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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슬기 Mar 17. 2024

이 글의 제목은 유서입니다

이 글의 제목은 유서입니다



저는 1987년생으로 양력 생일은 4월 4일, 음력 생일은 3월 7일입니다. 그러나 주민등록 상엔 6월 15일이 생일입니다. 당시 어른들께선 출생신고를 늦게 하고 벌금을 물지 않기 위해 출생일을 변경하는 일이 종종 있었던 모양입니다. 보통 B형들은 싸가지 없고 대범하다고 하는데, 전 B형치곤 좀 소심한 편인 것 같아요. 짜증나는 걸 제대로 말하기보다 늘 꿍하게 입을 삐죽 내밀며 표현 아닌 표현을 했어요. 그 덕분에 글을 쓰게된 것 같지만요. MBTI는 몇 년 째 ISFP에서 바뀌지 않습니다. 흔히 예술가 유형으로 알려져있지만 그저 게으른 성정이라 출퇴근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유형이라고 해두죠.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저는 오래 전부터 프리랜서로, N잡러로 다양한 일로 밥벌이를 하며 살고 있습니다. 스물일곱 살 때 퇴사와 독립을 기점으로 다신 취업하지 않겠다는 꿈을 10년 째 지켜온 셈입니다. 


네, 혼자서 살고 있어요. 무계획으로 나왔지만 제 삶을 돌이켜보면 독립하길 잘 한 것 같아요. 그게 잘 살아서가 아니라 적어도 나 하나 건사하면서 이런 저런 일 다 겪어내는 삶이라서요. 원가족은 같은 지역에 부모님과 오빠, 남동생이 있는데, 독립한 후론 명절 때만 찾아뵙니다. 평소에도 연락은 잘 안 해요. 또 기차로 2시간, 버스로 2시간 걸리는 어느 시골엔 친엄마가 계세요. 그곳에도 저의 여동생과 남동생이 있는데, 스무 살 때부터 1년에 한두 번 왕래하다가 삼십 대 넘어오고 나선 그마저도 잘 안 되네요. 마찬가지로 친엄마한테도 연락은 거의 안 합니다. 부모님에게 전화해서 “엄마 뭐해요?” “아빠 뭐해요?” “별일 없어요?” “저녁은 뭐 드셨어요?” 이런 걸 물어보는 게 전 좀 어렵더라고요. 말이 참 입밖으로 잘 안 떨어져요. 그렇다고 가족과 못 지낸다거나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닙니다. 음, 표현이 서툴다 정도로 해두죠.


한 5년 전부터는 반려묘 글이, 달이와 함께 지내는 중이에요. 삶을 나눌 사람 파트너가 있다면 좋겠다고 때론 바라지만, 이제와서 그건 좀 쉽지 않더라고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사람 만나는 게 전 되게 어려워요. 딱히 저도 사람 만나려는 노력은 안 하지만요. 어쨌든 지금 제 삶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는 바로 반려묘 두 마리예요. 음, 향후 10년 이상은 이 둘의 존재를 떼어놓고 일상 생활을 생각할 수는 없을 거예요. 친구는 별로 없어요. 이십 대 땐 왜 그랬는지 유년시절 친구들과 철없이 떠드는 수다가 싫었어요. 삼십 대가 되자 몇 없던 오랜 친구들과도 가치관과 생활방식이 점점 맞지 않아졌구요. 제가 생각해도 전 친구로선 재질이 영 꽝인 것 같아요. 밑바닥까지 드러낼 만큼 가까운 친구는 그때도 지금도 없(었)지만, 그래도 좋아하는 걸로 깊은 대화를 나누고 애정하는 지인은 몇몇 있습니다. 그러면 된 거죠, 뭐.


가진 돈이요? 어우, 별로 없어요. 그래도 올해는 2년 동안 꼬박꼬박 넣어둔 적금이 만기되어서 처음으로 목돈이라 불릴만 한 금액을 계좌에 찍어봤습니다. 이 돈은 다시 단기 적금을 두 군데로 나누어 들고, 반 정도는 입출금 통장에 파킹해두었어요. 아마 생활이 궁핍해지면 야금야금 빼 쓸 작정이에요. 작년부터 매달 100만 원 정도의 급여가 들어오는 일이 하나 있구요. 글쓰기모임 운영, 라디오 취재 활동 등을 하며 소소하게 벌이 중이에요. 그 외에 강의, 강연, 커뮤니티 운영, 디자인이나 편집 같은 의뢰가 예상치 못하게 들어올 수도 있을 거예요. 아, 한 가지 더. 2020년부터 출판사 등록을 하고 간이사업자로 운영 중입니다. 아직까진 책을 만들어서 내는 수익이 유지관리비를 겨우 웃도는 수준이에요. 


