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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하얀 봄밤 Sep 13. 2020

이 세상 모든 김지영의 목소리를 꿈꾸며

《82년생 김지영》 조남주


《82년생 김지영》을 함께 읽기로 한 때였다. 어느 회원이 도서관에 책을 빌리러 갔다가 제목을 착각해서 《72년생 김지영》을 빌려달라고 했다고 한다. 사서는 웃으면서 “가끔 책 제목을 잘못 얘기하는 분들이 있더라구요.” 하면서 《82년생 김지영》을 찾아주었다고 한다. 그 회원은 “책을 읽어보니 어차피 72년생 김지영이나 82년생 김지영이나 삶이 별로 달라진 게 없더라.”고 말하며 씁쓸해했다.


소설 속 김지영은 82년생인데도 60년대생인 내가 겪었을 법한 일들을 겪고 있었다. 법적으로는 여자들의 지위가 많이 향상되었다고 하지만 가정이나 사회에서는 아직도 여자들에게 전통적인 한국 사회의 여성상을 강요하고 있다.   

  

2016년에 출간된 이 소설은 56쇄라는 엄청난 판매부수의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올해에는 원작소설이 영화화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현상은 21세기 현대사회에서도 여성들의 처지가 별로 달라지지 않았음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1999년에 남녀차별금지법이 생겼는데도 여전히 한국 사회에서 여자들은 차별받고 있다. ‘강남살인사건’ 같은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를 보면 대한민국의 현주소가 보인다. 사회는 여자들을 맘충, 김치녀라는 말로 조롱하고, 여성 혐오적 시각에서 비롯된 폭력이 난무한다. 전문가들은 여성에 대해 폭력을 가하는 남성들의 심리에는 여성을 자기 통제 하에 두려는 가부장적인 사고가 있다고 말한다.     


나는 1923년생 홀시어머니를 모시고 11년을 살았다. 시어머니가 지금은 대학생이 된 아들을 초등학교 들어가면서부터 키워주셨고 시어머니와 엄마와 딸처럼 지냈다. 하지만 결혼 후 처음 몇 년은 한 건물에 살면서 시어머니 시집살이로 마음고생을 많이 해야만 했다. 마흔셋에 얻은 막내아들밖에 모르는 여든이 넘은 시어머니와 시누이들의 모습이 지금까지도 잊히지 않는다. 시어머니는 남편과 손자는 끔찍하게 아끼면서도 직장 생활하느라 살림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며느리를 늘 못마땅해하셨다.     


그런 시어머니는 생활력 없는 시아버지를 만나 평생 살림을 혼자 책임져왔다. 남편이 대학교 2학년 때 시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혼자되신 후 칠 남매를 키우느라 더 억척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처음에는 할머니뻘 되는 시어머니의 생각이나 행동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지만 같이 살면서 서로를 이해하게 되면서 시어머니의 인생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려서부터 영특했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정규 교육도 못 받고 평생 자식들 뒷바라지만 하다 돌아가셨다. 시어머니도 가부장적인 한국 사회에서 여자로 태어난 죄로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었던 가엾은 여자일 뿐이라고 생각하니 연민의 감정이 생겼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부터는 시어머니께 진심으로 잘해드리려고 노력했다.    


《82년생 김지영》은 슬하에 딸을 두고 있는 서른네 살 김지영 씨가 시댁 식구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 친정엄마로 빙의해 속말을 뱉어내고, 남편의 결혼 전 애인으로 빙의해 그를 식겁하게 만들기도 하며 이상 증세를 보인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남편이 김지영 씨의 정신 상담을 주선하고, 지영 씨는 정기적으로 의사를 찾아가 자신의 삶을 이야기한다. 소설은 김지영 씨의 이야기를 들은 담당 의사가 그녀의 인생을 재구성한 형식이다.    


김지영이 시댁 어른이나 남편 앞에서 친정엄마나 결혼 전 남편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했던 여자에 빙의된 채 속말을 뱉어내는 장면들은 섬뜩하다시피 하다. 평소 가슴 속에 쌓인 분노를 말로 제때 표현하지 못해서 정신이 이상해진 것 같아서다. 김지영을 대변해서 나오는 그녀들의 미처 못다 한 말… 처음부터 김지영이 하고 싶은 말을 못 하고 살았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가정, 직장, 사회에서 여자라는 이유로 손해를 보고 차별받으면서 점점 자신의 목소리를 잃었고 정신까지 이상해졌다.     


공원에서 만난 어떤 남자는 그녀에게 ‘남편이 벌어다주는 돈으로 커피나 마시러 다니는 맘충’이라고 했다. 전철 안에서 어떤 젊은 여자는 임신한 김지영에게 마지못해 자리를 비켜주며 상처 주는 말을 내뱉기도 했다. 김지영에게 상처를 준 사람들은 여성 혐오를 공공연하게 표출하는 남자들뿐만 아니라 같은 여자이면서도 상처 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김지영은 육아를 전담하고 있지만 가사 노동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고, 가정, 직장, 사회에서의 은밀한 차별에 하고 싶은 말을 제대로 할 수조차 없는 현실을 겪어야 했다.     


그녀가 결국 정신이 이상해진 이유는 한국 사회에 뿌리 깊이 자리한 여성 차별과 여성 혐오 때문이다. 용기 내어 말을 한다 해도 변하지 않는 현실에 무력감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성 혐오가 벌어지고 있는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 여자들이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살면 무슨 일이 생길지 예측할 수 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남자들의 여성 혐오나 여성에 대한 폭력에 목소리도 못 내고 숨죽여 살아야 하나? 여자들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여자들 자신밖에 없다. 강남역 살인사건으로 희생된 또 다른 김지영을 보면서 많은 여자들이 나의 일이 될 수도 있었던 사건에 얼마나 충격을 받았던가!     


이러한 현실에서도 소수의 용기 있는 여자들은 꾸준히 목소리를 내고 있다. 여성 혐오가 만연한 한국 사회에서 여자들이 스스로를 지킬 힘은 이 세상의 모든 김지영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면서 연대하고 행동하는 일에서 나온다. 다른 여자가 겪는 고통을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


 여성 혐오와 같은 비인간적인 폭력에 반대하는 뜻있는 남성들과 함께 나아가야 한다. 어떠한 인간도 다른 인간을 통제하고 존엄을 짓밟는 폭력을 행사할 수는 없다. 여성 혐오에 반대하는 일은 여성과 남성을 편 가르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사회에서 ‘모든 인간은 존중받고 평등해야 한다.’는 차별 금지의 정신을 선언하는 것이다.


#82년생김지영#조남주#페미니즘#소설#여성#혐오#여자들의#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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