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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슬기 Feb 25. 2024

어쩌다 내게 온

‘건강검진 결과 공복혈당 수치가 높게 나와 당뇨가 의심됩니다. 빠른 시일 내에 재검사하시길 바랍니다.’ 


홀수년마다 국가무료검진을 받아온 지 몇 년째, 그간 별 탈없더니 이런 문자를 받았다. 고개를 갸우뚱했다. 당뇨라는 병명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피부로 느끼지 못했다. ‘요즘 단 걸 많이 먹어서 그런가?’라고 생각했다가 ‘이상하다, 내 몸은 말짱한데.’하고 그냥 넘겼다. 먹고사는 일에 바쁘단 핑계로 미루고 미루다 한 달 즈음 지나서 다시 병원을 들러 피검사를 했다. 며칠 후 공복혈당이 약 170이라는 수치와 함께 ‘당뇨 확정’이라는 문자를 받았다. 빠른 시일 내에 치료를 위한 내진이 필요하다고 했다. 난 병원이 거리가 멀고 기다리는 게 귀찮다는 핑계로 미뤘다.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건 내 몸에 별다른 증상이 없었기 때문이다. 평소와 다르지 않게 생활했고 주변사람들에게도 마치 감기 걸렸어요라고 말하듯 “저 당뇨래요.”라고 말하곤 했다. 천진난만했다. 그렇게 문자를 받은 후 6개월 정도가 흘렀다. 


새학기가 시작되어 학교 강의 나가는 데 필요한 ‘공무원채용신체검사’를 받아야 했다. 그때 또 공복혈당 수치가 ‘이상’으로 나왔다. 보통 사람은 혈당이 80에서 120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데, 나는 피를 뽑자 혈당이 일반인의 약 두 배에 달하는 200 가까이 나왔다. 그렇다고 해서 강사 채용에 불이익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이제는 치료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병원에서 우선 약을 처방 받았지만 꾸준히 다니려면 집 근처가 좋을 듯 해 가까운 곳에 ‘당뇨전문’이라고 적힌 ‘의원’을 찾았다. 의사는 약 처방과 함께 식습관 개선과 운동을 권고했다. 나는 약은 꾸준히 먹기 시작했으나 먹는 습관은 고치지 못했다. 생각은 채소를 곁들여 집에서 요리한 음식을 먹어야지 하면서도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자극적인 음식과 인스턴트, 군것질을 일삼았다. 몇 년 째 꾸준히 하던 운동도 그때는 운동만 하면 피곤하고 두통이 와서 그만 둔 상태였다. (이런 식욕과 몸의 피곤함이 당뇨와 관련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한참 지나서였다.)


의사는 약을 먹고 운동하고 식습관을 고치면 당뇨가 고쳐질 거라고 말했다. 나는 약은 열심히 챙겨먹었지만 식습관을 바꾸진 못했다. 샐러드도 먹기 싫었고 밥을 짓고 국과 반찬을 챙겨 먹는 것도 1인 가구인 나에게는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난 약에만 의존하며 전과 같이 피자나 치킨, 햄버거 같은 걸 자주 먹었다. 3주 간격으로 병원엘 가면 여전히 혈당은 높았다. 먹는 것도, 운동도 제대로 하지는 않는다는 내 고백에 의사는 모니터 화면만 바라보며 “약 꾸준히 드시고 운동 열심히 하세요.”라고만 했다. 나는 “네.”라고 대답했지만 그럴 의지는 생기지 않았다. 약이라는 건 하루에 한 알 먹으면 된다는 명확한 규칙이 있지만, 운동이나 식사는 정확한 답이나 결과가 있는 게 아니었다. 운동도, 음식도 내가 알아서 해야 한다는 건 알겠는데 실행이 안 됐다.


나는 혼자 지내며 당뇨 관리를 누구와도 나누지 않았는데, 유일한 소통 창구가 병원이고 의사였다. 그런데도 의사에게 더 구체적으로 질문하지 않았고 의사도 별다른 방법을 알려주지 않았다. 나중에서야 당뇨환자들은 혈당측정기로 혈당 체크를 하며 혼자서도 관리한다는 걸 알았다. 만약 그랬다면 운동을 해서, 혹은 식사습관을 바꾸어서 혈당이 개선되는 걸 그때그때 알 수도 있었겠다. 그랬다면 나도 좀 더 적극적으로 개선할 의지를 가졌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방법을 찾아볼 생각도 못했던 건, 누구와도 이 병에 대해 제대로 나누지 않았던 탓 같다. 옆에서 잔소리해줄 누군가가 있었다면 달라졌을까. 


