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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래도 Jun 14. 2020

귀 없는 말

"아저씨 왜 말귀를 못 알아먹으세요?" 어느 아파트 입주민이 나이 든 경비원에게 던졌다는 말이다. 그쪽 세계에서는 그냥 '임계장'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임시 계약직 노인장'의 준말. '고다자'라고도 한단다. 고르기도 다루기도 자르기도 쉽다고. 열악한 환경과 과중한 노동에 힘겨운 단기 비정규직 고령 노동자들이 흔히 듣는 말. 왜 말귀를 못 알아듣냐는 말. 귀가 잘 안 들려서? 물론 그렇지 않다.


말은 '듣는다'고 하지만, 말귀는 '알아듣는다' 한. 그냥 들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알아'들어야 한다. 눈이 좋다고 눈치가 빠른 게 아닌 것처럼 귀가 밝다고 해서 말귀를 잘 알아듣는 게 아니다.

'말귀'라는 말에는 권력이 담겨 있다. 마땅히 내 뜻대로 해야 할 누군가 그렇게 하지 않을 때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라고 한다. 말귀는 보통 맥락이나 상대의 상황을 가리지 않는다. 오로지 말하는 이의 욕망만 담겨 있다. 내가 던졌으니 어쨌든 너는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말귀'라는 말은 대부분 자신보다 약자를 향한다.


말에는 질감이 있다. 단단하거나 거친, 말랑하거나 부드러운, 뾰족하거나 뭉툭한 느낌. 말은 툭 치고 지나가기도, 툭 떨어져 쌓이기도 한다. 잘게 흩어져 주위를 감싸기도, 마음 따라 흐르기도 하며, 날카롭게 꽂히거나 둔중하게 박히기도 한다. 말이 말귀가 되어 던져질 때, 말의 질감은 달라진다. 제대로 받기 어려운 말이 말귀로 날아갈 때 듣는 이는 상처를 받는다.  

 

누군가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고 느낄 때가 있다. 바늘귀에 실을 단번에 꿰듯 찰떡같이 알아들으면 좋겠는데 상대는 계속 엉뚱한 소리를 해댄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쉽게, 잘 알아듣게 얘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듣는 이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서로 자신이 익숙한 세상의 언어로 하고 들으니 그런 일이 생긴다.

tvN '놀라운 토요일 도레미 마켓'

아홉 명쯤 되는 연예인들이 노래 가사를 듣고 맞추는 예능프로가 있다. 나름 인기도 꽤 있던 노래인데도 가사 한두 소절을 맞추기 위해 각종 찬스를 사용하고 힌트를 듣고 나서 반복해 들으며 머리를 맞대어야 겨우 무슨 말인지 이해한다. 정답을 알고 나서 다시 들으면 그제야 가사가 귀에 제대로 들어온다. '아. 저런 말이었구나.' 한다. 노래를 부른 가수나 래퍼는 과연 듣는 사람들이 그러리라고 생각이나 하며 불렀을까?


발 없는 말은 천 리를 간다지만 귀 없는 말은 당신의 마음까지만 닿으면 된다. 예전에 꽃도 말을 하는 시절이 있었다. 꽃말이라고 했다. 빨간 장미는 사랑, 튤립은 고백, 백합은 순수라는 말. 직접 대놓고 전할 수단이 많은 요즘에는 꽃말에는 별로 의미를 두지 않는 것 같다.

그 시절에는 많은 것을 살폈다. 꽃을 받으면 주는 이의 생각을 살피고, 하늘을 보고 날씨를 살피고, 지도를 찾아보며 길을 살피고, 상대의 안색을 보고 건강을 살폈다. 이제는 살펴보는 일을 조금 게을리해도 불편하지 않은 세상이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상대의 마음을 살피거나, 서로 보살피는 일까지 삶에서 덜어내도 되는 것은 아닐 텐데 흔히들 그런다.


귀 없는 말을 차근차근 전하면 좋겠다. 상대의 상황을 잘 살펴 이해하기 쉽도록 천천히, 왕이면 상대에게 힘이 되도록, 꽃을 주향기가 사이를 채우도록 전하면 좋겠다. 굳이 귀가 필요 없이 마음으로 이해되는 말들서로 나누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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