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이나 골프나 다 마찬가지
다음에 올릴 글을 쓰고 있는데, 이 전 글인 목형, 모형, 아니면 목업? 에 관한 "제보"가 여럿 올라와서 좀 더 쓰게 되었습니다. 모형을 다른 식으로 부르는 것들이 있다는 겁니다. 이런, 제보하는 문화, 참 바람직합니다!
제보 1: 목각이라도고 한다. 네, 그렇게 부른 사람들이 있었던 기억, 저도 납니다. 당시에는 모형을 만들 때면 수도 없이 청계천, 을지로, 심지어는 영등포를 헤매며 수많은 '전문가'들을 만나야 했습니다. 재료를 사려면 참으로 여기저기 다니면서 물어물어 찾아다녔는데, 수소문 끝에 왕십리 기차역 근방에 있는 목재상까지 가서 한아름짜리 피나무 몸통을 사서 시내버스를 타고 학교로 가지고 온 적도 있었습니다. 피나무는 결이 곱고, 가공된 면이 매끈해서 나무로 만든 모형의 주 재료였습니다. 대부분의 조각품이나 심지어 팔만대장경도 피나무로 만든 거라고 합니다. 이 "전문가"들은 소위 전문 용어를 쓰는데 이게 제각각이라는게 함정이지요.
그러는 와중에 목각이라는 용어를 쓰던 사람들이 있었다고 기억합니다. 아마도 나무를 "깎아서" 만든 거니까 목각이라고 했었나 봅니다. 피노키오가 목각 인형인 것 것처럼 말이지요.
제보 2: 목합이라고도 한다. 네, 이것도 기억납니다. 목합의 '합' 자는 상자라는 뜻의 '盒'에서 온 듯합니다. 이게 그럴싸한 것이, 대개 모형을 통 피나무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저렇게, 마치 상자를 붙여서 만드는 것처럼 만들거든요. 그러니 목합도 나름 일리가 있어 보이긴 합니다. 하지만 mock-up이 우리나라식 발음으로는 '목업'이지만 미국식 발음에 가깝게는 '마껍'처럼 들리다 보니까, 목업과 마껍의 절충안인 목합 정도로 얼버무린 것이 아닌가 생각도 듭니다. 목합이라고 하면 어딘가 은은한 나무향도 풍겨오는 것 같지 않나요?
디자인이 원래 서양, 특히 미국을 통해서 들어온 신학문 혹은 신문물이다 보니 우리나라 용어가 아닌 것은 당연하고, 영어 단어들을 한국말식으로 발음하던 때에는 원음에 가깝지 않게 발음하던 것에 대해서는 전혀 뭐라고 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중간에 일본이 끼어있어서 일본말로 한번 더 망가진 용어들을 제대로 발음하기란 불가능했지요.
용어를 제대로 쓰는 사람들을 만나더라도 제대로 물어서 배우기 전에는 제대로 된 용어를 알기 어렵습니다. 이런 식으로 얼버무리고 추측을 하다 보니 매사가 다 그런 식으로 됩니다.
포스터컬러로 렌더링을 하고 잉크로 도면을 그리던 시절의 이야깁니다. (그런 때 이야기는 처음 듣는다는 분들도 계시겠지요) 포스터컬러와 잉크는 두 가지 방법으로 사용합니다. 하나는 붓이고, 또 하나는 오구라는, 일종의 펜입니다. 주로 잉크나 먹물로 도면을 그리던 도구입니다. 방금 '오구'의 이미지를 찾으려고 검색을 해 보니 웬 영화 포스터와 아이돌 사진들이 잔뜩 나오네요. 정작 오구는 없고. '오구 펜'이라고 하니 그제야 좀 나옵니다.
