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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래도 Aug 20. 2020

지렁이 아프다

내리던 비가 잦아든 아침, 보도블록 위에 지렁이가 나와 있는 것을 본다. 일단 사람 눈에 띄었다면 그는 큰 위험에 빠진 것이다. 포식자가 발견하기 쉽고, 사람에 밟힐 가능성이 아주 높으며, 돌아갈 수 있는 흙과는 이미 거리가 멀다. 안타깝지만 선뜻 집어 들어 구해주기에는 꾸물대는 모습이 부담스럽다. 무사하길 바라며 지나치지만 무사하기 힘든 상황인 것을 안다.  


나는 보고 있어도 지렁이는 나를 볼 수 없다. 눈, 코, 귀 같은 감각 기관이 없어 단지 피부를 통해 어둠과 밝음, 진동 정도만 느낄 수 있다. 빛을 싫어하는 그가 굳이 밖으로 나올 이유는 없었지만, 빗물이 차올라 피부 호흡이 어려워서 그랬. 비가 땅을 치는 울림이 천적인 두더지 오는 것과 비슷하여 도망친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리저리 헤매다가 보도블록까지 기어 올라왔다.


지렁이는 낙엽이나 썩은 뿌리와 흙을 먹고, 뼈 없이도 길을 뚫어 공기와 물을 통하게 한다. 가 소화해 내보낸 흙 속의 미생물은 해로운 세균을 막아 식물에 좋은 땅을 만든다. 암석이 풍화되고 동식물의 사체가 섞여 수백 년이 지나야 1cm 정도 만들어지는 흙은 지구의 살갗이다. 고요와 어둠 속에서 묵묵히 그 흙을 갈아엎어 먹고 뱉어내며 생명을 불어넣는 게 지렁이다. 땅속에서 하늘의 일을 대신 행하는 성자 같은 생명체. 지렁이를 영어로는 earthworm이라 한다.


지렁이도 사랑을 한다. 지렁이는 자웅동체라 암컷 수컷이 따로 없지만 서로 짝짓기를 한다. 외로움을 느끼면 어둠 속에서 스치는 다른 존재와 서로 끌어안고 사랑을 주고받는다. 다른 동식물에 해를 끼칠 줄도 모른 채 입에서 항문으로 이어진 긴 소화 기관만 가지고, 그렇게 단순하게 5년 내외의 시간을 살아간다.


자연의 관점에서 사람은 지렁이만도 못하다. 최종 포식자의 책임 있는 지위에서도, 자신의 편안함을 위해 점점 자연을 거스른다. 결국에는 흙으로 돌아가서 지렁이의 신세를 지게 될 몸이면서 감히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 한다'는 말을 하고 있다. 만약 뱀이라면 못 밟겠지만, 지렁이는 해를 끼치지 않으니 마음껏 밟는다. 꿈틀거려봐야 위협적이지 않으니 더 그런다.


지렁이보다 비록 오래 살았겠지만, 살면서 이것저것 먹고 토해낸 것이, 배우고 내뱉은 말이, 무엇에게 지렁이만큼이나 도움이 되었을까. 지렁이처럼 어둠 속에서 외로움을 겪어본 적이나 있었을까. 그만큼 차별 없이 사랑하고 단순하며 정직하게 삶을 살았을까. 그렇다는 자신이 없다면 제발 지렁이 좀 밟지 마라. 지렁이 아프다. 힘세다고 밟지 마라. 도움도 못 되면서. 지렁이 아프다.

거절하는 지렁이[카톡 이모티콘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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