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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슬기 Dec 27. 2021

영광의 상처 (1)

크로스핏 하다 보면 손바닥이 까지는 일은 다반사죠

영광의 상처 1



흙 내음 가득한 초등학교 운동장에는 늘 철봉이 있었다. 철봉에서 자주 놀았던 기억이 난다. 두 손으로 철봉을 잡고 허리춤까지 몸을 올린 뒤 앞으로 몸을 숙여 한 바퀴 돌아 다시 제자리로 오는 것쯤 식은 죽 먹기였다. 게다가 나는 그것을 거꾸로도 할 수 있었다. 정글짐, 구름사다리, 늑목 같이 현란한 기구보다 딱 세 개의 기둥으로만 이루어진 철봉이 좋았다.


중학생이 되고 나선 철봉과 멀어졌다. 부러 초등학교 운동장에 가지 않는 한 내 생에 다시는 못 만났어야 하는 추억의 철봉은 20년 가까이 지나서야 크로스핏 박스(헬스장을 ‘짐Gym’이라 부르는 것처럼 크로스핏을 하는 공간을 ‘박스Box’라고 부른다.)에서 다시 만났다. 그 옛날 철봉은 기둥이 알록달록한 색상이었지만 박스에서 본 철봉은 오로지 검은색이 전부였다. 무엇보다 어린 시절 키로는 두 배 가까이 높고 165센티미터가 된 지금의 내 키에서도 손이 닿지 않는다. 두 손 높게 뻗고 점프의 도움을 받아야 가까스로 철봉을 잡을 수 있었다.


크로스핏을 처음 하러 간 날, 나와 달리 운동을 꾸준히 해온 듯한 여성 한 분이 철봉운동을 하는 모습을 보고 경탄했다. 너무 멋있어서 나는 그 여성분에게 홀딱 반해버렸다. 처음으로 운동하는 여자를 동경하기 시작했다. 그날 나도 저렇게 운동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깊이 박혔다.


크로스핏 동작 중에 풀업이라는 동작이 있다. 팔을 당겨서(Pull) 몸의 일부를 철봉(Bar) 위로 올리는(Up) 동작이다. 가장 기본적인 풀업이 턱을 철봉 위로 올리는 턱걸이(Pull Up)다. 가슴을 철봉 위로 올리는   건 체투바(Chest to Bar), 상체 전부를 철봉 위로 올리는 건 머슬업(Muscle Up)이고, 매달린 상태에서 무릎을 팔꿈치까지 끌어당기는 건 니투엘보(Knee to Elbow), 발끝을 철봉까지 올리는 건 토투바(Toes to Bar)라고 한다.


철봉운동을 하려면 바에 매달리는 게 기본이다. 얼핏 매달리고만 있는 건 전혀 힘들지 않아 보일 수도 있지만 여기에도 힘이 필요하다. 생각해 보라. 두 팔로 내 몸무게를 들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거기에 바를 잡고 있는 손아귀의 힘, 악력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미끄러워서 오래 버티지 못한다. 그래서 처음엔 아무 동작도 하지 않고 매달리기만 30초, 1분씩 해보기도 했다.


일단 상체의 근력과 악력으로 버티기가 된다면 그다음 구체적인 동작들을 할 준비가 끝난다. 철봉으로 하는 운동을 배우고 연습하면서 누누이 느낀 건 내 몸무게를 두 팔의 힘으로만 들어 올리는 건 정말 쉽지 않구나,라는 것. 아니다, 내 몸이 이렇게나 무거웠구나,라는 것이었다. 나는 풀업이 너무 하고 싶었다. 그냥 하는 것 말고 ‘잘’하고 싶었다. 뭐든 그렇듯이 숙련되기까지는 반복과 연습만이 답이다.


간혹 처음 운동하는 사람이 너무나도 쉽게 풀업을 하는 경우를 본다. 사람마다 체형이 다르고 가진 신체능력도 다르다 보니 철봉운동을 하기에 더 유리한 사람이 분명 있다. 그걸 인정해도 부러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나도 몸무게가 좀 덜 나갔더라면…. 하지만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는 법! 몸무게가 가벼운 게 이점이 되긴 해도 연습하지 않으면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지 않은가. 몸이 무거운(?) 만큼 근력을 더 키우기로 맘을 다잡았다. 크로스핏은 신체 능력의 여러 가지를 골고루 단련시키기에 좋아서 운동을 매일 하면 신체능력도 조금씩 향상되었다. 그리고 따로 시간을 내어 철봉에 매달려 연습했다.


