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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도 잡지 않고 계획도 세우지 않는다

지킬 수 없으니까

by 물고기

월요일은 머리를 감는 날이었다. 시원하게 감으니 좋았지만 손에 걸리는 머리카락들이 거추장스러웠다. 조금이라도 덜어내면 좀 덜 힘들게 감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숏컷은 작년에 했다 너무 안 어울려 내 맘에 들지 않았으니 단발인 선에서 가장 짧게 자르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외출을 하겠다고 마음을 먹는 경우는 매우 드물기에 곧장 집 앞 미용실에 전화를 걸었다.

- 혹시 오늘 당일 예약 가능할까요?
코로나 때문에 내 일상이 달라진 건 딱히 없지만 이럴 때 불편하다. 미용실도 예약 손님만 받고 사람들끼리 서로 마주치지 않아야 한다.

월요일이라 비는 시간이 없다고 했다. 오늘은 안 되고 화요일이나 수요일은 된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쉽사리 예약을 할 수 없었다.

- 아 그게 제가 날마다 몸 컨디션이 좀 달라서요, 내일 일어나 보고 갈 수 있으면 연락드릴게요.

일주일 후도 아니고 바로 다음 날인데 집 앞 미용실 예약 하나 못하고 전화를 끊었다. 아 못하지. 나. 약속 같은 거.



약속을 잡지 않은지는 오래되었다. 내 몸이 내 마음 같지 않아 지면서, 대부분의 날들에 통증이 존재하면서 나는 어떤 정해진 날 무엇을 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 당장 내일 아침도 알 수 없는데 일주일 후를 어떻게 예측할 수 있을까.

그래서 사람을 만나는 약속은 잡지 않는다. 그게 3년쯤 된 것 같다. 그 사이 나와 만난 사람이 있다면 그건 아마 즉흥적인 만남이었을 거다. 남편과 결혼 전에도 그냥 그날그날 만났다. 아픈 후 속상한 점 중 하나는 공연을 보기 어려워졌다는 점이다. 최애의 공연 예매 공지가 뜰 때 남편과 나는 항상 고민을 하다 일단 예매를 하고, 공연 날짜 즈음에 아쉬워하며 취소하길 반복했다.

유일하게 내가 잡는 약속은 병원 예약이다. 그 약속만 지킨다. 명절에 고향에 가는 것도 아예 못 가거나 당일에 괜찮으면 내려가는 식이다.

학교를 그만두러 가는 것도 12월과 1월 사이 어느 날 당일 아침에 결정했다. 그날이 컨디션이 괜찮았기 때문이다. 아프기 때문이 아니라 아프지 않기 위해서 학교를 그만둔다고 말하기에 적절한 날이었다. 그날은 정말 씩씩했다. 사람들은 나를 이젠 괜찮은 사람으로 기억할 것이다.



집에만 있어도 괜찮은 것과 원할 때 나가기 어려운 것은 별개의 문제다. 분명 나는 아프지 않을 때도 집에서 뒹구는 게 가장 좋았지만 이렇게 내가 하고 싶은 일이라거나, 해야 하는 일을 못하게 되는 건 좀 곤란하다. 손도 아프고 목도 아프고 머리카락이 너무 무거워 좀 자르고 싶은 것인데 당장 내일 미용실 예약도 하지 못하는 건 좀 속상하다.

그런 상실감에 허우적거리던 때가 있었다. 통증을 이고 지고 살게 된 첫 해엔 이런 행동의 제약이 너무 생경했다. 외출을 하고 약속을 하고 미래의 내가 그 약속을 지킬 수 있는 컨디션일 거라 믿는 것들을 못하게 되는 것들이 낯설었다.

사람은 상황에 맞춰 변한다. 나는 매 해 조금씩 덜 계획적이고 덜 체계적인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지킬 수 없으니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 그냥 할 수 있을 때 한다.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지금보다는 더 계획적인 사람이었다. 잠들기 전에 다음 날의 투두 리스트를 적고 자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손도 아프고(3달 전 오른손 수술을 했다) 편두통도 괴롭다. 그때보다 더 기능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면서 계획을 지키는 것도 더 어려워졌다.

손이 아파 병원을 다니고 수술을 받고 손을 쓰지 않는 사이 프린터는 혼자서 고장이 났다. 서비스센터에 가져갔더니 2월 한 달을 꼬박 그곳에 있다 돌아왔다. 프린터가 돌아온 후 나는 문구점 신상 작업을 다시 시작했다. 작년에 문구점을 처음 열 때는 날마다 체크리스트를 적었다. 1인 문구점은 신경 쓸 일이 정말 어마어마하게 많기 때문에 적지 않고는 운영이 불가능했다. 그땐 마켓 오픈 일자를 매달 정해두었기에 일정과 할 일을 플래너에 체계적으로 정리하기도 했다.

이번에도 사실 하루는 체크리스트를 적었다. 그리고 그다음 날부터는 그만두었다. 내가 목표한 만큼 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걸 굳이 적는 건 너무 무의미해 보였다.

지금은 그냥 ‘얼추’ 작업을 한다. 그 날 할 것을 정하지 않고, 애초에 그 날 일할 것도 정하지 않는다. 아침에 몬라와 몬스를 보러 2번 방에 갔다가 어쩌다 의자에 앉으면 글씨를 끄적인다. 의자에 앉았을 때 하는 일은 내가 해야 할 일과는 항상 다르게 흘러간다. 일단 지금까지 만든 걸 정리해야 하는데 어제는 또 새로운 스티커 팩을 만들었다. 또 일을 벌이고야 말았다. 이러니 계획이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지금은 창작의 시즌이니 그냥 자유롭게 두자고 생각한다.


목요일이다. 아직 머리를 자르지 못했다. 아마 당분간은 약속을 지킬 나를 믿기가 어려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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