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5. 10
스페인 생활은 내게 새로운 직업을 선물로 줬다. 바로, 한국어 선생님. 나는 비토리아에 있는 작은 어학원에서 한국어를 가르친다. 선생님 역할은 낯설지 않다. 한 때는 교대 진학을 꿈꾼 적도 있고 대학생 때는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국영수와 과학, 사회까지 가르치는 과외 선생님이었다. 스페인에 오기 전에는 4,5년 정도 대학 시간 강사로 디자인 표현기법, 일러스트레이션, 아동 예술교육을 가르쳤다. 물론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를 가르치는 건 처음이다. 이른바 무면허 강사, 단지 '한국어 원어민'이라는 이유로 특별 채용된 셈이다. 긴장한 마음으로 시작한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시작한 지 7개월이나 지났다. 야매 한국어 강사는 수업 준비에 수업 시간보다 훨씬 긴 시간을 써야 한다. 덕분에 책정된 시급은 반토막이 나서 최저 시급에도 못 미친다. 이 슬픈 사실을 제외하면 뜻밖에 새로운 부업이 생긴 건 썩 괜찮다. 어떻게 내가 돈을 받고 한국어로 수다를 떨 수 있는 대화 상대를 이 곳에서 만날 수 있겠는가? 학생이 아니라 새 친구를 사귀는 기분이다.
내가 맡은 한국어 반은 총 4개 반이다. 월요일에는 한국어 초급반 수업이 있다. 온라인 수업이라 굳이 학원에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 학원에서 온라인 수업을 해도 강사가 직접 본인 노트북을 챙겨가야 해서 나는 그냥 재택근무를 한다. 월요일 수업은 학생이 두 명이다. 지난 2년간 공부했다는 40대 직장인 B와 올해 1월부터 한국어 공부를 처음 시작한 15세 S가 함께 공부한다. 한국어 선생님이 되니 외국어 공부법에 대해서 관심이 더 많아졌다. 다행히 메마른 내 스페인어 공부에도 의욕이 생겼다. 이건 좀 더 생각을 정리해서 기록해보고 싶다.
어쨌든 어제 우리는 휴가를 주제로 공부를 했다. B는 여름휴가가 2주인데, 7월 중순쯤 가족과 함께 캠핑카에서 지내면서 휴가를 즐길 것이라고 했다. S에게는 여름 방학이 있다. 여름 방학은 6월 둘째 주부터 시작해서 9월 둘째 주에 끝난다고 했다. 3개월이나 되는 긴 방학이다. 스페인은 크리스마스 때 2주 정도 짧은 방학을 제외하고는 특별한 겨울 방학이 없다. 그래서 여름 방학이 우리나라에 비해서 상당히 길다. 어린 자녀가 두 명이나 있는 B는 그 길고 긴 여름 방학을 생각하며 벌써 지친 것 같다. 한숨과 함께 짓는 미소가 약간 씁쓸하다. 직장인이자 엄마인 B에게는 길고 힘든 여름방학일런지도 모르겠다. S에게는 아직까지 특별한 방학 계획은 없다고 했다. 생각해 보면 3개월이나 되는 방학 계획을 미리 잘 세워뒀다면 그것도 좀 이상하다. 주어진 돈은 적고 자의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제한되어 있지만 시간이 많으니까 학생이다. 어른이 되면 어떻게 다를까? 어른이 되어도 쓸 수 있는 돈은 여전히 적고 자의적인 선택은 더 늘어났지만 그에 따른 책임이 더욱 심해졌다. 심지어 여유 시간은 대폭 줄어든다. B의 미소가 쓸쓸하게 느껴진 건 이 때문일까?
내가 근무하는 어학원도 일반 학교처럼 7월부터 3개월 동안 쉰다. 사설 어학원이 그렇게 긴 방학을 준다니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방학 때 학원을 더 많이 다니고 공부를 더 많이 해야 하는 것은 한국인만의 고유한 습성이던가? 어쨌든 나로서는 매우 좋다. 애초에 그 3개월 휴가 기간 때문에 일단 낯선 이 일을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긴 휴가는 고용된 자에게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설사 무급 휴가라도 말이다. 오랜만에 여름휴가가 생긴다는 생각에 설렌다. 오해는 말기를, 나는 언제나 쉬는 시간 및 휴가를 스스로에게 잘 챙겨주는 사람이다. 다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직장을 퇴사하고 유학을 가고 그림 그리는 삶을 선택한 이후로 '누군가가 허락한 정해진 일정 기간의 휴가'가 없었을 뿐이다. 서울에서 시간 강사를 할 때 대학에서 정한 여름 방학과 겨울 방학이 있긴 했지만 그 방학은 내 휴가가 아니었다. 내 본업인 작가로 일러스트레이션 페어나 전시 준비와 참여로 방학 기간에 오히려 더 바빴다. 하지만 이젠 더 이상 페어와 전시 계획이 없다. 온전히 내 시간을 잘 챙길 수 있는 기회다.
스페인에 왔지만 여전히 나의 본업은 '그림 그리는 사람'이다. 전시와 페어 참여는 하지 않아도 나는 누가 뭐래도 '더드로잉핸드'로 산다. 그래도 휴가가 생긴 건 결국 얼떨결에 얻은 부업인 한국어 강사 타이틀 덕분이다. 어떤 사람이 자기가 원하고 계획한 것만 하면서 살 수 있을까? 현재 삶이 내 뜻과는 달라도 너무 실망만 하지 말자. 현실에서 마주친 우연한 기회는 이렇게 휴가도 챙겨준다. 첫 휴가 계획? 마음은 한국에 가서 3개월 동안 있고 싶지만 올여름은 아닌 거 같다. 백신부터 잘 맞고 스페인과 한국 코로나 상황이 좀 더 안정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작년에도 올해도 한국을 못 가는 건, 가족과 친구들을 2년이 넘도록 만날 수 없다는 건 뭐라고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럽다. 코로나 때문에 가장 가고 싶은 한국을 못 가니까 어떤 여행도 그립지 않다. 그래도 여름휴가를 기다린다. 긴 휴가는 특별한 계획이 없어도 충분히 즐겁다. 아침에 일어나서 오늘처럼 이렇게 글을 쓰고 그림도 그려야지. 서점에도 가고 영화관에 가고 싶지만 내가 아직은 스페인어로 된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다. 아이패드로 전자책을 다운로드해서 읽고 넷플릭스 영화랑 시리즈도 실컷 봐야지. 휴가라고 해도 지금의 일상과 거의 비슷하겠지만 그래도 기대된다. 부업 때문에 쪼개서 쓰고 있는 나의 하루를 온전한 내 선택으로 채울 수 있는 건 분명 행운이다. 여름휴가를 기다린다. 이제 7주 남았다.
더드로잉핸드 The Drawing Hand
그림 그리는 삶.
현재 스페인에서 새로운 일상을 만드는 중.
인스타그램 : http://instagram.com/thedrawinghand.viv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