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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제 학교를 그만둔다

통증이 알려준 내 인생의 열쇠

by 물고기

몸이 나아지기 시작한 것은 학교를 그만두기로 결심한 다음부터였다.


아직 아무도 밝혀내지 못한 섬유근육통의 원인. 그저 몸이 모든 상황을 위기로 인식하는 자율신경계의 이상 현상이 지속되는 것이라는데 그것의 원인이 무엇인지는 어느 논문에도 나와 있지 않았다. 남의 글을 읽는 것을 멈추고 나의 글을 쓰기 시작했다. 내가 지나온 통증의 시간을 기록하다 그 시작과 악화된 시점이 모두 2월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새 학기, 학교, 담임, 그 모든 것. 내가 십여 년 간 겪은 온갖 트라우마가 쌓여 내 몸은 2018년 2월의 어느 날 작동을 멈췄다. 온몸이 통증으로 뒤덮이고 사지가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나는 항상 ‘어서 나아서 학교 일은 할 수 있어야 할 텐데.’라고 생각했지 그 ‘학교 일’이 원인일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은 어쩌면 거짓말일지도 모른다. 나는 교사가 되고 싶었던 적이 없었다. 교사가 된 이후에도 이것이 나에게 맞지 않는 옷이라는 것을 단박에 알아차렸다. 나는 모든 감각이 예민하다. 책과 음악을 좋아하고 감성적이며 눈물이 많다. 학교에서 그렇게 다양한 사람들에게 그렇게나 수많은 상처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은 몰랐다. 나는 살기 위해서 교무실 책상 서랍에 안정제를 넣어두었다. 밤 10시에 학생 가정방문이 끝난 후 집에 돌아가다 교통사고가 난 적이 있다. 삼십 대 초반의 여자 교사에게 오십 대 남성 학부형은 고압적인 자세를 취했고 나는 격앙된 감정으로 운전을 했다. 그런 가정방문을 지시한 관리자에 대한 분노가 더해졌다. 생애 첫 교통사고였다. 나는 그 후 3년간 그 길로 퇴근하지 못하고 더 먼 길로 우회했다. 공무상 재해를 신청했으나 외상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처음엔 공무원연금공단에서, 두 번째는 정부에서 거절했다. 과호흡, PTSD, 급성 스트레스 장애. 모두 인정받지 못했다.



일을 그만두는 건 어떻습니까?


내가 유 원장님에게 그 말을 처음으로 들은 것은 올해 5월이었다. 처음엔 소스라치게 놀랐다. 손사래를 쳤다. 직업 없는 삶에 대해선 생각도 해보지 않았다면서, 지금도 돌아갈 곳이 있으니 이렇게 마음 편하게 휴직을 하고 있는 게 아니겠냐고 말했다. 공무원, 안정성, 연금 같은 것들. 교사를 그만둔다는 것은 나에겐 불가능의 문장으로 여겨졌다.


교사를 그만두고 싶었던 적은 수없이 많았다. 하지만 내게 딱히 다른 대안이 없음을 알고 길을 떠났다 돌아온 것이 여러 번, 서른셋이 되었을 즈음엔 이제 그만 이곳에 정착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나는 이제 이 일에도 꽤 익숙해졌고 할 만하다고, 정말로 괜찮다고 생각했다.


돌이켜 생각하니 아프기 시작한 것이 그때쯤이었다. 내가 도전을 포기하고 학교에 다시 돌아왔을 때, 그리고 이젠 그런 것들을 하지 않고 이 맞지 않는 옷을 평생 입고 살겠다고 나 자신을 속이기 시작했을 때 내 몸이 신호를 보내왔다. 이제 막 이 직업이 괜찮아지기 시작했고, 조금 좋아지기도 시작한 때이니 타이밍이 참 얄궂다고 생각했다. 그놈의 통증, 그놈의 섬유근육통이라는 것이 죽도록 싫었다. 아프지만 않는다면 학교 일쯤은 정년 때까지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뒤집어 말하면 통증만큼이나 싫었던 것이 학교 일이었다는 소리다. 그런데도 나는 깨닫지 못했다. 내 통증의 원인이 내 직업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2년여의 시간을 보냈다.

5월, 유 원장님에게 처음으로 학교를 그만두길 권유받은 이후 정말로 교사를 그만둬도 되는 것인지, 남들은 그렇게 되고 싶어 안달이라는, 부모님의 자랑이 될 수 있을 것 같은 교사를, 그러니까 그 교사를 정말 그만둘 수 있을 것인지 끊임없이 고민했다. 그게 가능한 문장일까.


