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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마 Apr 10. 2023

어떤 20대보다도 충동적인 36세의 퇴사

불안하고 당당하게, 헤어질 결심

회사를 그만두는 과정은 연애의 끝과 비슷하다. 우리 잘 지내고 있었던 거 아니었어..?라고 말하는 상대에게 이미 준비한 이별의 말을 고한다. 우리에게 대화는 충분했다. 더 이상은 함께할 수 없는 크나큰 가치관의 차이가 결국은 이 관계를 끝냈다. 잠시 시간을 가져보자는 간곡한 제의를 단호하게 뿌리치거나 모른 척 받아들인다. 둘 중 어떤 쪽이든지 결국 나는 반드시 그만둬야겠다며 매몰차게 굴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겪는 노동자만의 센티멘털한 감정이 있다. 나의 매일 중 최소 1/3의 시간을 보내던, 어쩌면 가장 일상에서 비중이 크던 상대를 떠날 결심을 했다는 것. 나는 이제 너를 벗어나야겠다는 마음을 먹은 것. 회사와의 헤어질 결심은 그 자체로도 사람의 일상을 바꾼다. 출퇴근의 기분이 다르다. 벌써 혼자 떠나온 기분과 추억이 매일 공존한다.


퇴사를 통보한 뒤 아직 퇴사일이 제대로 정해지지도 않은 주말, 나는 몇 달 만에 별 노력 없이 제대로 사람처럼 잠을 잤다. 일요일 밤이면 어떤 노력을 하든 한 숨도 자지 못하고 월요일 출근을 해왔는데, 그저 퇴사하겠습니다 말했다는 이유만으로, 내가 이제 떠날 수 있다는 생각을 제대로 입에 담았다는 것만으로 잠을 잤다. 이때까지 퇴사가 맞는 길인지 긴가민가 했는데 그 월요일, 명료해졌다. 그래봤자 영원히 백수가 되진 않겠지. 영 안되면 어디 알바라도 할 수 있겠지. 그만두는 게 맞다. 지금은 벗어나는 게 맞다. 푹 잠들고 깨며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나니 회사가 뭔가 가볍고 아련해졌다. 야근도 그리 억울하지 않았다. 이것도 곧 끝날 텐데 뭐. 이곳을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어깨가 가벼워졌다. 실제보다 나를 더 괴롭히던 일과 필요보다 나를 짓누르던 압박이 이제는 더 이상 내 것이 아니게 되었다. 너의 미래에는 더 이상 내가 없단다. 이 생각 하나만으로도 숨이 쉬어졌다.


사람이 사는 꼴이란 생각보다도 너무나 다양하다. 대기업에 십몇 년을 다니던 한 언니는 꽤 열심히 다니는 것 같던 회사를 그만두고 훌쩍 어학연수를 떠났다. 영어에 큰 꿈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영상통화 속에선 볼이 꽤 신나 보이게 발그레했다. 또 다른 언니는 역시 회사를 그만두고 갑자기 영상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또또 다른 언니는 회사에도 미리 얘기한 뒤 일 년 후 제주도에 옮겨갈 계획을 실행에 옮기고 있다. 별 계획이 없는 나는 이 중 어떤 언니들보다도 보편적이고 안전한 길로 다음 회사를 열심히 찾아내 이직하게 되겠지만 꼭 그렇지 않아도, 그러지 못해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단한 계획이 없어도 일단 불행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그만두어도 괜찮지 않을까. 내가 너무 불행하지만 않다면 다음 길은 무엇이든 있을 테니까.


경제적으로도 커리어로도 별다른 대책 없이, 잠을 푹 자기 위해 통보한 36세의 퇴사. 그 헤어질 결심을 스스로 응원하며 푹 자고 난 뒤 만끽할 봄이 아직 끝나지 않았을 때 부디 혼자가 될 수 있기를. 얼굴 붉히지 않고 건강히 헤어지기를. 우연히 만나면 기분 좋게 인사할 수 있도록 회사와 나 모두 헤어진 후 평안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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