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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슬기 Jun 04. 2023

철봉과 굳은살

크로스핏이 가져다준 영광의 상처-1

철봉과 굳은살



흙 내음 가득한 초등학교 운동장을 떠올리면 늘 철봉이 있었다. 이젠 20년이 훌쩍 지나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어린이였던 나는 철봉에 자주 매달리며 놀았다. 두 손으로 철봉을 잡고 허리춤까지 몸을 올리는 것쯤 식은 죽 먹기였다. 매달린 상태에서 상체를 앞으로 숙여 한 바퀴 돌아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걸 자주 했다. 때론 반대로 하체부터 철봉 위로 들어 올려 한 바퀴 돌기도 했다. 무릎 뒤쪽을 철봉에 끼어 넣고 공중에 몸을 매단 채 거꾸로 세상을 바라보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봐도 화려한 정글짐이나 늑목보다는 철봉이 좋다. 세 개의 기둥만으로 이루어진 단순한 생김새가 참 멋진 기구랄까.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철봉 앞에 선 건 20년도 더 지나서였다. 물론 그전에도 산에 오르거나 공원에 갈 때면 종종 철봉을 맞닥뜨리긴 했지만 그저 스쳐지나갔을 뿐이었다. 그런데 크로스핏이라는 운동을 하러 가니 그곳에 철봉이 있었다. 마침 운동 첫날에 철봉으로 하는 동작을 배우게 되었다. 코치의 지도에 따라 처음엔 두 손으로 철봉에 매달리는 것부터 연습했다. 10초 정도 매달리는 거였는데, 속으로 ‘10초 매달리는 게 무슨 운동이 될까?’ 싶었지만 두세 번 반복하자 숨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몸을 철봉 위로 들어 올리려면 근력이 세거나 몸이 가벼워야할 텐데 난 두 가지 모두에 해당되지 않음일 직감했다. 그래서 코치의 지도대로 밴드라는 도구를 사용하기도 하고 맨몸을 앞뒤로 왔다갔다 반동을 주며 팔을 좀 더 쉽게 움직일 수 있는 자세를 배우고 연습했다.


철봉에 매달려 몸을 들어 올리는 동작이 턱걸이라는 건 전부터 알고 있었다. 크로스핏을 하다 보니 풀업(Pull Up)이라는 말을 더 자주 썼다. 크로스핏이라는 운동이 미국에서 건너왔기 때문에 운동에 관한 용어도 죄다 영어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풀업이라는 영어 단어의 뜻을 하나하나 뜯어보면 우리말 턱걸이처럼 직관적이다. 풀업은 그러니까 팔을 당겨서(Pull) 몸의 일부를 철봉(Bar) 위로 올린다는(Up) 뜻이다. 턱까지 들어 올릴 수도 있고 가슴까지 들어 올릴 수도 있으며 상체 전부를 들어 올릴 수 있다. 이 모든 게 풀업이란 동작이며 상체의 근력을 단련시키는 데 탁월하다. 어릴 적 내가 철봉에 매달려 놀던 게 지금 하는 운동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니 신기했다. 그러나 그때처럼 몸의 일부를 철봉 위로 들어올리기란 결코 쉽지 않음에 좌절했다. 몸은 더 이상 어린이 시절처럼 가볍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몸을 앞뒤로 움직여 반동의 힘을 빌리거나 탄력 있는 밴드를 도구로 써서 조금은 쉽게 풀업을 할 수 있게 연습하는 거였다.


처음 풀업 연습을 해보는 나는 몸에 반동을 주라는 코치의 말에 마치 그네 타듯 앞으로 뒤로 몸 전체를 움직였다. 그러나 그것은 흔히 초보자가 잘하는 실수라고 코치는 말했다. 마침 내 옆에는 꾸준히 운동한 포스가 팍팍 나는 여성 한 분이 있었다. 똑같이 코치의 지도에 따라 한 자세, 한 자세 따라하는데 나와 달리 자세가 올바르고 동작에 자신이 넘쳤다. 철봉에 매달린 채 몸의 중심부인 허리는 철봉과 수직으로 같은 위치에 곧게 유지하고 다리와 상체만 앞뒤로 유연하게 왔다갔다했다. 마치 새우가 펄떡이는 모양새 같지만 그보다는 우아하고 정갈하게 보였다. 그 분은 그렇게 반동의 힘으로 두 팔을 접어 몸을 철봉 위로 들어올렸다. 난 반해버렸다. 처음으로 운동하는 여자가 멋지다고 생각했다. 나도 꾸준히 하면 저렇게 잘하게 될까? 아니, 꼭 잘하고 싶다는 마음이 폭발했다.