올해는 작년보다 일을 더 줄였는데 맨날 일에 쫓기는 듯하고 피곤해요. 요즘 나이가 들었다는 핑계를 자주 내뱉는데요, 정말 신진대사가 젊을 때만 못 한건지, 1형당뇨 자가면역질환을 갖고 있어 그런 건지 잘 모르겠어요. 약 3년 전에 고지혈증과 함께 진단을 받고 관리 중이에요. 아직 합병증도 없고 큰 불편함 없이 병과 함께 잘 지내고는 있는데, 해가 지날수록 몸이 피곤해지는 건 좀 이상하다 싶어요. 그 외에도 일자목에 요추 4-5번에 약간의 디스크가 있어요. 크로스핏을 7~8년 정도 했는데, 이젠 몸에 무리가 가서 근력운동과 요가로 운동 종목을 바꿨어요. 가끔 역기를 머리 위로 60kg를 거뜬히 들고, 바닥에서 허리까지는 100kg도 들던 시절이 그립기도 합니다, 엉엉.


아, 사실 제가 책을 엄청 좋아하거든요. 특히 종이책을요. 그래서 독립하고 나서 책 사는 것만큼은 사치를 맘껏 부렸어요. 한 번 사기 시작하니 멈출 수가 없... 몇 번 정리하기도 했는데, 계속 사는 책은 늘어서 현재 (얼추 둘러보니) 600권 가까이 될 것 같네요! 출판사에서 직접 펴낸 책들은 제외하고요. 다 읽었느냐는 질문은 말아 주세요. 책이란 읽을 책을 사는 게 아니라 산 책 중에 읽는 거라고 하는 말 들어보셨지요? 


만약 제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었을 때 가장 걱정되는 건 글이와 달이의 향후 거처입니다. 정말이지, 이 두 아이보다 먼저 가고 싶진 않았는데요. 제가 다시는 글이 달이를 돌보지 못하게 되었다면 글이와 달이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한참을 고민하며 다음 문장 쓰기를 주저하고 있어요. 부모님은 집 밖에서 고양이를 키우고 계시지만 아마 집에는 들이지 않으실 것 같아요. 아무래도 서울에 있는 A 언니에게 부탁드릴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연극 극단에서 처음 만난 언니는 늘 엄마처럼 집단에 있는 모두를 품어주는 사람이지요. 2년 전쯤에 언니가 어린 길고양이를 구조하고서 데려와야 할지 말지 고민했던 게 떠오릅니다. 생명에 대한 책임을 결코 가볍게 보지 않는 언니에게, 남은 글이 달이의 삶을 맡길 수만 있다면 전 더 바랄 게 없을 거예요. 부디 부탁드려요. 제가 갖고 있는 현금과 계좌에 있는 자산은 모두 글이 달이의 돌봄을 위한 비용으로 남깁니다.


제가 읽거나 읽지 못한 책들은 K 작가님이 정리해주길 바랍니다. 대학원 선후배로 만났는데, 몇 년 뒤 읽고 쓰는 삶을 나누는 애정어린 동료가 되었지요. 책이 아무렇게나 버려지는 건 싫어요. 이왕이면 나만큼 책을 좋아하는 작가님이 책을 처분해주면 마음이 편할 거에요. 그리고 출판사 등록해지와 사업자 처리는 B 대표님에게 부탁드리고 싶어요. 부모님도 자영업을 하시지만 출판은 아마 잘 모르실 거에요. 폐가 안 된다면 제가 책을 만들고 출판사를 만들 때 옆에서 도움 주셨던 대표님이 사업장 정리를 해주신다면 감사하겠어요. 거래처나 유통 정보는 노트북에 출판사 폴더로 정리해두었어요.


그 외에 살고 있는 집의 전세대출이나 보증금 문제는 염치없게도 부모님에게 부탁드립니다. LH전세대출이라 제가 갚아야 할 건 없어요. 집에 있는 가전이나 가구, 옷 같은 것들은 대학원 선배 M과 Y에게 부탁해요. 아름다운가게에 기부해주면 좋구요, 전자기기는 그대들이 가져다 쓰세요. 당근에 팔지 말고. 


끝으로 아직 등록하지 않았지만 가능하다면 장기 기증을 희망합니다. 연명치료는 하지 않겠습니다.


2024년 3월, 이슬기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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