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히 마리아 레마르크
어릴 때부터 절대 읽고 싶지 않았던 고전 중의 하나다. 이유는 제목이 싫어서다. 개선문이 뭐냐 싶었다. 개선(凱旋)을 한다는 것은 전쟁에서 이겨 돌아온다는 뜻이 아닌가 그래서 싫었다. 어릴 때부터 전쟁, 싸움 이런 종류의 책이나 영화는 보고 싶지 않았다. 사실 의사도 무서운 존재였다. 사람의 몸을 가르고 수술을 하고 꿰매고... 주인공이 심지어 의사라니 더더욱 멀리하고 싶은 책이었다. 작가 교육원의 선생님의 강력한 추천으로 반백이 넘어서야 읽게 되는 명작이다. 과연 고전은 고전이라고 불리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읽기 시작하자 밤을 새워 단숨에 읽어 버렸다.
선생님은 남자의 여자를 대하는 느낌 같은 것이 좋았다고 하신 거 같다. 남자의 다정함과 따스함이 인상적이었다는 평과 함께 남자들이 드라마를 쓸 때 참고하면 좋겠다는 취지로 추천한 책이다. 처음 장면부터 마치 까뮈의 <전락>에서처럼 여자가 센 강에 몸을 던지려고 하는데 개선문의 라비크는 여자를 구한다. 구하는 그날로 따라온 여자와 동침을 하고 만다. 다분히 남성 중심적인 서사에도 반감이 많이 일지 않음은 왜일까? 이 여자는 왜 이리 수동적일까? 이 남자의 외모 때문에 그럴 수 있는 걸까? 그 의문 하나만으로도 읽어나갈 동력이 생긴다. 이 남자가 뭐라고 아니 이 여자의 사연은 뭐 길래..
라비크는 독일에서 잘 나가던 외과 의사였다. 나치체제에서 친구를 숨겨준 죄로 고문을 당하고, 죄 없는 애인마저 살해당하자 프랑스로 망명해온다. 사랑도 잃고 일도 잃고 자기 자신도 부정당해 영혼 없이 유령의사로 허름한 호텔에서 살고 있다. 그러다 자살하려는 여자를 구해주고 자신도 모르게 여자를 사랑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또 하나의 이야기 축은 자신을 고문하고 애인을 무참히 죽인 자를 우연히 파리에서 조우하고, 그를 죽일 복수를 하려고 준비를 하는 것이다. 사랑과 복수를 하는 과정에 그 당시 파리의 암울한 시대상과 쫓기고 죽어가는 사람들이 나온다. 라비크는 무심한 듯 보이지만 남은 자신의 양심과 온기를 틈틈이 여러 인간들에게 나누어 준다. 그래서 그가 밉지 않다. 자신도 최악의 상황인데도 이타적이므로!
“잊어버려요. 후회란 이 세상에서 가장 무익한 것이오. 되찾을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소. 물론 보상할 수도 없소.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우리는 모두 성자가 되지요. 인생은 우리를 완전하게 만들겠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는단 말이오. 완전한 인간이 있다면 그야말로 박물관의 표본감이지요.”
여자가 애인이 죽은 후 실의에 빠졌을 때 여자에게 위로를 하며 라비크가 한 말이다. 라비크는 매일 술을 마시고 어려운 수술을 하고 가끔 여러 여자와 관계를 맺으며 살고 있었다. 자신의 신분이 노출되면 안 되므로 드러내서 선행이나 정의를 구현할 수는 없지만 나름의 노력을 하여 약자를 돕는다. 그래서 그를 지지하게 되나보다. 또 중간 중간에 나오는 수술 장면의 묘사가 압권이다.
바야흐로 메스를 넣어, 가늘고 빨간 핏줄기가 가볍게 누르는 메스의 뒤를 따라 솟아오를 때의 숨막히는 긴장을 어떻게 그에게 설명할 수 있으랴. 육체는 클립과 집게 밑에서, 몇 겹으로 겹친 장막처럼 열려, 한 번도 빛을 본 적이 없는 기관이 노출되는 것이다. 밀림 속의 사냥꾼처럼 발자국을 밟아 가면, 파괴된 조직, 혹, 굳은 살, 균열 속에서 돌연 거대한 맹수, 죽음과 부딪친다. 격투가 시작된다. 침묵의 미친 듯한 투쟁, 무기라고는 오직 가느다란 메스와 바늘 한 개, 그리고 무한히 정확한 솜씨밖에 없다. 그때 극도로 긴장한 눈이 부시는 하얀 육체를 스치고, 갑자기 어두운 그림자가 핏속에 어린다. 메스의 칼날을 무디게, 바늘을 무디게, 손을 지치게 하는 듯한 장엄한 조소, 그러면 그 눈에 보이지 않는 불가사의한 것, 맥박 치는 생명이 인간의 무력한 손에서 홀연히 물러나서 부서지고, 손이 닿지도 않고 붙잡아 둘 수도 없는 무서운 암흑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 버린다. 바로 직전까지만 해도 숨을 쉬고 자기라는 존재와 이름을 가지고 있던 얼굴은 굳어버린 이름 없는 마스크로 변한다. 저 무의미한, 제어할 수 없는 무력, 그것이 어떠한 것인지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으랴. 그리고 또 설명할 무엇이 있단 말인가?