그러는 동안 내 몸은 눈에 띄게 안 좋아졌다. 병원에서 공복 혈당을 잴 때 300 넘게 찍은 적도 있다. (그때는 그 수치가 얼마나 높은지 가늠하지 못했다. 엄청 높은 것이다.) 식욕은 더 늘었고 시도때도없는 갈증으로 엄청난 물을 마셔댔다. 화장실도 자주 갔다. 돌아서면 용변이 보고 싶었고 밤에도 한두 번씩 깰 수밖에 없었다. 외출과 외부 일정을 치루는 내내 화장실 때문에 불안했다. 근데 먹는 양에 비해서 살은 점점 빠졌다. 일부러 다이어트라도 한 것처럼 몸무게는 줄어들고 옷도 헐거워진 게 이상했지만 또 싫진 않았다. 한편 몸은 조금만 일해도 피곤했다. 진득하게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 몸의 문제는 외음부 가려움증까지 번지며 전례없는 고통을 주었다. 이쯤되자 나도 드디어, 병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누가 알려주지 않는다면 내가 제대로 알아야 했다. 그제야 인터넷 검색을 했다. 당뇨의 종류, 특성, 치료법 등을 공부하고 합병증의 심각성도 깨달았다. 다시 제대로 된 당뇨전문 ‘병원’을 찾았다. 정밀한 검사를 위해 피를 많이 뽑았다. 배정된 선생님은 내 눈을 마주하고 “슬기씨”라 불러주며 함께 잘 치료해보자고 말해줬다. 이미 공복혈당이 너무 높아진 탓에 약 외에도 인슐린을 바로 처방받았다. 당뇨관리를 위한 교육도 따로 받을 수 있었다. 교육선생님은 혈당을 스스로 체크하는 방법, 나의 경우 인슐린을 주사로 주입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당뇨인에게 좋은 음식과 나쁜 음식을 설명하고 음식마다 혈당에 미치는 영향이 다르다는 것도 알려주며 공복 시간과 식사 전후의 혈당을 어느 수치로 관리해야 할지도 세세하게 말해줬다. 나는 내 병에 대한 세심한 관심과 교육을 들은 것만으로 스스로 병을 관리할 의욕이 솟구쳤다. 집으로 돌아와 먹는 것부터 바꿨다. 아침엔 샐러드와 사과, 삶은 계란 등을 가볍게 먹고 점심과 저녁은 반찬과 현미햇반으로 개선시켰다. 그것만으로 혈당이 조금씩 정상범주 가까이로 내리는 걸 발견했다. 아, 이렇게 관리하는 거였어? 


당뇨를 약으로만 고치려고 했던 지난 날의 나를 반성하며 집에서 스스로 혈당을 체크하기 시작했고 식습관을 개선해나가기 시작했다. 일주일 뒤 두 번째로 병원을 방문했다. 일주일 간의 관리 추이를 보고 피 검사 결과도 듣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의사 선생님이 조심스럽게 “조금 놀랄 수도 있는데...”라는 말로 운을 뗐다. “검사 결과를 보니 슬기씨는 2형당뇨가 아니라 1형당뇨였어요. 쉽게 말해서 몸에 인슐린 기능이 거의 없는 상태에요. 사실 이런 경우는 정말 흔치 않거든요. 그래서 아마 약만으로는 혈당 조절이 힘들었던 것 같아요.”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1형당뇨는 명백한 원인 없이 어린 아이에게도 나타나 소아당뇨라고도 불리는 것이었다. 처음엔 나도 놀랐지만 이내 수긍했다. 당뇨도 종류에 따라 치료와 관리하는 방법도 달라진다는 걸 받아들이니 오히려 안심도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나에게 당뇨는 죽을 때까지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평생 친구 삼아 잘 지내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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