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은 피우더라도 마지막은 솔직했으면
우리가 둘 중 한 명의 외도로 헤어진다면, 외도 상대와 진정한 사랑에 빠진 것과 가벼운 실수를 저지른 것 중 어느 쪽이 나을지 상상했던 적이 있다. 나는 차라리 진정한 사랑을 만난 쪽이 낫다고 여겼다. 당사자조차 실수라고 여길 만큼 아무것도 아닌 바람 때문에 헤어지는 것보다는, 위대한 사랑에 내 사랑이 희생된 쪽이 낫다. 그가 나를 버리고 만날 정도로 대단한 사람과 바람을 피운 편이 덜 아프리라 생각했다.
그 생각에는 아직도 변함이 없다. 전 애인이 외도를 저지른 상대에게 차라리 푹 빠졌기를, 나와 사귈 때는 느끼지 못한 불꽃을 느꼈기를 바란다. 아무 의미 없이 깜빡이는 전구에 현혹될 정도로 내 사랑이 별 볼 일 없지는 않았기를 바란다. 그가 현혹된 외도의 대상이 아주 강렬한 불꽃이라서 내 뜨거운 사랑이 잊힐 만큼 열정적이었기를.
발견한 외도의 증거를 보건대 전 애인과 바람피운 사람과의 사이가 전혀 진지해 보이진 않았지만 어쨌든 진실이 어느 쪽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외도를 발각당하고 집을 나가는 순간까지 나에게 거짓말로 변명을 했으므로.
진정으로 바랐던 것은 솔직함이었는데
지금까지 내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그의 사과라고 생각했다. 늦었지만 마지막으로 진심 어린 사과라도 해준다면 낫지 않을까. 그럼 상처에 연고라도 바르는 격이 되지 않을까 여겼다. 하지만 오늘 오랜만에 요가를 하며 깨달았다. 내가 바란 것은 진심 어린 ‘사과’라기보다는 ‘진심’ 그 자체였다.
지나오고 생각해보건대 헤어짐을 말하던 순간에 그가 말한 모든 것은 거짓이었다. 불편한 상황이 생기면 일단 회피하고 보는 그의 성격 탓이었을까.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결국은 내가 알게 될 거짓말로 외도에 대한 변명을 했다. 나 역시 정신이 없었기에 그 변명을 믿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굴의 의지로 헤어짐을 고했다. 그가 집을 나가고 몇 시간 뒤부터 밝혀진 진실은 나를 더욱 절망에 빠뜨렸다. 마지막 순간까지 비겁하고 구차한 변명으로 일관했다는 사실은 그가 바람을 피웠다는 것보다 더 나를 괴롭혔다.
그가 만약 마지막 상황에서라도 솔직했다면. ‘그래, 내가 실수했어. 연애 기간이 오래되면서 권태기가 왔는데 차마 말할 수 없었어. 그 와중에 만난 여자에게 끌렸고 실수를 저질렀어.’ 또는 ‘너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 내 마음은 이미 다른 사람에게 넘어간 것 같아.’라든지. 내가 원한 것은 거짓된 변명보다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진실이었다. 아무리 아픈 말이라도 진심이라면 감당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언젠가는 큰 알약처럼 꿀꺽 삼키고 소화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내민 것은 그저 상황을 모면하려는 먹물 같은 것이었고 나는 먹물이 옅어지며 하나하나 밝혀지는 거짓말에 더 큰 실망감을 맛보아야 했다.
그가 마지막까지 중요시 여긴 것이 나의 상처가 아니라 단순히 헤어지지 않는 것, 상황이 더 불편해지지 않는 것이었다는 게 가장 마음이 아프다. 그래도 5년을 사귄 나를 생각해주었더라면 마지막만큼은 솔직했어야 했다. 내가 느끼는 배신감은 외도 그 자체 대한 것보다도 외도를 위해 연애 중에 그가 해왔던 거짓말과 이별을 피하기 위해 늘어놓은 변명에서 비롯됐다.
상황을 회피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큰 문제다
그와 사귀기 시작하던 초반, 우리는 ‘권태기가 왔다고 느껴질 때는 꼭 서로에게 얘기해주자’고 약속했다. 물론 말하기 쉽지 않은 일이겠지만 그래야 한다고 믿었고 우리가 그럴 수 있을 거라고도 믿었다. 하지만 그는 연애뿐 아니라 일상에서도 문제가 발생하면 일단 게임을 하며 그 문제를 잊으려 노력했다. 나는 정반대로 문제가 생기면 오픈해서 이야기하고 해결 방안을 함께 찾는 쪽이었다. 연애 중에는 언제나 내가 문제를 캔 따개처럼 열어젖혔고, 그는 어쩔 수 없이 끌려와 앉아 방법을 모색했다. 그러면서 그 역시 이렇게 대화로 푸는 것이 맞는 길인 것 같다고 동의하곤 했다.
사귀는 중에는 내가 정면돌파형이니까, 회피형인 남자라도 함께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 방법이 먹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상황을 모면하려는 사람은 상황 자체를 숨기는 데에도 익숙하다. 문제적 상황 자체가 마치 없는 것처럼 행동할 수 있는 것이다. 마음을 열고 일상을 공유한다는 것은 폭풍 같은 논쟁과 극적인 타협의 반복이다. 어떤 상황이든 일단 도망가려는 사람의 뒤통수에 대고는 제대로 관계를 맺을 수가 없다.
내가 사랑에 빠진 사람이 하필 문제 회피형이었던 것이, 이 모든 사단의 근원이다. 그는 원래부터 사소한 거짓말을 아무 이유 없이 해왔던 사람이었고, 5년 사귄 여자친구를 두고 그의 인생에서 아무것도 아닐 티끌 같은 사람과 유사연애를 하며 바람을 피울 사람이었고, 마지막까지 거짓말로 비겁한 변명을 일삼을 사람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사람을 나는 사랑하게 되었고, 형벌은 결국 내 것이 되었다. 이 난장판 속에서 누구 한 명이라도, 하다못해 데이트하던 시간을 100% 게임에 쏟아붓고 있을 전 애인이라도 부디 행복하기를 바란다. 아주 시니컬한 마음으로.
*표지 이미지 : <바게트 호텔>_키미 앤 일이