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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수신 Mar 30. 2018

목형, 모형, 아니면 목업?

바로 알고 바로 말하기 - 바로 된 디자인하기

내가 디자인을 처음 배운 곳은 지금의 국립서울과학기술대학교의 전신인, 아현동 '굴레방 다리'에 있었던 국립경기공업고등전문학교였습니다. 줄여서 경기공전, 더 줄여서는 기공이라고 불렸던 이 학교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3년제 고등학교와 2년제 전문대학이 합쳐진 5년제의 독특한 구조였습니다. 내가 입학한 다음 해부터 2년제 전문대학으로 바뀌고, 80년대 중반에는 예전 서울대학교 공대 자리인 공릉동으로 옮기면서 국립경기개방대학교로, 뒤에는 서울산업대학교로 바뀌었다가, 지금의 국립서울과학기술대학교가 된 긴 역사가 있는 학교입니다. 처음 출발은 1910년 왕립으로 만들어진 어의동실업보습학교였다고 합니다.


내가 경기공전에 입학하던 때는 아직 고등학교 입학시험이 존재하던 때여서 2월 추운 날씨에 학교에서 덜덜 떨면서 시험을 보던 기억이 어렴풋이 납니다. 입학한 후에는 옛날 영화에 신성일 같은 배우가 입고 나오던 까만 대학생 교복과 모자도 한동안 입고 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그 학교에는 네 개의 과 - 기계과, 건축과, 토목과, 그리고 공예과 - 가 있었는데, 사실 나는 그 일 년 전에 기계과에 지원했다가 떨어졌었기 때문에 1년간 재수를 하고 1973년에 공예과에 지원을 한 터였습니다. 경기공전은 꽤 들어가기가 어려운 학교였습니다. 고등학교 입시 준비를 무섭도록 시킨 경성중학교에서 나를 포함해 11명이 이 학교 기계과에 지원했다가 다 떨어지고 한 명만 붙어었으니까요. 당시에 알려져 있기로는 5년제 경기공전은 고등학교 평준화 이전 3대 일류 고등학교로 치던 경기, 서울, 경복고등학교와 비슷한 점수가 되어야 들어간다는 곳이었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학교 공예과에, 그것도 입학한 다음에 듣기로는 40명 중에 4등의 성적으로 들어갔다는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밖에 설명이 안됩니다. 옛날이야기를 이리 장황하게 하는 걸 보니 나도 이미 꼰대가 되었나 봅니다.


여하튼, 이 학교를 다니게 된 것은 디자이너로서의 인생을 사는 데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그것도 여러 번 하게 됩니다. 이름은 공예과였는데, 교과과목은 다섯 가지 전공을 배우게 되어 있었습니다. 공업 디자인, 시각 디자인, 인테리어, 목공예, 그리고 금속공예였는데, 당시는 유명한 대학들에서 조차 디자인을 응용 예술, 공업 미술, 상업 미술, 장식 미술 등으로 부를 때였으니 이 학교의 선구적인 위치를 알 수 있습니다. 모든 학생들이 이 다섯 가지를 고루 배우도록 되어 있었는데, 이때 디자인과 공예 전 분야를 넓게 배운 것이 한참 뒤, 2010년에 미국 신시내티 대학교의 디자인 학부에서 3개 학과 - Industrial Design, Graphic Communication Design, 그리고 Fashion Design - 를 담당하는 학부장의 역할을 하면서 서로 다른 교수들의 입장을 조율하고,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는 학제적 교육구조를 만드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이 학교를 다니게 될 때의 이야기 - 나의 디자이너로서의 인생을 나침반 역할을 해 준 - 몇 가지 해 보겠습니다.


목형, 모형, 아니면 목업?