이 오구에 대해서 처음 배울 때 '오구'는 까마귀 입이라는 뜻으로, 마치 까마귀 부리처럼 생겨서 주로 먹물을 찍어서 선을 긋는 도구인데, 굵기를 다양하게 조절해 가면서 쓸 수 있는 펜이라고 제대로 배웠습니다. 사진에 있는 동그란 나사를 돌려서 '부리'의 폭을 조절하고, 그 부리에 잉크나 포스터컬러를 머금게 해서 종이 위에 긋는 거지요. 도면을 그리려면 선의 굵기를 0.1, 0.3, 0,5 심지어는 1.0mm로 조절해가면서 그리는데, 이 펜 끝이 무뎌지면 샌드페이퍼에 갈아서 씁니다. 너무 날카롭게 갈면 종이가 갈라지니 살살. 이 오구를 잘 쓰고 못쓰고는 선의 굵기를 잘 조절하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혹시 더 알고 싶은 분은 여기에: https://goo.gl/GdUvkR
어느 날 수업 시간에, 교수님이 작은 플라스틱 상자를 하나 가지고 오셔서 교탁 위에 조심스레 놓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마르스 펜이야. 듣기에 따라서는 마루스로 들리기도 했습니다. 그 상자에는 펜 세 개가 들었었는데, 각각 0.1, 0.3, 0.5 mm의 선을 깨끗하게 그릴 수 있는 펜입니다. 때때로 샌드 페이퍼에 갈지 않아도 되구요, 선의 굵기를 매 번 확인하지 않아도 되는 물건이었습니다. 마치 마술과도 같았지요. 그 시간에 창문에서 밝은 햇볕이 들어오던 기억도 납니다.
그 교수님은 꽤 무뚝뚝하고, 말씀을 많이 안 하는 분이어서 (지난 글에 제가 만들던 금속 공예 과제를 칭찬하시다가 내가 작업 중에 손가락을 벤 것을 보시고는 D를 주셨던 분입니다), 우리는 그 이름을 다시 물어보지도 못했지요. 그분 발음은 마루스 펜에 가까웠고, 우리는 그렇게 알아들었습니다. 속으로는 아마 오구 와는 달리 동그란 튜브에서 잉크가 나오니까 둥글다는 뜻의 일본말, '마루 丸'에서 유래해서 마루스 펜이라고 부르나보다, 라고 대충 생각했지요.
이 펜이 Mars펜이라는 것은 조금 시간이 지난 후에 알았습니다. 독일 제도 기구 명문인 Staedtler사의 브랜드이지요. Staedtler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더 잘 알려진 Rotring에서 만드는 같은 종류의 펜도 있어서 나중에는 로트링 펜이라고 많이 불렸습니다. 지금도 검색을 해 보니 마르스 펜보다 로트링 펜으로 검색을 해야 더 많이 올라오는군요. 물론 로트링 펜이라고 불러도 제대로 부른 건 아닙니다. 로트링 사가 만드는 펜의 종류는 수도 없이 많거든요. 이런 펜들을 부르는 영어 명칭도 사실 확실히 정해진 것은 아닌 모양입니다. Technical pen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나마 가장 보편적입니다. 아마 technical drawing을 그리던 용더로 많이 썼기 때문일 겁니다.
용어에 대한 문제는 비단 제가 하는 산업디자인뿐만이 아닐 겁니다. 모든 디자인 분야, 아니, 모든 분야가 다 마찬가지겠지요. 용어를 제대로 부르지 못하는 이유는 앞에 이미 다 말했듯이 몇 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호기심이 없어서: "남들이 뭐라고 부르든 비슷하게 하면 되겠지."
- 넘겨짚는 습관: "이래서 그렇게 부르는 걸꺼야."
- 숫기가 없어서 또는 자존심 때문에: "물어보면 초보처럼 보일 테지"
- 게을러서: "알아야 할게 어디 한두가지래야지."
- 약자로만 알면 충분해: "ABS 면 충분히 통하는데 그걸 굳이 아크릴로니트릴... 뭐라구?"
- 비 사대주의적 생각 때문에: "굳이 영어로 알아야 하나?"
등등.
여기서 확실하게 해 두자면 굳이 영어로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영어권에서 일할 생각이 없고, 영어를 쓰는 사람을 상대할 일이 없다면 굳이 영어로 할 필요는 없겠지요. 영어든, 한국어든, 아니면 일본어든, 어느 언어로라도 왜 그렇게 불리는가 하는 것은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제대로 된 디자인을 하는 abc입니다.
이왕 용어 이야기를 한 김에 한 가지만 더.
미국에 건너와서 어쩌다 골프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운동신경이라곤 하나도 없는 저이기 때문에 우리나라에 있을 때에는 당연히(!) 골프를 친 적이 없었지요. 골프 학원이나 코치를 통해서 배운 게 아니라, 아는 분들을 통해서 좀 랫슨을 받은 수준으로 처음 필드에 나갔습니다. 그날 한 공 머리 때리기, 뒤땅 때리기, 헛스윙, 옆 홀로 공 날리기, 냉탕 온탕 들어가기 등등을 생각하면 참 창피합니다. 뭐, 지금이라고 별로 나아진 것은 없지만.
