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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슬기 Oct 07. 2024

나만의 연말정산

#일상 #마무리 #일상환기

연말정산. 본래 가진 뜻을 뛰어넘어 저마다 1년이라는 시간을 되돌아보며 읽은 책이나 취미를 비롯해 해 온 일, 벌어진 일, 다짐했던 것, 인간관계 등 여러 범위에 걸쳐 각자의 ‘연말정산’이 이루어진다. 근래 SNS에는 새해인사와 더불어 자신의 한 해를 기록한 게시물이 자주 올라온다. 무엇을 했는지 나열해보며 뿌듯해 하기도 하고, 힘들었던 순간을 떠올리며 이젠 괜찮다 토닥이기도 한다. 뭐든 간에 잘 버텨준 스스로에게 감사하기도 하고 장하다 칭찬도 한다. 여기에 반성과 다짐도 빠질 수 없다. 그래서 해마다 가장 마음이 몽글해지는 시기가 바로 지금 아닐까. 그래, 이런 게 연말연초의 분위기지! 


“세모에 지난 한 해 동안의 고통을 잊어버리는 것은 삶의 지혜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잊지 않고 간직하는 것은 용기입니다. 나는 이 겨울의 한복판에서 무엇을 자르고, 무엇을 잊으며, 무엇을 간직해야 할지 생각해봅니다(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신영복, 돌베개, 316쪽).” 


작고하신 신영복 선생님의 문장은 언제나 위로를 준다. 덕분에 힘들었던 걸 몸에서 떼어버리기로 하든, 아쉬움에 좀 더 붙들고 있기로 하든 나는 지혜롭고 용기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 

되돌아보면 2020년은 유독 계획하는 것이 쓸모없이 느껴진 해다. 코로나19라는 전국적 유행병은 누구라도 처음 겪는 일이었기에 아무도 감히 유연하게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일상이 송두리째 흔들렸노라, 두고두고 회자되겠지. 무엇보다 ‘거리두기’는 많은 이들에게 잔인하지만 어쩔 수 없는 주문이었다. 이 질병의 최전선에서 부단히 애쓰는 분들에 비하면 나의 일상은 무너지긴 했어도 견딜 만 한 것이었다. 

가족과 떨어져 독립을 자처하고 나만의 방식으로 여러 가지 일과 작업을 병행하며 살아온 지 오래다. 그동안 혼자인 게 괜찮았다. 강인하고 둔감한 일이지만 말 그대로 괜찮았다. 그런 줄 알았다. 불안감은 서서히 커졌고 사소한 것에도 나는 반감과 화가 쉬이 차올랐다. 내가 이러는 게 이상하다 싶어 더욱 우울해졌고 연말에는 타인에게 줄 배려하는 마음이 바닥났다. 사소한 말 한마디에도 나는 짜증스러운 감정이 치밀었다. 처음엔 밖을 향하던 미움도 서서히 나를 향해왔다. 타인과 연락을 주고받는 것이 이토록 힘들어질 줄이야 생각도 못했다. 이것이 사람들이 말하는 코로나블루를 넘은 코로나레드인 걸까.

정리가 필요했다. 연말은 정리하기에 더없이 좋은 환경이기도 했다. 하던 일은 하나둘 마무리되었고 사적인 약속도 취소되거나 잡지 않았다. 부러 나를 바삐 움직여 이 혼란함과 우울함을 모른 척 하지는 말자고 다독였다. 당분간 아무것도 하지 않을 시간을 갖고자 했다. 오래된 연락처를 삭제하고, 하루에도 수십 번씩 열어보는 메시지 애플리케이션의 연락처도 일일이 다 지웠다. 생각을 비우고 아무 계획도 세우지 않았다. 매일 책을 읽었다. 몇 년 간 정리하지 않은 수천 장의 사진을 하루에 조금씩 달별로 정리했다. 집 밖으로는 거의 나가지 않았지만 가끔 산책을 하고 근처 카페에서 커피를 테이크아웃 해 마셨다. 날마다 열심히 귤을 까먹었다. 겨울이니까. 한 해의 마지막 날에나 한 해의 첫 날에도 별다른 건 없었다. 조용하고, 차분하게, 온전히 홀로, 가만히 있었다.

그 흔한 다짐도, 왁자지껄한 만남도 없이 2021년으로 넘어왔다. 부엌에는 대파 한 단과 양파 한 봉이 내 손질을 기다리고 있었다. 1인 가구에게 너무 많은 양이지만 가성비가 좋아서 주기적으로 사 둔다. 손질해서 냉장(동)고에 보관해두면 요긴하게 사용하는 재료다. 

대파는 흐르는 물에 씻어 뿌리를 잘라내고 송송 썰었다. 비닐랩 세 봉에 소분해서 냉동고에 넣고 2-3개 정도는 3등분하여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양파는 일단 세 개만 손질하기로 했다. 한 개는 깍둑썰어서 냉동고 얼음 칸에 얼려두고 두 개는 손질하여 통으로 키친타올에 감싼 후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냉장고에는 일주일 전에 사 둔 당근과 감자가 있었다. 야채는 채썰기 해서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신나게 볶았다. 현미를 섞어 갓 지은 밥을 그릇에 담고 김치와 김자반을 꺼냈다. 갓 볶은 야채를 접시에 담아 들깨가루도 솔솔 뿌렸다. 오랜만에 나를 위한 저녁상이었다.



국제신문 210105자 청년의소리 칼럼

https://www.kookje.co.kr/news2011/asp/newsbody.asp?code=1700&key=20210106.220210004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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