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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래도 May 11. 2019

실외기의 마음

가을이 깊다. 집을 나서는 출근길은 어둡고, 코 끝에 닿는 공기는 차갑다. 문득 상가 건물 외벽에 붙어있는 에어컨 실외기가 눈에 띄었다. 보통 회색 건물과 비슷한 색이라서 잘 보이지 않았는데, 많이도 달려있다. 무더운 여름을 뜨겁게 보내고 나서 이제는 남은 계절 동안 침묵으로 내년 여름을 기다리겠다.


에어컨은 본디 한 쌍이다. 보통 에어컨이라고 부르는 실내기를 건물 안에 놓고, 실외기를 달아 연결한다. 실외기가 냉각 가스를 압축하여 액체로 보내면, 실내기에서 증발하며 공기의 열을 빼앗아 온도를 낮춘다. 그 과정에서 발생한 열은 실외기가 팬을 돌려 밖으로 나른다. 세련된 실내기가 시원한 바람을 골고루 뿜어내며 사랑 받는 동안, 투박한 실외기는 뙤약볕 아래 매달려 열심히 일해도 사람들의 관심 밖이다. 오히려 더운 바람 뿜어낸다며 가끔 타박받는다.

세상 모든 화려함의 이면에는 어두움이 공존한다. 보이지 않는 달의 뒷편처럼 한쪽빛을 낼수록 반대편의 어둠은 더 짙어보인다. 보통 눈에 띄지 않는 회색빛으로, 관심을 끌지 않게 감춰진다. 세상은 어두운 회색빛 존재들이 화려함을 뒷받침하며 무사하게 돌아간다.

르느와르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 1876년

대학 시절 교양 과목으로 들었던 서양 미술사 수업이 떠올랐다. 담당 시간 강사가 슬라이드로 두 개의 그림을 보여줬다. 먼저 르느와르가 그린 무도회 그림. "르느와르 그림의 소재는 화려한 당시 부르주와의 세상이 많습니다. 매일 같이 열릴 것 같은 이 무도회의 화려한 옷 들... 혹시 누가 세탁할까요? 생각해본 적 있으세요?" 낯익은 그림이었지만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는 동안 다음 슬라이드의 그림으로 넘어갔다.

도미에 '세탁부' 1863년경

도미에의 '세탁부'라고 했다. 무채색의 어두운 그림 속에 강가에서 빨래를 마친 후, 아이의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가는 어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화려한 무도회의 옷은 그녀가 세탁할 것이었다. 매일의 노동으로 근근히 살아가이들의 고단한 모습이 그림에 겨있었다. 동시대를 살아간 두 화가가 들여다본 서로 다른 세상의 대비가 기억에 남았다.


그 시대만 그런 것이 아니다. 지금의 화려하고 밝은 세상 이면에는 회색빛 고단함과 어두움이 놓여있다. 지하철 승강장, 제철소 용광로, 공사장, 물류창고 같은 곳에서 해마다 2,400명이 산업재해로 세상을 뜨는 나라. 사고가 일어날 때만 잠시 눈에 띄는 이들. 사회가 그런 회색빛 이면 외면할 때 균형은 무너진다.


우리 마음도 그렇다. 다른 이들에 맞춰가며 밝은 표정으로 좋은 사람 소리 들으며 살아갈 때, 마음 한편에 홀로 돌고 있는 실외기 같은 자아는 무사한지 가끔씩 들여다보아야 한다.


에너지는 모양은 바뀌더라도 총량은 보존된다고 한다. 우리 사회와 우리 마음 에너지의 원천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실외기들은 편안한지 잘 돌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언젠가 크게 후회할 일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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