디자인 작업이라는 것은 아이디어 발상 단계에는 주로 그리고, 구체화 단계에서는 주로 만들지요. 당시는 컴퓨터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을 때고, 3D 프린팅 같은 건 SF영화에도 안 나올 때니까 모든 걸 다 손으로 합니다. 렌더링은 수채화 물감이나 포스터 칼라를 붓과 오구 (작은 나사를 돌려서 선의 굵기를 조절하도록 만든 선을 긋는 도구)를 사용해서 그렸습니다. 그린 것이 말라야 하니까 습도가 높은 때는 렌더링 한 장에 꽤 오래 걸립니다. 또 만드는 것은 나무를 깎은 후 칠을 하고, 필요한 경우에는 아크릴을 사용해서 완성합니다. 나무는 결이 부드러워서 마무리가 잘 되는 피나무라는 것을 사용해서, 목공 작업장에서 가공을 합니다. 대부분의 재료가 나무니까 우리는 이런 모델들을 목형이라고 불렀습니다. 나무로 만든 모형 - 정확하지 않나요?


주물용으로 제작된 목형. 영어로는 wooden pattern이라고 부른다.


한데 지나가시던 신 학수 교수님께서, "무식하게 목형이 뭐냐. 모형이라고 해야지. 목업이라고 하던가"하시는 겁니다. 그분 발음에 좀 더 가깝게 "마껍"입니다. 나무로 만드는 모델은 당연히 목형이라고 철석같이 믿던 나는 왜 목형이 틀리느냐고 여쭈어 보았습니다. 그 대답은, "목형은 모래 주물을 뜰 때 만드는 나무로 된 원형을 목형이라고 부른다"라는 거였습니다. 그리고 디자인한 것을 최대한 완성되었을 때의 제품의 모양을 흉내 내어 만드는 것이니까 모형 (模型), 또는 영어로는 Mock-up이라고 해야 한다라는 설명이 이어졌습니다. 완성된 제품을 흉내 내어 만든 게 모형이고, 주물을 뜨기 위해 나무로 만든 원형이 목형입니다. 덧붙여서 용어를 정확하게 써야 무식한 디자이너가 되지 않는다는, 평생의 디자인 레슨을 받게 됩니다.


노기스 아니면 캘리퍼스?


한국전쟁이 끝난 후, 미국이 여러 가지로 한국에 대한 원조를 했는데, 그중에 한 가지가 디자인과 공예를 가르쳐 준 것입니다. 신 학수 교수님은 1957년 미국인들에 의해 설립된 한국공예시범연구소에서 디자인과 공예를 배운, 우리니라 디자인 1세대 중의 한 분입니다. 이때에 용어에 대한 중요성을 익히신 것으로 추측되고, 특히 일본 식민지 잔재가 엄청나게 많이 남아있던 때 일본식의 잘못된, 그러면서도 '시중'에서는 흔이 쓰이던 용어들을 지적하는데 꽤 애를 쓰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 당시에는 디자인 모형을 만들려면 청계천 세운상가 일대의 재료상, 부품상들을 골목골목 다니면서 필요한 것들을 사고 또 물어보고 했었습니다. 그 동네에는 정말로 없는 것이 없고, 전문가 아닌 사람들이 없어서, 우스개 소리로 그 골목에 있는 것들을 대충 모으면 탱크 두어 대, 헬리콥터 몇 대쯤은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습니다.


청계천 공구 상가. 없는 것이 없었던 곳. 아직도 일본식 용어가 전문 용어 대접을 받는다.


이 골목의 전문가들은 죄다 일본식 용어를 씁니다. 그렇게들 배운 거니까요. 예를 들면 드릴 비트 (drill bit) 은 '기리', 크기를 측정하는 도구는 '노기스', 원통형으로 나무나 금속을 깎는 기계는 '셈방'이라고 부르는 식입니다. 뿐만 아니라, 1/4 인치 합판은 '욘부' 합판, 1/2 인치 합판은 '니부' 합판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때는 한글 용어가 아니라 일본식 용어로 불러야 전문가 소리를 듣던 시절이었지요. 청계천 골목을 눈을 감고도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뻔질나게 드나들던 우리들은 그때그때 이런 일본 용어들을 배워와서 후배들 앞에서 유식한 척하며 쓰기도 했지요.