하지만 나는 내 글들이 가리키는 2월을 무시할 수 없었다. 통증이 보내는 신호를 모른 척 할 수 없었다. 일을 그만두기로 결심했다. 그저 마음을 먹었을 뿐이다. 그리고 며칠 후 나는 금요일에 열리는 아파트 장터에 무려 세 번이나 갔다 왔다. 수박 한 통을 들고 왔고 커다란 화분을 샀다. 뼈해장국과 떡과 방울토마토를 샀다. 그러고도 몸살이 나지 않았다. 이상했다. 평소의 나라면 장터를 한 바퀴 도는 것조차 지치는 일이었다.

어느 날 문득 생각해보니 내가 전보다 많이 움직이고 있었다. 움직일 수 있었다. 거의 매일 시달리던 두통도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15분이 걸리는 병원에 걸어갔다. 그마저도 걷지 못해 차를 탔고, 그때는 운전도 하지 못해 남편이 데려다주곤 했다. 걸어갈 수 있게 되었고 돌아올 때 이전처럼 온몸이 바스러질 듯 힘들지 않았다.




잠시 다시 아팠다. 2주 정도 괜찮았다가 3주 정도를 앓았다. 아직 체력이 돌아오지 않았는데 너무 무리했던 걸까. 일을 그만두는 것을 나 자신이 아직 받아들이지 못했던 걸까. 그게 뭐였든 간에 내 몸은 나에게 다시 멈추라고 말하고 있었다.


피로감이 심하고 에너지가 없어 그저 집에서 읽고 쓰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주로 좌절을 많이 했다. 왜지. 난 왜 다시 아프지. 학교를 그만두는 것이 내 통증을 해결하는 열쇠라고 생각했는데 왜지. 왜. 대체 왜 다시.

이유는 시간이 지난 후에야 알게 되었다. 당시 나는 일을 그만둔다고 마음먹고도 머릿속에 복잡한 것들이 많았다. 일단 내가 교사를 그만두는 것을 가족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어떻게 이해시켜야 할지가 큰 산이었다. 그리고 학교에서 일하며 쌓인 트라우마를 그저 이렇게 그만두는 방식으로 해결이 가능한 건지, 내 마음속에 상처는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 아닌지 의구심이 들었다. 질병휴직을 언제까지 쓸 것인지에 대한 고민까지 머릿속이 온갖 생각들로 가득했다.


내가 비로소 다시 괜찮아진 것은 그런 생각들에서 벗어났을 때였다. 7월 초, 질병휴직과 관련하여 교육청 담당 장학사와 통화를 했다. 나는 작년부터 2년을 쉬었고(하지만 병명이 다르다), 내년에 다른 병명으로 휴직이 가능한지를 문의했다. 여러 번 읽은 복무지침에는 동일 질병으로 2년의 병휴직이 가능하다고 나와있었다. 하지만 그는, 병명이 다르다 할지라도 그것이 이전 질병과 관련이 있다고 판단되면 휴직 신청이 거절될 수 있으며, 권고사직을 명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한 판단을 누가 내리는지에 대해 물었으나 그것은 기밀이라 말해줄 수 없다고 했다.


학생의 학습권이 중요하지 않습니까. 교사가 휴직을 하면 학생의 학습권을 침해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학기 구성 전 휴직 신청을 하고 대체 교사를 선발하는데 무엇이 문제라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그래서 교사 임용 시 신체검사서를 내지 않느냐고 말했다. 나는 교사 일을 하며 아프게 된 것 같다고 말했지만 그가 ‘그래서 공무상 병가를 신청하셨습니까?’라고 말하자 더 이상 그와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졌다.

일단 6개월 안에 나아지면 되지 않습니까.


내가 평생을 안고 갈 상처를 받았다는 것을 이 사람에게 어떻게 이해시키겠는가. 섬유근육통이 그런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는 걸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전화를 끊고 한동안 소리를 내어 심하게 울었다. 내가 학교에서 일한 세월이 서럽고 억울해서 울었다. 억울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뭐? 내가 학교에서 일해서 이렇게 아픈데 이제 나를 내친다고?

이미 그만두기로 마음먹었지만 쫓겨나는 것은 또 다른 의미였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나 2년 이상 아프면 권고사직이래. 그만두래. 병만 주고 약도 안 주고 쫓아내.


