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늦가을
유산으로 소파수술을 한 뒤 다시 산책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두 달이 지난 후였다. 그제야 나는 15분 거리의 병원에 겨우 걸어갈 수 있게 되었다. 임신과 유산 전의 나도 섬유근육통을 진단받을 만큼 이미 체력이 많이 떨어진 상태였지만, 그때의 나는 그냥 체력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였다. 나는 내가 더 약해질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우리는 잠시 제주도에 가기로 했다. 사람들이 많이 하곤 하는 물 좋고 공기 좋은 곳에 가서 쉬는 것을 하기로 했다. 나는 몸과 마음이 매우 약해진 상태였고 그저 내가 그곳에서 조금이라도 나아질 수 있길 바랐다.
문제는 이동이었다. 공항까지 차로 30분, 비행기로 한 시간, 숙소까지 한 시간. 보통의 사람들에겐 아무것도 아닐 일정이지만 내게 장거리 이동은 특히 힘든 일이었다. 고정된 자세로 장시간 있으면 근육의 경직, 당김, 통증이 극도로 심해졌다. 영화관에 갈 수 없었고 장거리 이동을 할 수 없었다. 통증이 삶에 끼어든 후 고향에도 거의 가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장시간 이동을 하게 되면 나는 온몸이 바스러지는 것 같았다.
그때 즈음 스트레칭을 하면 쇄골 안쪽 깊숙한 어딘가에 예리한 통증이 느껴졌다. 새로운 통증이었고, 뭔가 안 좋은 신호라 느꼈지만 아직 심각하진 않아 병원에 가기도 애매했다. 내가 세 시간의 이동을 해낼 수 있을지 판단하는 것도 애매했다. 일단은 중간중간 끊어지고, 한 번만 이동하면 가서 쭉 쉴 수 있으니 일단 가보기로 결정했다.
목 베개를 두 개나 챙기고 만반의 준비를 한 채 비행기에 올랐지만 고정된 자세가 주는 근육의 뻣뻣함과 통증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있을 뿐인데, 그게 그렇게 찢어지고, 당기고, 찌르는 듯한 통증으로 나타나는 것을 참 이해할 수 없었다. 한 시간의 비행 후 오른쪽 상체가 통증으로 너덜너덜해졌다.
숙소까지 가는 셔틀버스는 매우 불편했고, 난 팔을 떼어내고 싶었다. 이미 통증의 끝을 여러 번 찍어봤다고 생각했지만 이건 또 다른 느낌이었고, 새롭게 다른 끝을 찍고 있었다. 왜 쇄골 안쪽이 이렇게 아픈지, 어깨를 조금만 움직여도, 아니 움직이지 않아도 이렇게 무너질 것 같은지 도통 알 수가 없어 더 아프고 두려웠다. 이건 분명 새로운 증상이었다.
다음 날, 제주도까지 온 우리의 첫 일정은 가까운 병원에 가는 것이었다. 재활의학과에 가고 싶었지만 한림읍에는 없었고, 전혀 선호하지 않지만 정형외과만 있기에 어쩔 수 없이 갔다. 노동을 하는 어르신들이 많아 그런지 대기실이 꽉 차 있었다. 증상을 설명했고, 리도카인이 들어가는지, 스테로이드가 들어가는지 질문했지만 의사는 자세히 설명하지 않으려 했다. 병원에서 맞는 주사는 보통 서너 시간의 약효가 있고, 주사 때문이라기보단 더 이상 장거리 이동을 하지 않기 때문에 통증은 줄어갔다.
그런 이유로 우리의 이동은 한림, 길어봤자 애월 정도를 벗어나지 못했다. 숙소가 있었고, 차도 있었기에 제주를 맘껏 누비며 비 한번 오지 않았던 그 좋은 날씨와 예쁜 풍경을 만끽했으면 좋았겠지만 나에겐 그럴 체력이 없었다. 나의 에너지에 맞춰 움직이다 보니 우린 보통 하루 한 번의 외식, 그리고 잠깐의 산책을 했다.
제주에서 우리의 bgm은 주로 그즈음 새로 나온 이승환의 새 앨범, 또 그즈음 새로 나온 시와의 새 앨범, 여행 느낌이 물씬 나는 페퍼톤즈의 밝은 노래들이었다. (남편과 나는 둘 다 이승환과 시와의 big 팬이다.) 그 해가 마침 가수 이승환의 데뷔 30주년이라 앨범에 ‘30년’이라는 노래가 있었는데, 나는 그 노래를 들을 때면 내가 살아온 날에 30을 더 해도 아직 삶이 끝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높다는 사실에 좌절하곤 했다. 통증을 가지고 살아가는 날들은 너무 지쳤고, 그렇게 살기에 인간의 수명은 너무 길었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이규호의 곡은 너무 예뻤고, 나는 새 앨범에서 그 곡을 가장 좋아했다. 그리고 그의 노랫말처럼 다시 날아보고 싶었다.
