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바나나한테 전화 한번 해볼래요." “안 받아요. 자나 봐요.” 한 달에 한 번 저녁에 하는 온라인 독서 모임은 서로 별명으로 통한다. 바나나는 우리 모임 막내의 별명인데 과일 이름이 아니라 일본 소설가 요시모토 바나나에서 따왔다. 작은 도서관 사서와 일본어 번역도 하면서 에세이를 낸 작가이기도 한 바나나는 오십을 훌쩍 넘긴 한강이 노벨상계에서는 젊은 작가로 불리듯 마흔이 넘었어도 우리 모임에서는 제일 어린 동생이다. 카톡 모임방에서 언니 오빠의 시답잖은 대화에도 일일이 답변을 달고, 가끔 "앜ㅋㅋㅋㅋㅋㅋㅋㅋㅋ" 하는 커다란 웃음으로 대화방을 밝게 만드는 분위기 메이커이기도 하다.
바나나는 가끔 저녁 온라인 모임이 있는 날에 스르륵 잠들어 버려 연락이 두절되어 우리를 당황하게 만들곤 했다. 번역 작업을 주로 이른 새벽에 하기에 일찍 잠자리에 드는 습관이 있어 그렇다는데, 그녀가 무드등을 좋아한다 해서 우리는 '먼저 그 집에 쳐들어가서 무드등을 압수해와야 한다'는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러다가 그녀가 어스름한 새벽에 무드등 하나 켜고 경건히 앉아 조용히 키보드를 토닥거리는 작업 영상을 보고 '아, 저 직업도 어찌 보면 참 새벽 기도하는 수도자 같은 생활이겠구나' 생각하며 마음이 좀 너그러워지고 그랬다.
바나나도 별명이지만 별명의 별명도 있다. 프랑스어 배운다며 자기를 'Banane(바난느)'로 불러달라고 한 것 말고는 우리가 부르는 별명인데, 그중에 하나는 '믿거바'다. 매월 각자 책 한 권씩 추천하고 그중에서 골라 같이 읽는 모임에서 바나나가 추천한 책은 보통 제목과 표지, 작가 설명이 바나나 향처럼 달콤했다. 그런데 막상 뽑혀서 읽어보면 난해하거나 기대와 너무 달랐고, 점차 바나나의 추천은 우리에게 '믿고 거르는 바나나'가 되었다. 그래도 바나나는 꿋꿋하게 다음에는 정말 좋은 책을 골라 오겠다 했고, 우리는 매번 속으면서도 홀린 듯 바나나 추천 책을 선택하곤 했다.
바나나가 한 번은 여의도에 왔다. 마침 일이 있어 오겠다고 해서 시간 맞춰 회사 근처에서 점심을 먹었다. 한꺼번에 거리로 쏟아져 나온 비슷비슷한 스타일의 분주한 직장인들, 주로 빌딩 지하나 먹자 빌딩에 위치한 줄 서서 기다려야 하는 식당이나 카페가 그녀에게는 색다른 풍경이었나 보다. 나중에 그 경험을 '여의도 직장인 체험기'로 써서 보여주었는데, 내 단조롭고 반복적인 일상이 어떤 이에게는 특별히 빛나는 모습일 수도 있구나 새삼 느꼈다. 사실 분주하기로 말하면 바나나의 일상이 더하면 훨씬 더했다. 도서관을 운영하며 어학 모임, 필사 모임, 독서 모임 등등 만들고 북토크나 강의도 유치하고 지역 문화 활동도 하면서, 도서관에 자주 오는 아이들을 살갑게 챙기고 수다 떠는 아주머니나 연체되는 도서들 관리도 모두 혼자서 해야 하는 일이니까 말이다.
어느 날 답방 기회가 생겼다. 이번에는 내가 바나나 사는 근처 갈 일이 있어 도서관을 찾았다. 이름은 '지혜의 집'. 작은 도서관이라고 하지만 초등학교 운동장 한편에 있는 그곳은 생각보다 넓었다. 겨울비가 내리던 날 책 향기로 가득한 도서관, 아로마 티슈를 얹어 놓은 난롯불 앞에서 점심으로 특히 맛있다는 치즈 폭포 불고기샌드위치를 나눠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작가의 예술혼 가득한 도서관을 홀로 지키는 바나나가 마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처럼 느껴졌다. 헤어질 때 바나나는 비가 내려 불편하겠다면서 다음에 올 때는 함박눈으로 맞이하겠다 했는데, 그로부터 얼마 후 근처 독립 서점에서 독서 모임을 할 때 진짜 함박눈이 펑펑 내렸다. 그래서 그녀에게 새로운 별명이 생겼다. 지혜의 집을 지키며 날씨를 움직이는 지혜의 신. 아테나가 아닌 '바테나'라고.
최근에 놀랍고도 슬픈 소식을 들었다. 우리 동생 바테나가 지키는 지혜의 집 도서관이 내년 초에 문을 닫게 될 것 같다고 했다. 이번 정부 들어 작은 도서관이나 동네 서점에 대한 지원 예산을 삭감하고 있다는 기사를 보았는데, 아마도 그런 일련의 영향 때문이지 싶었다. 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지혜의 집을 알뜰히 가꾸어 온 바나나의 마음은 어떠려나 생각하면 착잡하고 화가 많이 났다.
세상에서 작은 존재들이 골고루 잘 사는 환경이 될수록 살기 좋은 세상이 아닐까? 주변에 작은 가게, 작은 식당, 작은 공연장, 작은 책방, 작은 도서관 같은 곳이 여기저기 있어서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다면, 삶의 고단함을 잘 아는 사람들이 모여 서로의 일상이 빛나는 것을 바라볼 수 있다면. 믿고 보는 우리 동생 바나나가 치즈 폭포 같은 끈끈한 다정함을 쏟아내며 맞이하는 그런 곳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