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질: 내가 하는 것이 뭔지 제대로 모르면 사라진다
1983년, 대우자동차에 다닐 시절, 처음으로 외국을 나갈 경험이 생겼습니다. 일본 주재원으로 근무하던 분이 돌아와 디자인실을 겸임하는 부장이 되었는데, 이 분이 디자이너들이 좀 더 넓은 견문을 익혀야 제대로 디자인을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당시로서는 규모가 미미하던 디자인실의 디자이너 세 명을 데리고 일본으로 일주일간 출장을 다녀 오게 된 겁니다. 가기 한달 전부터 점심시간을 반으로 쪼개 일본어 특훈도 해 주시던 그 분의 열정이 지금도 고맙게 기억이 납니다.
처음 도착지는 마즈다 자동차가 있는 히로시마였습니다. 그날 저녁 큰 식당에서의 회식자리에서 다들 맥주로 건배를 하는데, 내 옆에서 서빙을 하던 기모노를 입은 여자분이 내가 맥주를 안마신다고 했더니 종종 걸음으로 어딘가로 가서 맥주잔에 담긴 "맥주"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건 사과 주슨데, 보기에 맥주랑 비슷해서 분위기를 깨지 않는다는 겁니다. 아하, 본질. 맥주를 마시는 것인지, 아니면 만남을 축하하는 것인지. 맥주를 마셔야 하는 것이 아니고 만남을 축하하는 것이 본질이라면 다른 것이라도 좋다는 생각. 40년이 훨씬 더 넘은 지금도 생생히 그 장면이 기억 납니다.
그 다음은 동경 근방에 있는 이스즈 자동차 였습니다. 이스즈는 GM계열사로 대우자동차와는 같은 계열 관계였지요. 거리가 워낙 멀다보니 신간선으로 5시간이 넘게 가야 하는데, 화투치기를 좋아하던 부장님이 화투를 사오라는 겁니다. 워낙 지루해서 맨정신으로는 못 간다는 거지요. 한국이라면 구멍가게 (옛날 식으로)에 가면 되는데, 일본에서는 어디로 가야할까요? 부장님은 화투(花鬪)는 일본에서는 하나후다(花札)이라고 부르고, 도박용 보다는 일종의 교육용, 소일거리용으로 쓰이는데, 서점에 가야 살 수 있다는 겁니다. 화투를 서점에서? 한데 가 보니, 아닌게 아니라 화투, 아니 하나후다를 팔더군요. 쌩뚱맞게도 상자에는 나폴레옹이 그려져 있고 대통령이라고 쓰인, 정말로 이상한 박스에 들어 있었습니다.
주로 두꺼운 비닐로 만들어진 우리나라 화투와는 달리 종이로 만들어져서 미끌거리지 않고, 속에는 횟가루까지 들어 있어서 묵직합니다. 전문 용어로 "붙는 맛"이 있더라구요. 덕분에 다섯시간을 지루하지 않게 여행할 수 있었습니다.
여담입니다만, 당시에는 대한항공 비행기에서 승무원에게 화투를 달라고 해서 얻을 수 있었습니다. 여러 명이 같이 타고가면 한 박스를 주곤 했지요. 한번은 일본인 승무원에게 달라고 했더니 같이 출장가던 우리 머릿 수대로 주는 겁니다. 일본에는 화투가 그다지 대중적이지 않다는 한 단면인지도 모르지요.
이 닌텐도 (한자로는 임천당)을 위키피디아에서는 "Nintendo Co., Ltd. is a Japanese multinational consumer electronics and video game company headquartered in Kyoto", 즉 "교토에 본사가 있는 소비자용 전자 및 비디오 게임을 제조하는 다국적 기업"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건 100% 정확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후다를 만드는 회사로 태어난 닌텐도는 1889년에 만들어진, 백년이 훨~씬 넘은, 정말로 오래된 회사이지요.
그러다가 대중에게, 특히 세계적으로 알려진 것은 1970년도 후반에 비디오 게임기를 만들기 시작하고, 1980년도 초반의 패미컴, 90년도 초반 슈퍼 패미컴 (이때 중소기업 이던 닌텐도 한 회사의 이익은 한국의 삼성 현대를 포함한 10대 기업 이익을 다 합친 것보다도 많았다고 합니다)이고, 그 이후로도 게임 큐브, 게임 보이 등등의 성공으로 이어지면서 하드웨어로, 또 마리오 등로 대표되는 게임으로 성공을 이어옵니다.
