걸린 주인공의 복수를 그리며, 이런 명대사를 남겼습니다.
“기억은 기록이 아니라 해석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기억은 객관적 사실에서 멀어지고, 점점 더 주관적 해석으로 덧칠됩니다. 특히 실패의 기억은 ‘그때 너는 부족했어’라는 날카로운 자기비난으로 되살아나곤 하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망각할 수 없다면, 차라리 기록하고 다시 해석하는 방법이 필요합니다. 글쓰기는 상처를 해체하고, 기억을 다시 해석하게 만드는 도구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글쓰기는 실패와 좌절을 안겨주기도 합니다. 많은 이들이 책을 쓰겠다고 결심했다가 중도에 무너집니다. 글쓰기가 생각보다 훨씬 고통스러운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그 길을 걸었습니다.
라디오 PD로 살아온 30년의 경험, 그리고 ‘책읽는 청주’ 캠페인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습니다. 도시의 정체성은 ‘책’이라고 믿었고, 그것을 공적 세계에 증명하고 싶었습니다.
글쓰기의 첫 주제는 당연히 ‘책읽는 청주 선정도서 서평’이었습니다. 열일곱 권의 책, 작가들과 함께했던 북콘서트, 시민들과 나눈 기억들. 이 모든 것을 책 한 권에 담아내고 싶었습니다. 방송처럼 기획하면 된다고 믿었지요.
자부심과 열정이 제 등을 떠밀었습니다. 그래서 글의 서두는 이렇게 시작했습니다.
“에머슨은 ‘같은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 책을 읽은 사람들 사이에 끈이 생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17권을 함께 읽은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연결되어 있을까? 지금부터 책읽는 PD가 들려주는 17가지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이 문장을 쓰며 가슴이 뛰었습니다. 드디어 나의 책이 시작된다고 생각했지요.
글쓰기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위해 명로진 작가의 인디라이터 연구반에 등록했습니다. 수십 권의 책을 집필한 명 작가는 ‘대기설법(對機說法)’을 강조했습니다. 글쓰기도 독자의 수준과 맥락에 맞춰야 한다는 뜻이었지요.
저에게 글쓰기 수업은 혹독했습니다. 습작 과제를 제출하면 날카로운 강평이 쏟아졌지요. 저는 방송 대본에 길들여져 있었기에 글이 지나치게 정형화되어 있었습니다. 감정의 숨결이 빠진, 딱딱한 칼럼식 문장이었지요.
동료 수강생들은 저마다 독특한 색깔을 드러내며 고군분투했습니다. 그 열정 속에서 저는 한 가지를 깨달았습니다. 글쓰기는 방송처럼 제작하는 일이 아니라, 끝없는 자기 노출과 해체의 과정이라는 것을요.
가끔 그릇된 확신은 큰 화를 부른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글쓰기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과욕을 부렸습니다. 방송처럼 구성을 잡아 3부 40장짜리 거대한 기획안을 세웠습니다. 제목은 <책읽는 도시를 프로듀싱하다>.
원고는 쏟아져 나왔습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썼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방향성이었습니다. 책 서평을 쓰려다 조선시대 ‘뒷골목 풍경’ 이야기로 옮겨가고, 다시 캠페인 에피소드로 돌아오는 등 맥락이 끊겼습니다. 서평은 독후감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고, 캠페인 기록은 보고서처럼 나열되었지요.
그때 김성신 평론가는 이렇게 충고했습니다.
“박은선 스타일의 서평을 쓰세요. 책을 요약하지 말고, 왜 방송 미디어 캠페인에 적합했는지 PD의 시각으로 풀어내세요.”
명로진 작가 역시 핵심을 짚었지요.
“이 많은 이야기를 다 어떻게 쓰시려고요…”
그 말이 의미하는 바를 알면서도, 저는 멈추지 못했습니다. 열정에 사로잡힌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렸습니다. 그리고 결국, 무너졌습니다.
원고는 끝내 완성되지 못했습니다.
산만한 구성, 과도한 분량, 주제의 부재… 무엇 하나 만족스럽지 않았습니다.
그 실패의 기억은 제 자존감을 무너뜨렸습니다. 방송에서는 나름 인정받았던 제가, 글쓰기 앞에서는 초라한 초보자로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나는 작가가 될 수 없구나.”
이 생각이 가슴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글쓰기에 대한 상처는 오래도록 저를 괴롭혔습니다.
그럼에도 시간이 흐른 뒤, 저는 다시 책을 펼쳤습니다.
왜일까요?
첫째, 책은 저에게 치유의 공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실패한 글쓰기의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책 속의 문장이 제 마음을 어루만졌습니다.
둘째, 책은 다시 시작할 용기를 주었습니다. 실패를 통해 알았습니다. 글쓰기는 단번에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책 속에서 배우고 다시 써보는 끝없는 순환이라는 사실을요.
결국 저는 글을 쓰기 위해 다시 책으로 돌아왔습니다. 책을 읽는 시간이 곧 제 글쓰기의 재활 훈련이 되었고, 그 과정을 통해 조금씩 제 목소리를 회복했습니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말했습니다.
“글을 쓰고 발표하는 순간, 공적 세계로 진입한다.”
이 말은 동시에 ‘글쓰기는 함부로 할 수 없다’는 경고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제 깨달았습니다. 실패했다고 해서 글쓰기가 끝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요. 실패한 글쓰기는 또 다른 글쓰기의 시작점입니다.
기억은 해석이고, 글쓰기는 그 기억을 새로운 의미로 다시 빚어내는 과정입니다. 실패의 기억조차도 글감이 되고, 그 고통을 해석하는 순간 다시 창조가 시작됩니다.
이제 묻고 싶습니다.
당신은 어떤 실패의 기억을 품고 있습니까?
그 기억이 아직도 날카롭게 당신을 찌르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 기억이 이미 해석되어 다른 의미로 변해가고 있습니까?
도전했다가 실패한 경험이 있나요? 그것은 좌절이 아니라, 당신만의 이야기를 써 내려갈 초고일지 모릅니다. 실패를 기록해 보세요. 그 순간, 실패는 배움이 됩니다.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쓰지 못한 원고가 있습니까?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나요? 괜찮습니다. 그 기억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다만 다른 방식으로 당신의 글쓰기를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지금 당신이 다시 써야 할 ‘실패의 이야기’는 무엇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