나는 그만두겠다고 했다. 내년 1월쯤 진단서를 또 떼고 그 진단서가 교육청에 가고 또 기밀이라는 어딘가 기관에 가고 그 판정을 기다리고 아마도 거절당한 뒤 권고사직 따위를 당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얼마 전 학교를 그만두기로 마음먹은 후 몸이 괜찮아졌다고도 말했다. 내가 아팠던 이유는 학교였다고, 바로 이게 키 key였다고 말했다.


엄마는 생각보다 담담했다. 학교를 그만둔다고 결심했을 때 가장 우려했던 부분이 엄마를 설득하는 일이었는데 예상과 달리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내가 이 정도 아팠고, 이 정도 억울하니 이젠 어쩔 수 없는 일이란 생각을 하신 걸까. 통증은 내 인생의 가장 괴로운 손님이면서 다른 괴로운 것들을 피할 수 있는 구원이기도 했다.


엄마에게 내 상황을 설명했다는 것, 학교를 그만두는 것으로 갈등을 빚을 일이 없을 거라는 것, 휴직 때문에 더 이상 교육청과 실랑이하는 일이 없을 거라는 것.

비로소 내 몸은 다시 나아졌다.


마지막 휴직을 위한 진단서를 받기 위해 병원에 갔다. 6개월 기간이 명시되어야 한다고 말하자 원장님은 보통은 3개월씩 경과를 보고, 6개월은 정말 회복하기 어려운 경우에만 쓴다고 말씀하셨다. 6개월 진단서를 낸 후 일을 다시 하게 되는 건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하셨다. 나는 6개월 후에는 완전히 그만둘 것이므로 상관이 없다고 말했다. 우리는, 나의 그 단호함이 몹시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마지막 휴직 서류를 내고 오니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그 즈음 내가 취미로 하던 것을 일로 확장시키기 시작하며 활력을 찾았다. 올해 초, 집에만 있을 수 있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읽는 것과 쓰는 것뿐이었다. 나는 많이 읽고 많이 쓰기 시작했다. ‘다이어리 꾸미기(다꾸)’라는 취미를 갖게 되었다. 그저 집에서만 할 수 있는 것이라 나에게 딱이었다. 수 백개의 마스킹 테이프와 스티커, 메모지를 샀다. 날마다 일기를 쓰고 다이어리를 꾸몄다.


그러다 어느 날 아이디어가 떠올라 나의 문구 브랜드를 만들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그것이 내 일생 바라 온 하고 싶던 일은 아니었지만 지금의 내가 하고 싶은 일임은 분명했다. 제작, 주문, 검수 등 모든 과정을 혼자서 했지만 괴롭지 않았다. 일이 많아 피곤해도 괴로운 적은 없었다.

8월 3일, 유 원장님은 내가 이렇게 활기 넘치는 모습은 정말 오랜만에 본다며 활짝 웃으셨다. 나도 웃었다. 그곳에서 울지 않은 것이 정말 오랜만이었다.


- 예전에 음악 할 때 같습니다.


하고 싶은 걸 할 때의 모습. 나는 그 모습을 하고 있다고 했다.

- 저는 하기 싫은 걸 해서 아팠던 걸까요, 하고 싶은 걸 안 해서 아팠던 걸까요?

- 둘 다죠.


입에서 나온 순간 나도 그렇다고 생각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하고 싶은 일을 병행했다 한들 학교에 있는 한 내가 아프지 않을 도리는 없었을 것 같았다. 나는 그 일을 하며 절대 온전히 나일 수 없었다.



세상에 스트레스 안 받는 일이 어딨니. 안 힘든 사람이 어딨니. 학교 일로 힘들다고 할 때, 나는 이 일이 맞지 않으니 그만두겠다고 할 때 사람들은 그런 말들을 했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느냐며 그러니 너도 그렇게 살으라며 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전에, 하고 싶지 않은 일을 그만두고 싶었다. 버티는 삶을 그만 끝내고 싶었다. 누르고 견디고 버티며 사는 그 모든 날들과 생각더미를 내 인생에서 끊어내고 싶었다. 나에겐 그것이 나를 살리는 길이었다.


마지막 휴직이 끝나는 6개월 후, 나는 아프기 때문이 아니라 더 이상 그렇게 아프지 않기 위하여 학교를 그만둔다고 말할 그 날을 기다린다.

나는 모두에게 말할 것이다.


아니요. 저는 이제 아프지 않습니다.

제 몸을 해치는 일을 더 이상 지속할 수는 없습니다.

저를 살리기 위해 저는 학교를 떠납니다.

나는 이제, 앞으로만 나아갈 것이다.

20.8.12.


20년 6-7월의 일기들


*21.3.1일자로 의원면직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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