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아마추어, 간송 전형필이 남긴 삶의 증거
위로와 용기를 준 이야기 조각들
위대한 아마추어, 간송 전형필이 남긴 삶의 증거
책은 읽는 순간에만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책장을 덮은 뒤에도 여전히 마음속에서 살아 숨 쉬며, 작은 파편 조각이 되어 삶의 어느 장면에선가 불쑥 솟아올라 빛을 발합니다.
‘섬에 있는 서점’에서 피크리는 이렇게 말하죠.
“인간은 섬이 아니다. 한 권의 책은 하나의 세상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곧 하나의 세상을 경험하는 일이고, 그 세상의 조각들은 사라지지 않고 남아 우리를 위로합니다. 힘든 순간에 떠올라 다시 걸음을 내딛게 만드는 힘이 되지요.
우리는 모두 크고 작은 상처와 좌절을 겪습니다. 그러나 그때마다 누군가의 말, 한 권의 책, 잊히지 않는 문장이 우리를 다시 일으켜 세웁니다. 그 문장은 실패를 견디게 하는 힘이 되고, 좌절에서 일어나게 만드는 용기가 됩니다. 책은 결국, 나를 지탱하는 이야기의 파편을 남겨주는 매개체입니다.
저 역시 책의 파편에 의해 다시 일어날 수 있게 된, 부끄럽지만 소중한 경험이 있습니다.
목표 분량의 3분의 1쯤 원고를 썼을까요.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그때까지 작성한 원고를 전기문학의 대가 이충렬 작가에게 그대로 보낸 것입니다.
책읽는 청주는 열두 번째 독서 캠페인에서 이충렬 작가의 ‘간송 전형필’을 원북으로 선정했습니다. 특별한 북콘서트를 기획하며 작가님과 깊은 인연을 맺을 수 있었지요. 그런데 감히, 그분께 초고 파일을 보냈다니! 지금 돌이켜보면 만용이었고, 어리석은 도전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충렬 작가는 제 원고를 친히 읽고 장문의 평을 보내주셨습니다.
이야기가 흩어져 연결되지 않고, 동기가 불분명하다는 점을 지적하셨습니다. 직접적으로 “이건 책이 될 수 없다”고 말씀하지 않았지만, 그 메시지는 행간에서 뚜렷하게 읽혔습니다. 대신 작가님은 제 열정과 의지를 존중하며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뭔데?”
그 질문은 제 마음을 깊이 파고들었습니다.
그날 이후로 한동안 원고 파일을 열지 못했습니다. 생각할수록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다른 사람의 출간 소식이 들릴 때마다 부러움과 자괴감이 뒤섞여 마음이 무너졌지요. 출판사들의 완곡한 거절은 연이어 돌아왔고, 저는 스스로의 글쓰기를 ‘휴지조각 같은 일’로 여겼습니다. 책을 낸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때 처음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뒤, 저는 책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시작점에는 ‘간송 전형필’이 있었습니다.
책을 읽고 또 읽으며 깨달았습니다. 간송은 위대한 아마추어였다는 것을.
그는 전문적 연구자도, 제도권 학자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나라의 혼을 지키겠다는 신념 하나로 거대한 삶의 증거를 남겼습니다.
청년 전형필은 일제강점기의 혹독한 현실 속에서, 빼앗기고 사라져가는 우리 문화재를 지켜냈습니다. 일본인들에게 넘어가는 귀중한 유물을 사들여 다시 우리 땅에 남겼지요. 남들이 보기에는 무모한 집착이었을지 모르지만, 그 무모함이 훗날 한국 미술사의 기둥을 세웠습니다. 간송은 거대한 실패의 가능성을 무릅쓰고도 자기 길을 걸었습니다. 그 사실 앞에서, 저의 실패와 좌절은 부끄러운 일이었지만 한낱 작은 굴곡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다시 책을 열었고,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잊을 수 없는 장면이 있습니다.
간송 북콘서트의 오프닝 무대에 선 무용가 김평호 감독은 무대를 캄캄하게 만든 뒤, 단호한 목소리로 낭독을 시작했습니다.
“일제강점기 식민지 시대! 일본인의 손으로 넘어가는 수많은 조선의 얼과 혼!”
현의 울림과 함께 펼쳐진 그 장면은, 마치 간송의 절규가 시대를 넘어 무대 위로 되살아나는 듯했습니다. 김 감독은 온몸으로 책을 읽었던 것이었습니다. 춤과 목소리로 텍스트를 재창조했지요.
그때 저는 깨달았습니다. 책은 단순히 읽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책은 또 다른 창작을 낳고, 또 다른 이야기를 이어가며, 우리 안에 남아 위로가 되고 용기가 된다는 것을.
그날의 공연은 제 마음속 깊이 남아, 무너진 자존심을 다시 일으켜 세워주었습니다.
간송 전형필의 삶은 우리에게 한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전문가가 아니라도, 한 사람이 세상을 지킬 수 있는가?”
그 대답은 분명합니다. 예, 위대한 아마추어가 세상을 지킬 수 있습니다.
간송은 누가 자신에게 책임을 부여한 것도 아니었지만, 스스로 선택한 길을 끝까지 걸었습니다. 그 삶의 흔적이 오늘 한국의 문화 자산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의 삶은 이렇게 속삭입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 무모해 보여도 좋다. 중요한 건 네가 어떤 신념을 품고, 무엇을 남기려 하는가다.”
저는 그 메시지를 가슴에 새기며 글쓰기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실패는 여전히 제 곁에 있지만, 이제는 두렵지 않습니다. 실패조차도 나만의 증거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제 묻고 싶습니다.
당신에게 가장 오래 남아있는 문장은 무엇인가요?
왜 그 문장은 아직도 잊히지 않고, 당신의 마음 한 구석을 붙들고 있을까요?
지금 당신은 자기표현과 커리어, 나만의 목소리를 찾는 과정에 있겠지요.
혹시 실패 앞에서 주저앉은 적이 있나요?
그렇다면 떠올려 보세요. 당신을 다시 일으켜 세운 문장은 무엇이었나요?
그 문장이 당신의 정체성을 만들어가는 단서일 수 있습니다.
지금 당신은 삶을 돌아보고, 다시 좌표를 세우는 시기를 지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함께 읽은 책 한 권, 나눈 이야기 하나가 여전히 마음속에 남아 있지 않나요?
그 문장이 바로 당신을 공동체와 연결시키는 다리가 될 것입니다.
지금, 당신 안에 남아 있는 잊히지 않는 이야기 조각은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 조각은 앞으로의 삶에서 어떤 증거가 되어 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