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 전 회사 근처 스타벅스에 들러 한 시간 정도 커피를 마신다. 보통은 뜨거운 커피를 텀블러에 담아 마시는데 오늘 아침에는 올 들어 처음 아이스커피를 주문했다. 9월에 이럴 줄은 몰랐다. 여름에는 더워도 아침마다 뜨거운 커피가 당기는데, 가을 아침 무더위는 오히려 못 참겠다. 말년에 탈영하는 군인 마음이 이러려나 했다.
그런데 아이스커피가 시간이 지나도 계속 씁쓸했다. 왜 이러나 보니 텀블러에 담긴 얼음이 녹지 않고 있었다. '아, 텀블러는 음료의 온도를 지키는 거지...' 아이스음료는 얼음이 녹으면서 농도가 맞춰지게 되어있을 텐데, 뜨거운 커피만 담아 마셨기에 미처 몰랐다.
서늘한 실내에서 아이스커피 마시다가 나오니 뜨거운 햇볕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모든 사물은 출렁일 때 감각되고, 출렁이며 지나간다. 온도도, 애벌레도, 강물도, 소리도, 향기도, 마음도, 빛도. 물결은 출렁거려야 빛나는 윤슬을 만든다. 쇼펜하우어는 어제의 고통은 오늘의 행복이 된다고도 했다. 삶이 출렁이는 것은 나아간다는 것, 그래서 나아진다, 낫는다, 빛난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에서 도쿄 공원을 돌며 화장실 청소 일을 하는 주인공은 매일 휴식 시간, 공원 벤치에서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햇살을 카메라에 담는다. 나뭇잎을 통과하며 반짝이는 햇살을 일본어로 '코모레비(木洩れ日, こもれび)라고 한다. 어떤 빛은 나뭇잎을 통과하고 어떤 빛은 나뭇잎에 겹쳐 그늘을 만들고 바람에 흔들리며 햇빛이 변하는 모습처럼, 매일 똑같은 것 같으면서도 변화하는 코모레비처럼 매일이 완벽한 날들임을 이야기한다.
예전에는 살면서 바깥 온도와 잘 좀 섞이고 그러는 것이 성장이라 생각했는데, 요즘은 텀블러 같은 마음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한다. 마음의 온도가 차가우면 차가운 대로, 뜨거우면 뜨거운 대로 지키며 사는 것. 그렇게 주변과 온도 차를 천천히 느껴가는 것. 바깥 온도에 맞추려 하다 보면 어떻게 변하는지도 모르고, 사는 게 너무 금방 미지근해지지 않을까.
텀블러(Tumbler)는 Tumble이라는 동사에서 왔다. 우리가 공중제비를 '텀블링'이라고 할 때 쓰는 말, 넘어지면 막힘없이 굴러다녀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텀블러 같이 사는 삶도 괜찮아 보인다. 자기 온도를 지키고, 가끔 데굴데굴 구르기도 하면서. 마음껏 출렁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