그런 식으로 종종 필드에 나갔는데, 한번은 제가 친 공이 멀리 다른 사람들이 있는 옆의 홀 쪽으로 날아간 겁니다. 같이 간 분이 큰 소리로 그쪽을 향해서 "BALL!!!"이라고 외치시더군요. "공 날아가니까 피해!" 정도의 의미였습니다. 듣고 다들 대충 피했었고 별 일은 안 생겼습니다. 그런 일이 있을 때마다 그 분은 BALL을 외쳐주셨습니다. 이게 'ball'이 아니라 'fore', 즉 "공이 그쪽으로 날라아니까 피해!"라는 것은 좀 뒤에 알았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fore보다는 ball, 우리말로 "뽈!"이라고 외치는 것이 더 멀리 들리기는 하는 모양이더군요. 하하.
처음 필드를 나가니 스윙도 스윙이지만, 필드 규칙도 참 많이 배워야 했습니다. 그중에 하나. 맨 처음 공을 치는 람은 tee를 땅에 떨어뜨려서 그 끝이 가리키는 사람, 뭐 이런 식으로 정하면 되고, 그다음 홀 부부터는 그 전 홀에서 가장 타수가 적은 사람이 먼저 친다는 겁니다. 일리 있는 규칙입니다. 이렇게 해서 매 홀에 처음 치는 사람을 오나, 오너, 뭐 이런 식으로 부르더군요. 가장 잘 쳤으니까 그다음 홀에서 먼저 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사람 (owner, 즉 오너)라고 부른다고 들었습니다. 이게 그런대로 설명이 됩니다. 우리가 종종 오너라는 말을 쓰거든요. 꼭 소유주가 아닌 경우에 까지도 오너라는 말을 쓰기도 하니까요. 계 오너 같은 경우 말이지요. 게다가 우리나라 골퍼들은 내기 골프를 좋아해서 종종 매 홀마다 가장 잘 친 사람이 돈을 받으니 owner의 의미가 한층 더 와 닿습니다.
이게 owner가 아니라, honor, 즉 그 전 홀에서 가장 잘 친 사람에게 영예를 주는 의미로 그다음 홀에 처음 칠 수 있는 영예를 준다는 용어라는 건 조금 더 친 후에 알았습니다. 그러니 미국식 발음도 오너나 오나가 아니라 앞 음절에 악센트가 있는 '아너' 정도가 더 맞겠지요.
골프 이야기가 나온 김에 조금 더. 골프를 왜 그렇게 부르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 발로 차는 foot ball, 베이스를 돌아와야 점수를 내는 base ball (또는 넓은 들판으로 공을 쳐내는 야구), 바구니에 공 넣기인 basket ball ('농'은 바구니라는 뜻), 심지어는 날아오는 공으로부터 몸을 피해야 하는 피구 (잘못해서 맞으면 피가 난다는 뜻. 하하)과는 달리, 전혀 추측이 불가능한 이름이지요. Golf에 대해서는 "They call it golf because all the other four letter words were taken." 즉 "네 글자 단어가 더 이상 없어서"라는 우스개 소리도 있습니다. 영어에 "four-letter words"는 일박적으로 욕을 가리킵니다. 영화에 종종 등장하는 "F***", "D***", "S***" 등이 다 네 글자거든요. 골프는 욕이 나올 정도로 배우기가 어렵다는 조크지요.
하나만 더. 골프를 치다 보면, 어떻게 치는 건지는 다 알겠는데, 막상 필드에 나가면 안 맞을 때가 참 많습니다. 그러면 다들 이유를 대지요. 골프가 마음대로 안 되는 데에는 200가지의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이게 중요한 것이, 이유가 없으면 자기가 못 친다는 걸 인정하게 되기 때문이거든요. 그래서 어떻게든 이유를 대야 합니다. 예를 들면, 어제 술을 많이 마셔서, 바람이 많이 불어서, 아내와 말다툼을 해서, 애가 속을 썩여서, 클럽을 바꿨더니. 이 필드가 처음이어서 등등. 200번 째의 이유가 재미있습니다. 첫 음절에 악센트를 두고 말해야 합니다.
"이~상하게 안 맞네."
*제보 계속해서 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