어느 정도 운동에 익숙해진 뒤로 나는 코치의 수업시간이 끝나고 남아서 풀업 동작을 연습하곤 했다. 연습은 지리하고 힘들었다. 잘 되지도 않을뿐더러 내 몸은 또 왜 이렇게 무거운가, 하는 생각만 가득차곤 했다. 이 무거운 몸뚱어리를 두 팔의 힘으로, 아니 상체의 힘으로 들어 올리려면 얼마나 힘이 세져야 할까? 아님 차라리 몸무게를 줄이는 게 더 빠를까? 늘 것 같지 않았지만 그래도 며칠을, 몇 달을 조금씩이라도 꾸준히 하다 보니 동작이 향상되어가는 걸 느꼈다. 역시 연습이란 보상을 주는 것이었다. 밴드를 쓰지 않고 맨몸의 반동만으로 철봉 위로 올라가는 걸 드디어 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한두 번이 고작이지만, 그래도 그게 어딘가 싶은 맘이었다. 철봉에 자주 매달리자 잘하게 되기를 고대하던 풀업에 조금 가까워진 것이다. 물론 풀업이란 동작은 여러 가지인데다 반복적으로 하려면 앞으로도 더 꾸준히 연습해야 한다. 반복해야만 나아지는 동작. 운동에도 왕도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풀업을 조금씩 하게된 것 말고도 운동을 하고 나서 내 몸에는 한 가지 변화가 더 생겼다. 바로 손바닥 굳은살이다. 손바닥 넓은 쪽과 손가락이 갈라지는 그 부분, 특히 중지와 약지로 이어지는 곳에는 더욱 크게 굳은살이 동그랗고 단단하게 박혀있다. 크로스핏을 하면 여러 도구를 많이 사용한다. 쇠로 된 바벨이나 덤벨 같은 도구들을 손에 쥐고 있으니 나도 모르는 사이 흔적이 남는가 보다. 아마도 호미나 낫을 들고 하루 내내 일하는 농부들의 손에도 이런 굳은살이 자리하고 있지 않을까? 그러고 보면 운동도 노동과 비슷한가 싶기도 하다. 실제로 내 손바닥을 본 어떤 지인은 우스갯소리로 막노동 하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물론 처음부터 곧장 굳은살이 박이진 않았다. 처음 철봉에 매달리던 날 손바닥에는 물컹한 물집이 잡혔다. 철봉을 처음 손에 쥐면 제대로 쥐는 요령이 부족해 손을 움직일 때마다 손바닥에 지속적인 압력과 마찰이 생긴다. 그러면 여태껏 쇠붙이 같은 걸 오래 만져본 적 없어 부드럽기만 한 손바닥에 물집이 잡히거나 살갗이 벗겨지기도 하는 것이다. 물집도 물집이지만 살갗이 벗겨져 드러난 빨간 속살은 조금만 움직여도 따갑고 물이라도 닿으면 그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심했다. 다른 것보다도 철봉에 매달릴 때 손바닥에 압력과 마찰이 많이 생겼는데, 어느 정도 운동이 숙달된 후에는 철봉에 매달리기 전 손바닥 보호대를 착용한다. 그러면 적어도 손바닥이 까지는 불상사는 막을 수 있다. 이젠 운동을 한두 달 쉬어도 손바닥에 있는 굳은살은 쉬이 없어지지 않는다. 굳은살 있는 내 손바닥을 보면 기분이 좋다. 운동을 열심히 한 사람의 표식 같아서.


굳은살 있는 손은 왠지 운동을 더 잘하게 만들어주는 마법 같은 힘이 있다. 예전엔 손이 아파서 철봉을 오래 잡고 있기가 힘들었는데 이젠 철봉을 오래 잡고 있어도 그렇게 아프지 않다. 풀업 같은 동작을 여러 번 해서 손바닥에 마찰이 많이 생겨도 물집이 잡히거나 살갗이 까질 일도 거의 없다. 모두 굳은살 덕이다. 나는 굳은살이 그동안 열심히 운동하고 연습한 시간의 흔적을 보여주는 것 같다. 마치 나무의 나이테 같다. 따지고 보면 굳은살 때문에 노동자 같다는 말도 그만큼 성실하게 일한 시간의 가치를 표현하는 말 아닌가. 누군가는 여자 손 치고 부드럽지 않네요, 할 수도 있지만 나에게 그건 전혀 신경 쓰이는 말이 아니다. 나는 내가 시간을 들여 운동한 흔적이 뿌듯하고 그것을 몸에 새겼다는 감각이 기쁘다.


이것과 비슷한 감각은 또 있다. 한때 나는 기타를 치고 싶어 코드 몇 개를 배우고 연습했다. 기타는 몇 번 연습하지 않아도 손끝이 아파서 10분 이상 연습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다가 며칠을 쉬지 않고 연습했을 때 손끝이 빨갛고 조금씩 갈라지는 느낌이 들더니 약간의 굳은살이 자리잡아간다는 것을 느꼈다. 갓난아기의 머리 숨구멍이 아직 열려 있는 것처럼 내 손가락도 아직 단단해지려면 더 연습을 해야 했지만 기타 줄에 손을 댈 때마다 고통스럽던 시기였다. 그때 기타를 가르쳐주던 선배가 말하길, “손가락 끝이 갈라지고 찢어지는 그 고통을 감수하고 계속 기타를 쳐야 비로소 손이 편해져.”


그러고 나서 선배의 손을 보니 손끝이 뭉툭하고 단단했다. 그로부터 몇 년 후 나에게도 손바닥에 동그랗고 단단한 굳은살이 생겼다. 이 흔적이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는 걸 몸소 체험한 나는 안다. 아파도 꾸준히 철봉을 잡고 바벨을 들어 올린 시간들이 쌓여 만들어 놓은 것이다. 연습의 과정이 없었다면 단단해지는 일도 없었겠다 싶다. 약한 시간을 잘 버텨내고 나면 그 다음부터는 단단함이 나를 잡아줄 거라는 믿음. 운동으로 단단해진 내 손바닥을 보니 이제 알 것 같다.





*위 글의 초고 : https://brunch.co.kr/@picasophia/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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