그러던 어느 날, 모델을 만드느라고 재료의 두께를 '노기스'를 사용해서 재고 있었습니다. 이 도구는 물체의 두께를 10분의 1밀리미터까지 잴 수 있어서 정확한 모델을 만드는 데 많이 쓰입니다. 마침 신 학수 교수님께서 지나가다가, 우리들끼리 노기스라고 부르는 것을 듣고는 멈춰 서십니다. 무식하게 노기스가 뭐냐는 겁니다. '무식'하던 우리는 그럼 어떻게 불러야 하느냐고 물었고, 발음하기도 좀 불편한 '버니어 캘리퍼스 Vernier calipus '라고 해야 한다는 답을 듣습니다. 캘리퍼스란 일반적으로 두께나 외부 둘레를 재는 도구이고, 특히 10분의 1밀리미터까지 재도록 만든 것이 버니어 캘리퍼스라고 부른다는 겁니다. 덧붙여서 버니어 캘리퍼스가 잴 수 있는 것보다 더 정교한 것을 재려면 100분의 1밀리미터까지 잴 수 있는 마이크로미터로 재야 한다고 알려줍니다. (요즘 사용되는 버니어 캘리퍼스 가운데에는 1000분의 1밀리미터까지 재는 것도 있습니다).

버니어 캘리퍼스


캘리퍼스는 비교적 단순한 도구로 원기둥의 지름이나 판재의 두께를 재는데 씁니다. 이 오래된 도구를 엄청난 수준으로 정교하게 만든 것을 수학자인 Vernier가 만들고, Vernier calipus라고 불리게 된 겁니다. 이게 노기스라고 불리게 된 것은 Vernier보다 조금 전에 유사한 도구를 만든 포르투갈 사람 노니우스가 만든, 비슷한 수학적 원리를 쓰는 항법장치가 노니우스라고 불리게 되고, 이게 일본으로 건너가 노기스로 불리게 된 거라는 학설이 유력합니다.


따라서 노기스라고 부르는 것이 딱히 틀린 것은 아니지요. 일본에서는 정식 용어로 통용되는 것이고, 또 우리나라에서도 아직도 이 이름으로 부르는 분들이 있을 테니까요. 하지만, 디자인이 유럽과 미국에서 온 것이니만큼 세계적으로 통용되는 용어를 쓰는 것이 맞다는 말씀은 지당합니다.


A에서 D로


이번에는 금속공예 시간입니다. 동판을 실톱으로 자르고, 토치로 달구어서 연하게 만든 후 망치로 두드리고를 반복하면서 식탁용 용기를 만드는, 레이징이라는 기법을 배우는 수업이었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처음 배우는 실톱, 머리카락처럼 가는 톱날을 실톱대에 고정하고 조심해서 동판을 잘라도 조금만 삐끗하면 끊어지기 십상이어서 아주 조심해서 자르고, 또 다들 망치질에 정신없이 시끄러워도 예쁜 모양을 내기에 다들 분주하던 때인데, 지나가시던 신 권희 교수님께서 내가 만들던 것을 보시고 마음에 드셨던지, 높이 들어서 학생들에게 보여주시며 아주 잘 만들었다고 훌륭하다고 칭찬을 하셨습니다. 내심 이 정도면 A를 받겠지 라고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레이징 기법 (Youtube에서)

그 수업 말미 작업 중에 뭔가에 손가락을 베어서 피가 약간 나는데, 하필이면 교수님이 지나가시다가 그 모습을 본 겁니다. 어쨌든 작업을 마치고 만든 용기를 제출했는데, 나중에 받은 과제 점수는 D였습니다. B도 아니고. 신 권희 교수님이 나중에 교수실로 부르셔서 하신 말씀이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수신아, 만든 결과는 아주 좋았는데, 전문가가 되려면 몸을 다치지 말아야 해." 금속공예가이시면서 많은 제자들을 가르치시고, 금속공예의 특성상 다양한 기계, 특히 날카로운 기계와 기구를 다루다가 다치는 것을 볼 때마다 안타까워서 제대로 작업을 하는 전문가로 가르치는 나름대로의 방법이었다고 이해됩니다.

