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일과 일상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슬기 Nov 20. 2020

화장: 나를 꾸미는 일

#일상 #꾸밈의이유 

얼굴에 마스크를 쓰는 게 일상화되지 않았던 예전에는 가끔,


슬기씨, 오늘은 화장 했네요?

화장이 약간 달라졌네요?

화장을 좀 진하게 했네요?


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면 나는 어리둥절했다. 나는 화장을 언제나 똑같이 (혹은 비슷하게) 하는데 왜 사람들은 그날그날 다르게 보는 걸까? 싶어서. 


살다 보면 그런 시기가 온다. 모든 게 귀찮아지는 시기. 처음 화장품을 사고 얼굴을 단장할 수 있게 된 20대 초반을 지나 사회초년생 때까지는 열심히 화장을 했다. 20대 후반이 되어 퇴사를 되고 일보다는 공부하는 시간이 늘면서 자연스레 화장을 하지 않는 날이 많아졌고, 해도 아주 얕게 했다. 수수하게 한다는 표현이 맞겠다. 분명 수수하게 화장을 ‘하긴’ 하는 편인데….


내가 화장을 하는 순서는 스킨, 에센스, 크림, 썬크림 순서로 기초를 마친 후 비비크림을 바르거나 곧장 쿠션을 두드린다. 아이브로우와 아이라이너, 아이새도우를 써서 눈화장을 한다. 여기에 사용되는 제품들은 모두 갈색이다. 검정색은 내게 부담되는데 갈색은 자연스럽게 (혹은 티가 안 나게) 눈매를 다듬을 수 있어 만족스럽다. 다음은 틴트로 입술에 색을 입힌 후 바로 손에도 묻혀 볼에 살짝 두드려 바른다. (이러면 약간의 생기가 있으리라 믿고.) 이렇게 하면 끝. 이 화장이 어떤 날은 안 한 걸로, 어떤 날은 한 걸로 혹은 진한 걸로 보이는 이유를 알게 된 계기는 하루짜리 메이크업 수업을 들으면서였다.


한 단체 채팅방에서 지인이 메이크업 강의를 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며 소수로 함께 수업을 들을 사람을 모집했다. 나는 하겠다고 말했는데, 그 이유는 가끔 나도 화장을 잘 해서 좀 더 예쁘게 보이고 싶은 욕망 때문이었다. 요즘은 유튜브를 통해 원하는 정보를 얻는 게 훨씬 빠르고 비용도 안 든다. 하지만 나는 IT 발전이 주는 편리함을 따라가는 데 있어선 구식이고 지금 같은 상황엔 불편할 수 있는 면대면 만남을 선호하는 사람이다. 배움도 마찬가지. 


강의 주제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지속가능한 화장법’이었다. 지인의 직장동료인 강사의 얼굴은 깔끔하게 메이크업이 되어 있어 신뢰가 갔다. 가르침을 주는 선생님께 내가 평소 화장하는 순서와 화장품을 바르는 습관을 얘기했더니,


그렇게 하면 화장이 다 무너져서 금방 지워져요.


라고 하셨다. 비비크림은 촉촉하긴 하나 아무리 발라도 세 시간 이상 지속하긴 어렵다고 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면 화장품이 지워지는 일명 다크닝 현상이다. 나는 건조한 피부타입이라 촉촉한 파운데이션이나 크림을 선택해왔다. 선생님은 건조함은 기초단계에서 잡아줘야 하는 것이고 화장한 티를 내고 싶다면 매트한 재질의 화장품을 써야 한다고 말했다. 


눈 화장을 할 때도 지금 내가 하는 것보다 조금 더 아이라인을 위로 빼는 게 좋겠다고 했다. 아빠를 닮은 내 눈매는 웃으면 눈꼬리가 사라지고 더군다나 갈색으로 그은 아이라인은 거의 티가 나지 않았다. 평소 나는 마스카라도 하지 않는데, 이유가 다름 아닌 귀찮음 때문이다. 물론 나도 아예 메이크업을 모르는 건 아니라서 속눈썹이 눈매를 얼마나 또렷하게 해주는지 그 힘을 모르는 건 아니다. 하지만 새삼 선생님은 이런 내 발언에 쌍심지(까진 아니지만 과장하자면 그렇게)까지 키면서 마스카라를 꼭 하라고 강조했다. 


입술도 틴트만 발라서는 부족한 것이었다. 틴트는 바르고 나서 시간이 흐를수록 입술 위에 떠서 갈라지는 현상을 부르기 때문이다. 틴트는 기본으로 하고 그 위에 원하는 색상의 립 제품을 덧발라야 효과적이다. 


선생님이 말하는 팁들을 가지고 직접 화장을 해보는 시간을 가졌다. 여자 셋이 한 손에 거울을 들고 여러 도구로 얼굴에 치장을 하고 있자니 내 안에 숨어있던 여성성이 뿜뿜하는 듯했다. 아, 마무리가 있는데, 모든 얼굴 부위의 화장을 마친 후 반드시 픽서라는 제품을 써서 화장(품)을 피부에 고정시켜줘야 한다. 그것이 ‘나 화장 했어요’를 티내는 일의 핵심이다. 


수업을 끝내고 며칠 지나 나는 선생님이 추천해준 몇 가지 제품을 샀다. 그 욕망은 어쩌면 메이크업을 배우기로 한 순간부터 예견된 것이었다. 결국 좋은 장비(화장품)와 그것을 공들여 행할 (게으르지 않을) 시간이 있어야 했다. 


사실 내가 수수하게 화장하기 시작한 이유는 독립생활을 시작한 것과 연관이 없지 않다. 경제적인 안정을 포기하고 새로운 출발을 하면서 화장품이니 미용이니 하는 것들은 내 생활에서 배제되었다. 시간이 흘러 어느 정도 여유를 되찾으니 외적인 모습을 가꾸고 싶은 마음이 다시 생겼달까. 나의 마음이지만 이런 변화가 재밌기도 하다.


근데 외적인 모습을 꾸미고 싶은 건 나를 위한 걸까, 타인을 위한 걸까. 굳이 한 가지를 선택하고 싶진 않다. 꾸민다는 것의 본질은 호감을 표현하고 싶다는 것 아닐까. 그게 나를 향하든, 누군가를 향하든 상관없지. 다만 요즘은 통 나를 꾸밀 일이 없다는 생각이 좀 씁쓸하다. 그래도 곧 연말인데, 꾸밀 일 한두 가지는 생기지 않을까? 그때 샀던 쿠션도 다 써 간다. 조만간 새로 화장품을 장만해야지. 나를 꾸며볼 그날을, 조금은 기대해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독립출판과 입고메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