처음에 나오는 수술 장면에서 여자를 구하느라 늦게 간 라비크가 다른 의사가 수술로 망쳐 놓은 환자를 구하지 못하고 죽게 한다. 그때 라비크의 생각이다. 수술하는 의사가 느끼는 삶에서 죽음으로의 순간이 잘 표현되어 있다. 삶과 죽음이 늘 공존하던 전쟁의 시기, 언제 폭탄이 떨어질지 언제 나치가 쳐들어올지 모르는 불안의 시기에 인간이 가지는 공포와 좌절과 욕망이 범벅이 되어 있다. 그 속에서 먹고 살기 위해 몸을 파는 여자들과 그 여자들을 조금이라도 도와주려는 라비크와 그 라비크를 사랑하는 여자 조앙 마두가 있다. 조앙 마두를 잊으려고 안간힘 쓰는 라비크도 인상적이다.
그는 침대를 보았다. 구겨진, 창백해 보이는 시트 기다리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여태까지도 여자를 기다린 적은 많았다. 그러나 이렇게 기다리던 기분과는 달랐다. 단순하고 명백했으며, 잔인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또 욕정을 은빛으로 장식하는, 그 이유도 모르는 상냥한 감정으로 기다린 적도 있다. 그러나 오늘 같은 기분으로 기다린 적은 벌써 오랜 세월을 두고 없었던 일이다. 자신도 전혀 모르는 사이에 뭔가가 자기 마음속으로 숨어 들어온 것이다. 다시 꿈틀거리기 시작한 걸까? 움직이기 시작한 걸까? 그건 언제였던가? 잊어버린 과거 세계에서, 푸른 심연에서 뭔가가 또다시 부른 게 아닐까? 지평선에는 포플러가 늘어서고, 4월의 숲이 풍기는 냄새, 페퍼민트의 산뜻한 향기. 목장에서 부는 미풍 같은 것이 벌써 불어온 게 아닐까? 그런 건 이제 필요가 없다. 그런 건 이제 갖고 싶지 않다. 사로잡히기 싫다. 나는 떠돌아다니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일어나서 옷을 갈아입었다. 인간은 독립해 있어야 한다. 무엇이든 처음에는 약간 의존하는 데서 일이 벌어진다. 처음엔 잘 모르지만,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면 이미 타성이라는 그물에 꼼짝없이 걸려 있다. 타성 – 이것에는 여러 가지 이름이 붙어 있다. 사랑도 그 하나다. 어떤 일에도 습관이 되어서는 안 된다. 육체에도 물론 안 된다.
좋은 구절을 찾으려고 책을 다시 뒤적거리니 아름다운 곳이 이렇게 많았나 싶다. 스토리에 집중해 뒤가 궁금하여 표현은 신경을 못 쓰고 허겁지겁 읽어 나간 모양이다. 이래서 고전, 고전 하나보다. 섬세하고 기가 막힌 장면들이 많다. 암울한 상황인데도 마치 영화 <카사블랑카>의 느낌이 든다. 안개가 끼고 담배 냄새가 자욱하고 술을 마시는 저녁의 느낌... 찾아보니 이 개선문도 영화로도 제작되었고 여자 주인공인 조앙이 잉그리드 버그만이었다. 영화로는 이 방대한 작가의 아름답고 처절한 묘사를 살릴 수가 없으리라. 문득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도 오버랩 되었다. 체코에서 망명한 토마스도 외과 의사였던 거 같다. 읽은 지가 10년도 더 지나 가물가물하다만 다시 읽어야겠다. 개선문은 결코 싸움에 이겨 통과하는 의미의 개선이 아니었다. 전쟁 후의 결말은 우리 모두가 안다. 누구에게는 개선이 누구에게는 파멸과 지옥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