이렇게 전자 비디오 게임으로 성장을 해 온 회사가 지금도 화투를 만들고 있는 것을 어떻게 생각해야 하나요? 앞에서 말했듯이 일본에서 화투, 하나후다는 그래 대중적이지도 않으니 수익이 나올리도 없는데 말이지요. 그리고, 플라스틱이나 다른 소재로 바꾸지도 않고 100년이 넘은 방법 그대로 만들도 있으니 말입니다. 이걸 단순히 일본 사람들 특유의 보수적인, 오타꾸적인 정서라고 말하고 넘어가기에는 뭔가 허전합니다.
조금 더 닌텐도의 행적을 보지요. 아시다시피 게임 산업내에서는 하루도 "전쟁"이 멎을 날이 없읍니다. 전자 기술의 진보, 플랫폼의 진화, 컨텐츠의 변화, 게다가 사용자들의 세대 변화 등, 수 많은 변수들이 게임 회사들을 흥하게도 망하게도 합니다. 아무래도 규모가 작은 닌텐도는 소니에 비해 종종 열세에 빠지게 되는데, 그 대역전이 2006년에 일어납니다. 이 역전극을 보면서 아니러니칼하게도 닌텐도는 비디오게임회사가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게임 큐브를 만들고 있던 닌텐도는 이미 플레이스테이션 2로 기세를 높이던 소니와 힘겨운 싸움을 하던 때입니다. 소니는 세계적인 성공을 한 플레이스테이션 2의 여세를 몰아 새롭게 개발한 블루레이와 한층 더 업그리이드 된 성능을 가진 플레이스테이션 3를 2006년 11월에 출시합니다. Xbox로 게임기 시장에 뛰어 든 마이크로 소프트도 플레이스테이션 2를 잡기 위해서 2005년에 이미 더 강력해진 Xbox 360를 출시한 터였습니다.
소니와 마이크로소프트의 방향은 명확했습니다. 게임 플레이어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더 강력한 성능의, 그래픽이 훨씬 세밀해진 게임기들을 만든 겁니다. 농구경기 게임 선수의 땀구멍까지 선명히 보이더군요. 이건 일반적인 제품의 진화 방식이기도 하지요. 한데 (!) 여기에 닌텐도는 정망 쌩뚱맞게도 하드웨어적으로 별로 특출나지도 않고, 또 기존 해상도의 DVD를 탑재한 (참고: 전 비디오 게임 전문가도, 또 플레이어도 아니어서 디테일에는 여기저기 잘 못 쓰는 부분이 있을 겁니다. 양해를...) Wii를 내 놓습니다. 같이 발매된 게임도 당시에 (물론 지금도) 폭발적으로 인기를 누리던 RPG도 없고, 탁구, 테니스, 달리기, 뭐 이런 것들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신기하게도, 다른 경쟁 기종에 비해 열세인 성능에도 불구하고 Wii는 예약을 해야 겨우 살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경쟁 제품들은 팔면 팔 수록 적자인데, Wii는 팔 수록 이익이 남는다는 말도 들었구요, 그도 그럴 것이, 다른 제품들은 경쟁하듯이 고 사양과 첨단 기술을 집어넣어 원가가 높아졌지만, Wii는 별로 그런 것이 없었거든요.
신기한 것은, 우리 아이에게 Wii를 사주려고 Toys "R" us 매장을 여러번 갔는데, 그때마다 주로 부모들이 줄 서서 기다리더라는 겁니다. 왜 부모, 특히 엄마들이 아에들에게 게임기를 사주려고 줄을 설까. 퍼뜩 떠오는 생각은, 소니와 마이크로소프트가 게임 사용자들을 바라봤다면 닌텐도는 엄마들을 봐라봤다라는 겁니다. 흔히들 하는 말로 타깃 유저, 또는 유저 프로파일이 바뀐 거지요. 게임기를 만들면서 게임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게임을 못하게 하는 엄마를 대상으로 하다니. 이게 가능한가요?
