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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achroid May 12. 2022

막연한 날들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런 감정도 느낄  없겠지, 라는 생각 때문에 늙어가는  순간이 새삼 아쉽다. 그래서일까? 요상하게 말랑거리는 아재감성의 친구 녀석이 밑도 끝도 없는 상냥함을 표출할 , TV 음악예능에 과몰입한 아줌마들이 감당하지 못한 악흥을 분출할 , 나는 맹렬한 불쾌감에 사로잡힌다. 지구가 돌고 있다는 사실을 느낀다면 이런 기분일까. 알아챌  없을 만큼 느린 속도를 갑자기 체감하는  무서운 일이다. 나는 이미 폭삭 늙었는데, 여전히 매일매일  늙고 있다는 사실을 체감하는 견디기 힘든 중노동. 게다가 매일 아침 메타버스니, NTF, 알쏭달쏭한 돈벌이 테크놀로지로 뭔가 해내야 한다는 강박까지 더해졌기 때문일까. 노인으로 가득한 아산병원 초음파 검사실 대기석은 마치 급강하하는 바이킹처럼 아찔했다.


  나를 검사실로 안내한 영상의학과 의사는 베이비 파우더 냄새가 날 것만 같은 싱그러운 젊은이었다. 뉘집 아들인지 자네는 얼굴도 잘생겼는데 공부까지 잘했나 보군. 가르마 펌을 한 듯한 단정한 머리는 연예인처럼 작았다. 숨을 들이쉬어 배를 불룩하게 만들었다 호흡을 멈추고 다시 내쉬는 동작을 반복하면서, 그가 판독 기계를 조작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마스크로 가려진 옆얼굴의 매끈한 선이 긴 목의 솜털을 따라 초록색 가운으로 미끄러지듯 흘러내렸다. 네가 사는 세상도 내가 살았던 세상과 비슷한 걸까. 깨끗하게 반짝이는 흰자위와 암갈색 눈동자로 보는 세상에도 메타버스와 NFT로 돈을 벌어야 하는 절박한 사람들이 살고 있을까. 나의 간은 멀쩡한 걸까.


  불현듯 아득한 과거의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면 한동안 그 감정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화양리에서 한양대 쪽으로 달리던 버스에서 봤던 바람에 천천히 흔들리던 수양버들. 연말 인파로 북적이던 명동의 뒷골목에서 처음 먹었던 메밀국수와 충무김밥의 놀라운 맛 같은 것들. 이제 그 이미지 속 인물들은 모두 알아볼 수조차 없는 노인이 되었고 꼬맹이는 아재를 넘어 할배가 되어가는데, 나는 여전히 막연했던 젊은 시절의 앨범을 막연하게 뒤적이고 있는 것 같다. 휴대폰이 PCS라는 그럴듯한 이름을 달고 처음 세상에 나왔을 때, 대체 하루 종일 전화기를 들고 다녀야 할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묻던 아버지는 하루 종일 스마트폰을 끼고 살고, 머신러닝과 AI가 이제 간신히 귀에 익었는데 NFT와 메타버스로 돈을 벌어야 한다. 늙었지만 늙을 수 없는 막연한 날들이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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