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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가장 오래된 방송이다

PD의 시선으로 본 북 큐레이션 법칙

by pdcafe

책은 가장 오래된 방송이다

— PD의 시선으로 본 큐레이션 법칙


오늘날 우리는 수많은 플랫폼 속에서 살아갑니다. 라디오, 텔레비전, 유튜브, 팟캐스트, SNS까지 정보와 감정을 담아내고 퍼뜨리는 수단은 무궁무진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매체보다 먼저 존재했고,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플랫폼이 있습니다. 바로 ‘책’입니다.

책은 단순한 종이 묶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류가 최초로 만들어낸 방송국이자 가장 오래된 플랫폼입니다. 책 속에는 저자의 목소리, 사상의 흐름, 시대의 공기, 그리고 감정의 진폭까지 고스란히 저장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책장을 펼치는 순간, 저자는 수백 년의 시간과 수천 킬로미터의 거리를 뛰어넘어 지금 우리 앞에서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라디오 PD로서 수많은 콘텐츠를 다뤄본 제 경험에 비추어도, 책만큼 강력하고 오래 지속되는 방송은 없습니다. 방송은 송출 순간에 사라지지만, 책은 세대를 뛰어 넘어 메시지를 보존합니다. 책은 ‘사람의 생각과 감정을 기록한 파장’이고, 독자는 그 주파수를 맞추는 청취자입니다.

그렇다면 좋은 책은 어떤 책일까요?


PD가 방송을 프로듀싱하며 콘텐츠를 큐레이션하듯, 독자도 책을 고르고 삶을 프로듀싱하기 위해 큐레이션해야 합니다. 좋은 책은 재미와 감동을 넘어섭니다. 독자의 세계관을 확장시키고, 인생의 기초 체력을 키워줍니다. 그 과정을 거치며 한 사회의 문화적 자산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지요.


저에게 그런 경험을 안겨준 책 중 하나는 일본인 저자 노마 히데키가 쓴 『한글의 탄생』이었습니다. 처음 책을 접했을 때, 솔직히 반신반의했습니다. ‘일본인이 한글을 얼마나 알겠어? 그냥 감탄 정도를 늘어놓는 책 아니겠나?’ 생각했지요. 하지만 책장을 펼치자마자 제 생각은 완전히 깨졌습니다. 미술을 전공한 노마 히디키는 한글에 매혹돼 독학을 시작했고, 결국 한국어학을 전공하며 학문적 탐구로 나아갔습니다. 그리고 그 집요한 여정 끝에 『한글의 탄생』을 펴냈습니다.


작가는 책의 부제를 ‘문자라는 기적’이라고 했습니다. 그 문장 그대로, 그는 한글을 단순한 문자 체계가 아닌 인류사적인 사건으로 바라봅니다. 책 속에서 저자는 ‘말해진 언어’가 어떻게 ‘쓰여진 언어’가 되는지를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공기의 떨림으로 존재하는 소리를 어떻게 시각적인 부호로 붙잡을 수 있었을까? 노마 히데키는 이 과정을 다큐멘터리 감독처럼 그려냅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저는 경이로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우리가 늘 쓰고 있는 글자, 너무 당연해서 깊이 생각해본 적 없는 문자에 대해, 이방인의 눈으로 바라본 신비로움이 새삼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대목은, 저자가 훈민정음을 통해 ‘음소’라는 개념에 도달한 부분이었습니다. 음소란 단어의 의미를 구별할 수 있는 최소 단위의 소리인데, 서구 언어학자들이 20세기 들어서야 개념화한 이 이론을 세종과 집현전 학자들은 이미 15세기에 구현해냈다는 사실을 짚어낸 것입니다.

저는 라디오 대본을 쓰며 늘 ‘소리’를 다룹니다. 소리를 문자로 옮기고, 그 문자가 다시 음성으로 변환되어 청취자에게 닿습니다. 방송 제작 과정 전체가 사실상 ‘음 → 문자 → 음’의 순환입니다. 그런데 훈민정음 창제의 원리가 바로 이 구조를 담고 있었다니! 저는 마치 제 직업의 뿌리를 새롭게 발견한 듯한 전율을 느꼈습니다.

『한글의 탄생』은 청주의 독서 캠페인 ‘책읽는 청주’ 후보 도서로도 거론되었습니다. 다만 한 가지 걸림돌이 있었습니다. 그동안 이 캠페인은 국내 작가의 책만을 다루는 것이 관행이었습니다. 외국인 저자의 책은 배제했지요. 하지만 선정위원회는 뜨거운 논의를 거쳤습니다.

“한국인보다 더 깊이 한글을 사랑하고 연구한 이 외국인의 책을 외면할 수 있겠는가?”

결국 위원회는 선정 기준을 바꿨습니다. 외국인이라도 한국을 주제로 삼아 심도 있게 다룬 책이라면 후보로 올릴 수 있다는 조항을 새로 만든 것입니다. 『한글의 탄생』은 최종 선정도서에는 들지 못했지만, 캠페인의 기준을 바꾸어 놓은 상징적인 책이 되었습니다.

제가 추천한 도서가 선정되지 못한 아쉬움이 컸지만 저는 그 장면을 잊을 수 없습니다. 한 권의 책이 선정위원들의 인식을 바꾸며 새로운 규칙을 만들어낸 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확장된다면 사회적 합의와 제도를 변화시킨다는 생각을 했지요. 나아가 책이 곧 방송이고 플랫폼이라는 사실을 생생하게 체감했습니다.


이 경험을 통해 저는 책을 고르고 추천하는 기준을 새롭게 정리하게 되었습니다. 라디오 PD로서 수많은 콘텐츠를 큐레이션해온 시선이기도 합니다.

좋은 책의 조건은 세 가지입니다.


깊이

저자의 치열한 탐구가 담겨 있어야 합니다. 노마 히데키처럼, 한글이라는 대상을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학문적 열정으로 파고든 깊이가 책의 무게를 만듭니다.


보편성

특정 민족이나 집단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대신, 인류 전체가 공감할 수 있는 메시지를 담고 있어야 합니다. 『한글의 탄생』은 한글을 넘어 문자와 언어 일반에 대한 보편적 성찰을 이끌어냈습니다.


전달력

아무리 깊은 내용이라도 독자가 이해할 수 있도록 전달하는 힘이 필요합니다. PD가 청취자에게 맞는 언어로 내용을 재구성하듯, 저자도 독자를 고려한 설명을 해야 합니다.

책은 방송과 다르지 않습니다. 메시지를 잘 고르고, 알맞은 채널에 맞춰 내보내야 하며, 독자가 ‘듣고 싶다’고 느낄 수 있는 형식으로 전달해야 합니다. 결국 독서와 방송, 큐레이션의 본질은 같습니다.


이제 마이크를 당신에게 넘기고 싶습니다.

지금 당신이 읽고 있는 책은, 그저 재미있는 책인가요, 아니면 누군가와 나누고 싶은 책인가요?

만약 한 권의 책을 누군가에게 추천한다면, 그 책은 왜 당신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지나요?

그리고, 당신이 지금 추천하는 그 책은 과연 좋은 책의 세 가지 조건 — 깊이, 보편성, 전달력을 갖추고 있을까요?

책은 가장 오래된 방송입니다. 저자가 던진 메시지는 수백 년의 시간을 건너 당신에게 도착했습니다. 이제는 당신이 그 주파수를 이어 받아야 할 차례입니다.

오늘 당신이 고른 책 한 권이, 누군가의 인생을 바꾸는 가장 오래된 방송이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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