부모들이 아이들 게임을 하지 못하게 하는 이유는 간단합니다. 게임이 중독성이 있어서 다른 해야 할 일을 못하게 되기 십상이고, 신체 발달이 중요한 아이들이 게임에 빠지다 보니 운동을 멀리하게 되구요. 또 상당수의 게임이 폭력적이기 때문이지요. 부모들과 아이들이 같이 할 수 있는 게임은 점점 드물어가고. 한데 Wii는 손가락을 쓰는 기존의 컨트롤러가 아니라, 팔을 사용하는 리모컨을 사용하고, 또 초기 대부분의 게임이 가정적이어서 가족이 같이 스포츠를 즐기는 환경을 만들어 준 겁니다.
긴 이야기를 줄여서 마무리를 하자면 닌텐도가 화투를 지금도 예전 방식으로 만드는 이유, 그리고 Wii를 만든 이유는 닌텐도가 스스로를 비디오 게임기 회사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회사로 보고 있는 거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앞으로 닌텐도가 게임기를 넘어선 다른 것을 할 수도 있을 겁니다. 게임기 회사가 아니라 뭐, 실제로 닌텐도의 생각도 그런지 확인해 본 적은 없지만.
지난 주, 대표적인 장난감 체인인 토이즈러스 Toys“R”Us 가 미국내 전 매장 문을 닫는다고 발표했습니다. 작년에 이미 부도가 난 회사여서 이미 예상된 것이기는 했지만, 혹시나 회사가 다시 살아나나 하고 기대했던 많은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인 소식입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온라인 상거래에 의한 소매시장 (영어식 표현으로는 brick and mortar) 의 몰락으로 봅니다. 물론 그런 측면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재래식" 소매시장이 다 사라지는건 아니지요.
2000년 Amazon과 온라인 판매 10년 전속 협약을 맺으면서 회사가 더 살아나는 듯 하더니, 이런저런 이유로 아마존이 다른 장남감 회사의 제품도 아마존에서 판매할 수 있도록 하면서 큰 손해를 보고, 다시 뼈를 깎는 노력으로 회생을 하려고 하다가 결국 2017년 가을에는 파산 신고를 하고 맙니다. 그리고 2018년 3월 미국내 모든 매장을 닫는다고 발표했습니다.
Amazon이 Toys"R"us를 (부분적으로) 사겠다는 의향을 발표하기도 했고, 또 MGA Entertainment 의 회장을 포함한 몇몇 사람들이 회사를 인수하겠다는 의향을 밝히고 기금을 모으고 있기도 합니다. Amazon이 산다면 점차 실제 매장을 증가해 가는 전략의 한 부분으로 사용할테지요. MGM이 인수한다면 어떻게 될지 모르고.
닌텐도가 130년 동안 성장을 거듭해 온 것은 스스로를 제대로 인식했기 때문입니다. 마이크로소프트는 결국 Xbox 사업을 접었지요. Toys"R"us가 고전을 면치 못하다가 문을 닫는 지경에 이른 것은 스스로를 단순히 장난감 파는 가게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이제라도 스스로를 즐거움을 파는 곳으로 재 인식해서 다시 살아 돌아오기를 바랍니다.
Mr. Magorium's wonder emporium이라는 영화에는 회계사인 Henry가 장난감 가게 일을 보는 Molly Mahoney에게 문을 닫게 된 이 가게는 "but it is just a ... toy store" 라고 합니다. 이건 "그냥" 장난감 가게잖아라고 한거지요. 여기에 발끈한 Molly가 Henry에게 "It's a magical toy store!" 라고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Toys"R"us가 "그냥" 장난감 가게가 아니라, Magical toy store로, 아니, Magic store로 다시 태어날 수도 있겠지요. 기술과 정치와 돈과 출세와 모든 잡다한 것들 때문에 사라진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먼지에 덮여있는 magical한 경험에 대한 기대를 다시 불러와주는, 그런 곳 말이지요.
닌텐도와 Toys"R"us의 스토리가 디자이너들에게 주는 교훈은 엄청나게 큽니다. "내가 지금 디자인하고 있는게 과연 뭘까?" 라는 질문을 하는 것과 안하는 것의 차이가 엄청나게 크다는 말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