 



직장에서 또 나중에 대학에서 후배 디자이너들을 가르치면서 순간순간마다 그 예전에 배운 것들이 기억납니다. 또 많은 디자이너들이 대충 알고, 부정확한 용어들을 쓰는 모습들을 보면서 많이 안타까운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물론 모든 것들에 대해서 어원부터 시작해서 모든 것들을 다 알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가능한 한 제대로 아는 것이 결과적으로 제대로 된 디자인을 하는 가장 중요한 거라는 생각은 변함없습니다.


해서 후배 디자이너들이 '플라스틱'이라고 하면 어떤 플라스틱, 'ABS'라고 하면 ABS가 무슨 것의 약자인지 꼭 물어봅니다. 'PVC'라고 하면 PVC의 원래 이름도 물어보고, 왜 PVC 가 가장 많이 쓰이면서도 가장 위험한 플라스틱 인지도 물어보고 가르쳐 줍니다. 예를 들어서, PVC는 Poly Vinyl Chloride, 또는 Polyvinyl Chloride의 약자입니다. 이것을 알면 PVC가 왜 싸게 만들 수 있는 재료인지 (흔히 쓰이는 vinyl 이 원료 중의 하나니까), 또 왜 위험한지 (chloride는 염소 화합물, 따라서 그 위험하다는 염산하고도 비슷한 성분일 테니까) 화학 공부를 거의 안 한 나 같은 사람도 대략 감이 옵니다. 이런 이유로 예전에는 사무용 가구의 측면 마무리 재료로 많이 쓰였던 PVC에지가 ABS로 대체되었습니다.


ABS는 Acrylonitrile butadiene styrene의 약자입니다. ABS의 물성을 다 알지 못해도, 세 가지 성분 중의 하나인 Acrylonitrile은 아크릴과 비슷할 테니 투명한 것을 만들는데 유리하거나 강도가 높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고, 두 번째 원료인 butadiene은 고무를 만드는데 주로 쓰이니까 웬만에 충격에는 깨지지 않고 견딜 거라고 생각할 수 있고, stylene은 스티로폼 제품을 만드는 원료와 유사하니 쉽게 성형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이 추측 그대로, ABS는 단단하고, 매끈하고, 사출 성형이 쉽고, 잘 녹지 않아서 전자제품이나 자동차 부품에 엄청나게 많이 쓰입니다. 게다가 전기 도금도 잘 됩니다.


플라스틱 장난감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레고는 ABS로 만듭니다.


PC로 불리는 Polycarbonate는 세상에서 가장 단단하다는 다이아몬드가 탄소 한 가지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상식에 가까운 사실만 알면 모르긴 해도 플라스틱 중에서도 가장 투명하고 단단한 성질이 있을 거라는 것은 추측이 가능합니다. 그래서 PC는 레이저 광선을 잘 투과시켜야 하고 또 쉽게 휘거나 부러지지 말아야 하는 CD의 제작에 쓰이고, 또 자동차 헤드라이트 표면 재료였던 유리를 대체하여 사용됩니다.


참고로 저는 경기공전을 다닐 때 공부를 잘 한쪽에 속했지만, 유일하게 응용화학 수업에서는 F를 받았습니다. 도무지 어렵더라고요. 이러한 저도 이러저러한 것들에 대해 최소한의 상식과 호기심만 있으면 저 정도는 아는 디자이너가 되더군요. 우리가 쓰는 것들에 대해 조금 더 알면, 제대로 된 용어를 쓰며, 또 약자의 의미를 알면, 아니면 최소한도 그런 것들에 대한 궁금증이라도 좀 더 있으면 훨씬 제대로 된 디자인을 하게 됩니다. 물론 훨씬 더 제대로 된 디자이너 취급을 받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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