하얗게 많은 날들이
운명처럼 널 기다리고 있어
다시 날아보는 거야
이승환 – 30년 中 [이규호 작사/작곡]
11월 어떤 날의 오후에도 산책을 하고 있었다. 오른쪽 목, 어깨, 쇄골 부위가 쉴 새 없이 아팠고, 나는 그곳을 연신 누르거나 돌리며 걸었다. 그러다 갑자기 뛰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스트레칭을 해야 겨우 걸으니 그냥 팔을 자연스럽게 흔들게 되는 달리기를 해버리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 처음 생각은 정말 단순했다.
나는 달리기라곤 평생 제대로 해본 적도 없고 중학교 때 100M 공식 기록이 26초인 초 느림보인데 갑자기 달리기라니. 마침 내 팔목엔 애플워치가 있었고, 그냥 한 번 달려보았다. 처음 달린 거리는 330M였다.
그 후 일주일간 나는 제주에서 하루를 달리고 하루를 쉬었다. 뛸 때면 바람 때문에 눈물이 나고, 호흡도 힘들고, 뛰고 나선 녹초가 되었지만 왠지 모를 희열감이 있었다. 애플워치가 ‘1km’라고 말할 때면 가슴이 벅찼다. 해냈다. 내가 해냈구나. 달리고 있으면 뭔가 나아지는 기분이었다. 더 이상 혼자 주저앉아 울고 있지 않은 기분이었다.
달리고 있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조금씩 거리를 늘려 1.5km까지 달렸다. 하지만 하루를 뛰면 다음날 하루는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앓아누웠다. 사실 아직 온몸이 덜거덕 거리던 내게 달리기는 버거운 것이었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달리고 싶었다. 내가 내 의지대로 성취하는 일이 하나쯤은 있길 바랐다.
이북리더기로 각종 달리기 책을 섭렵했다. 요가에 관련된 책도 무수히 많이 읽었다. 제주에 있어도 어차피 장시간 외출하긴 어려웠기에 숙소에 있을 때 나는 주로 책을 읽었다. 동영상을 보며 내가 할 수 있는 몇몇 쉬운 요가 동작을 따라 하고 러닝자세나 전후 스트레칭도 익혔다. 산책을 하다 지겨우면 500M 정도는 그냥 뛰어버렸고 바닷가 돌무더기 위에 앉아 요가로 몸을 풀곤 했다. 눈앞에 끝없이 펼쳐진 바다, 시원한 바람, 파란 하늘. 그렇게 바닷가를 달리고 해변에 앉아 스트레칭을 하며 파도 소리를 들으면 마음이 평화로워졌다. 이래서 사람들이 공기 좋은 곳에서 쉬는 걸까. 싶을 만큼.
집으로 돌아가면 요가를 시작하고(찾아보니 인 요가는 할 수 있을 것 같아 보였다) 달리기도 계속하려고 했다. 겨울 러닝을 검색하며 마음의 준비를 했다. 생각보다 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더울 땐 열사병으로 죽을 수도 있지만 추울 땐 뛰느라 오히려 땀이 난다고 하니까, 너무 춥지 않은 날엔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12월 초에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는 다시 타코 집에 갈 수 없어 많이 아쉬웠다. 애월 바닷가에 있던 타코 집은 우리 둘의 입맛에 쏙 맞아 있는 동안 네 번이나 갔던 곳이었다. 나는 샌디에고에서 먹었던 타코랑 맛이 비슷하다며(샌디에고는 멕시코와 국경이 맞닿은 곳이라 멕시코 사람들이 많이 산다.) 이건 찐이라고 엄지를 번쩍 들었다.
제주의 포근한 날씨 덕에 겨울을 조금 늦게 맞이할 수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달리기를 시작했다. 내 두 발로 땅을 박차고 달려나가는 것의 희열을 알게 되었다. 집에 돌아온 뒤엔 얼굴 절반을 가리는 마스크를 두르고 추운 거리를 뛰었다. 나는 더 이상 주저앉아 울지만은 않겠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두 발로 성큼성큼 달려 나가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