하지만 생각만큼 자주 할 수는 없었다. 철봉을 오래 잡고 있으면 손바닥이 아프다. 쇠로 된 바를 손에 잡고 쥐었다 폈다 하는 동안 그 마찰로 인해 손바닥엔 굳은살이 생긴다. 이건 오랫동안 한 사람보다 처음 한 사람에게 더 자주, 더 빨리 생긴다. 요령도 없고 손도 이전까지 맨들하기만 했으니 당연한 일이지. 나도 철봉을 잡고 매달리고 안간힘을 쓴 날이면 어김없이 손바닥에 굳은살이 올라왔다. 중지와 약지가 시작되는 부근에 동그랗고 딱딱한 살이 힘껏 솟아올라오는 것이다. 굳은살이라고 해도 처음부터 딱딱하지는 않고 손톱이나 손끝으로 눌러보면 밀가루 반죽처럼 폭신하다. 그러면 나는 운동 열심히 한 기분에 한껏 도취된다. 굳은살만 본다면 그리 아프지도 않고 운동한 사람의 표식 같아서 기분도 좋았다.


크로스핏의 묘미는 손바닥에 굳은살이 생기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쇠로 된 기구를 만지는 동작을 몇 번 하고 마는 정도에 그친다면 굳은살도 더 커지지 않겠지만, 간혹 철봉 운동으로 와드(‘Workout of the Day’의 약자로 오늘의 운동이라는 뜻이다.)라도 수행하는 날에는 굳은살이 물집으로 발전하거나 혹은 벗겨지는 경험을 맛보게 된다. 안 그래도 지속적인 압력과 마찰로 인해 피부가 두꺼워진 곳에 계속해서 자극을 주니 심해질 수밖에.


굳은살이 까지는 고통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살이 벗겨진 곳엔 아직 새빨간 속살이 있다. 자연적으로 교체된 살이 아니라 마찰로 인해 벗겨진 것이라 보호받지 못한 살은 완전 무방비 상태다. 연약한 살은 손바닥을 구부리거나 펼 때조차도 통증을 유발한다. 운동을 한 다음에는 씻어야 하는데 굳은살이 까진 곳에 물이 닿을 때마다 지옥, 악몽, 고통, 두려움 이런 것들이 쓰나미처럼 온다.


이런 불상사를 사전에 막기 위해 손바닥 보호대를 착용한다. 보호대를 착용하면 그나마 손과 쇠의 마찰을 줄여주어 굳은살이 벗겨지는 것을 예방할 수 있다. 간과하지 말 것은 손바닥 보호대가 굳은살이 까지거나 물집이 터지는 것은 어느 정도 방지해 주지만 그렇다고 굳은살이나 물집이 안 생기는 것은 아니다. 간혹 손바닥에 땀이 나면 미끄러워 운동하기가 불편하면 탄마가루를 손에 슥슥 발라준다. 가정 시간 혹은 당구장에 가면 있는 초크와 비슷한데, 이걸 바르면 왠지 운동할 때 더 자신감이 붙는다. 하지만 굳은살이 더 잘 벗겨지는 건 감수해야 한다.


운동을 하면서 체형도 조금씩 달라지는데, 손이 변하는 건 예상치 못했다. 사람들에게 굳은살이 박여 딱딱해지고 단단해진 손바닥을 보여주면 우스갯소리로 막노동하는 건 아니냐고도 한다.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처음에 배우기 시작해서 가끔 실수도 하다가 조금씩 나아져서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은 노동이나 운동이나 마찬가지다. 때론 여자 손에 굳은살이 생겼다고 걱정을 듣기도 하지만 나에겐 전혀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굳은살로 단단해진 내 손이 더 좋다. 세상에 ‘여자 손’이란 건 없다. 어릴 적 부모님 덕에 큰 고생하지 않은 건 감사하지만 이젠 스스로의 의지로 더욱 단단해진 거나 다름없으니까.


굳은살이 운동능력을 더욱 향상시켜준다. 어느 정도 연습을 한 후에는 동작이 익숙해지고 이 굳은살이 동작을 보다 안정적으로 잡아준다. 말랑한 손은 계속해서 굳은살이 생기고 까질 위험이 있지만 굳은살이 박여 단단해진 손은 더 이상 피부가 까지거나 다칠 위험이 적다.


예전에 기타를 가르쳐주던 선배는 내게 기타를 처음 잡으면 한 번은 손가락 끝이 갈라지고 찢어지는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고 했다. 아파도 연습을 쉬지 않고 계속하면 결국 손끝의 말랑하던 살이 굳고 단단해져 기타줄 잡기가 편해지는 거라고. 크로스핏도 마찬가지다. 처음의 어떤 지점을 넘기면 그다음부터는 단단함이 나를 잡아준다. 단단해진 손바닥을 보고 만지다 보면 내 마음도 그만큼 단단해 졌을까 상상해 보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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